[정신의학신문 : 정재석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세호는 다섯 살 때부터 방문 학습지로 한글 공부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선생님과의 수업을 좋아하고, 학습지 내용을 따라 스티커도 붙이고 색연필로 정성스레 글자를 따라 쓰곤 하였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나자 한글 수업을 싫어하기 시작했고, 어머니가 간판을 보면서 저거 ‘나비’에 나온 ‘나’라고 가리켜도 별로 신기해하지 않았다.

 

학습이 너무 이른 것 같아서 학습지를 중지하고, 아이한테 책만 읽어주고 억지로 하는 한글 학습은 시키지 않았다. 세호는 책을 읽어주면 좋아하고, 잘 이해하고, 자러 갈 때까지 자꾸 더 읽어달라고 조르곤 했다.

여덟 살이 되고 유치원을 졸업할 무렵이 되자 어머니는 불안해졌다. 다른 유치원 친구들은 다 한글을 읽고 쓸 수 있는데 세호만 한글을 읽지 못한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서점에 나가서 몇 가지 한글책을 사와서 아이랑 공부를 시작했다, 이제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생각에 싫다고 하는 아이에게 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세호는 ‘과자’, ‘사자’를 보고 읽을 수 있어도 ‘자랑’ 할 때의 ‘자’는 읽지 못했다. 인터넷에 나온 난독증의 증상과 비슷해서 선배 엄마들에게 물어보고 인터넷에 질문도 올려보았다. 하나같이 들려오는 소리는 나중에 흥미가 생기면 읽을 수 있게 되니 내버려두라는 얘기, 누구는 초등학교 4학년 때 한글을 깨쳤지만 지금은 명문대에 다닌다는 얘기, 한글을 늦게 깨우치면 창의력이 좋다는 얘기만 들었다.

 

사진_픽사베이

 

세호와 같은 아이에게 한글 낱자의 음가를 가르치고 받아쓰기를 잘하게 하는 방법에 대해 알아보자. 한글은 글자 그대로 소리가 나므로 파닉스 학습이 필요하지 않다는 주장도 있는데 잘못된 얘기이다.

한글은 음절 수준에서는 글자 그대로 소리 나지만, 두 음절이 만나는 순간 많은 음운현상이 발생하며 글자 그대로 소리가 안 난다. '맏형' 은 /마텽/으로 소리 나고, '국어'만 해도 /구거/로 소리 난다. 그래서 책을 어느 정도 읽어주기만 해도 낱자의 음가를 스스로 깨치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수많은 음운현상 때문에 낱자와 소리의 대응 원리를 스스로 깨치지 못하는 아이도 많다. 

 

파닉스 학습을 할 때 유의할 점이 몇 가지 있다.

첫째는 글자를 가르칠 때 글자 이름과 음가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ㄱ’의 이름은 /기역/이고 음가는 /g/이다. 'ㄱ'의 이름이 '기역'이긴 하지만, 이름은 책 읽을 때는 도움이 안 되니까 진짜 'ㄱ'의 소리를 공부할 거라고 얘기해 주면 좋다.

'ㄱ'은 /그/라고 소리 난다고 말해준다. 이 때 '그'라는 글자를 읽을 때처럼 /으/ 라는 모음 성분을 제대로 발음해주면 안 되고, 모음의 소리를 아주 짧게 발음해서, /으/ 발음도 아니고 /어/ 발음도 아니고 영어에서 강세가 없는 음절에 오는 약모음(schwa)처럼 해주면 좋다. 'ㄴ'은 /느/라는 소리가 나고 ‘ㄷ’은 /드/처럼 발음하는 식이다.

 

이렇게 한글을 배우면 영어를 배울 때도 매우 유리하다. 'hot'이란 단어를 /핱/ 이라고 여러 번 읽어주고 외우게 하기보다는, 'h'는 /ㅎ/소리가 나고 'o'는 /ㅏ/소리가 나고 t는 /트/소리가 나니까, 세 소리를 부드럽게 이어서 발음하면 /핱/로 읽을 수 있다고 알려주는 것이 좋다.

이 방법을 인식하면 처음 보는 어떤 단어도 파닉스 규칙을 따르기만 한다면 읽을 수 있고 받아쓸 수 있다. 'h'가 /에이치/라는 이름을 가졌다는 걸 알아도 /핱/이라고 읽을 때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사진_픽셀

 

한글에서도 글자의 음가를 배운 다음 'ㄱ' 에 'ㅗ'를 합치면 /그//오/, 합쳐서 빨리 발음하면 /고/ 가 된다는 식으로 가르치면 좋다. 만약 /그/를 발음할 때 제대로 /으/ 발음을 하게 되면 /고/라고 부드럽게 발음하지 못하고 /그오/처럼 하나의 소리로 만들기 어렵다.

그리고 자음 19개를 모두 가르친 다음 모음을 가르치면 기억을 힘들어하는 아이가 많으므로, 자음을 3개 정도 가르치고 모음을 2개 정도 가르치는 식으로 교육하는 것이 좋다.

그다음엔 가, 거, 나, 너, 다, 더 같은 식으로 부드럽게 하나의 소리로 합성하는 연습을 해본다. 자석이나 플라스틱으로 만든 글자 모형으로 연습하면 좋다. 아래 그림과 같은 상자를 크게 만들어서 자석 글자를 놓고 읽으면 좋다.

다음에 공부할 때는 전날 배운 자음, 모음, 음가를 복습한 다음 새로 ㄹ,ㅁ,ㅂ을 배우고 ㅗ,ㅜ를 배운 다음 전날 배운 것도 합쳐서 자음 6개와 모음 4개를 조합해서 읽어본다.

로 루 모 무 보 부 고 구 노 누 도 두 라 러 마 머 바 버

처럼, 순서대로 하지 말고 섞어서 하면 좋다. 나중에 받침을 가르치고 초성-모음-받침을 합성하는 방식으로 한 단계씩 진행한다.

 

둘째, 파닉스 교육이 잘 이루어지려면 자음, 모음의 낱자를 보고 정확한 소리와 연결하여 기억하는 방법을 잘 가르치는 게 중요한데, 잘 기억하는 방법을 몇 가지 소개한다. 

 

1) 몬테소리 쓰기 연습판

쌀이나 모래와 같은 것을 담아서 평평하게 고른 다음, 유리판 아래에 끼워 놓은 글씨의 모양을 따라 손가락으로 글씨를 쓰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촉감이나 손가락의 움직임에 대한 운동감각과 모음의 글자-소리를 연결시켜 기억을 강화할 수 있다. 쓰면서 크게 해당 모음을 소리 내는 것이 중요하다.

 

2) 이글한글

이글한글은 안드로이드 앱으로도 나와 있고 동영상도 쉽게 구해볼 수 있다. 몬테소리와 달리, 촉감을 이용하지 않고 손가락 모양을 이용해서 모음을 기억하게 하는 아이디어가 훌륭하다.

이글한글의 손가락 모양이나 수화의 손가락 모양, 온몸을 이용한 낱자의 표현 같은 것은 잘 익혀두면 소그룹 또는 대그룹 수업에서는 유용하다. 발음할 때 입모양 그림 위에 글자를 그려 넣으면서 기억을 강화하는 방법도 있다.

 

3) 읽기자신감

읽기 자신감의 특징은 아동이 정확한 모음 발음을 하도록 피드백을 주는 점이다.

그저 아이가 잘 흉내 내도록 하는 것이 아니고, 아동의 입모양과 올바른 입모양을 비교할 수 있게 해주는 그림이나 동영상 자료를 충분히 이용한다거나, 거울을 가져다 놓고 아이가 스스로 발음을 할 때 자신의 입모양을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있게 한다. 언어발달이 느린 아동은 자신이 입을 더 크게 벌리고 있는지, 작게 벌리고 있는지에 대한 느낌이 약한 경우가 많다.

또, 모음을 그림의 어떤 지점을 떠올리도록 유도하는데

각자 /이/ -/에/-/애/-/아/ 를 차례로 발음해보면 턱은 내려가고 혀는 상대적으로 뒤로 가는 느낌을 느껴보게 한 다음 삼각형의 위치와 대응시킨다.

또 /아/-/어/ -/오/-/우/ 의 순서로 삼각형의 우하변에 해당하는 부분을 연속해서 발음하면서 거꾸로 턱이 올라가는 느낌을 느낄 수 있다. 처음에는 어렵지만 이런 느낌을 알아 가다 보면 어떤 모음을 듣고 스스로 발음하면서 지도상의 어디에 해당하는지 찾아낼 수 있게 된다.

 

세호가 글자를 조금씩 읽기 시작하면, 쓰기도 병행해서 연습한다면 맞춤법은 물론이고 읽기 실력이 느는 데도 큰 도움이 된다. 철자를 정확하게 쓰기 위한 제일 좋은 연습은 받아쓰기이다. 받아쓰기를 지도하는 방법에 대해 알아보자.

한글은 읽는 것보다 쓰는 것이 훨씬 어려운 편이다. 맞춤법도 어렵지만 모아쓰기를 하므로 자음, 모음 각각의 크기를 조절해서 보기 좋게 쓰려면 많은 연습이 필요하다.

어떤 아이들은 글씨 쓰기를 배울 때 어려움을 오래 겪기도 하지만, 글씨가 예쁘지 않은 것보다는 맞춤법이 틀리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왜냐하면 맞춤법이 틀린다는 것은 그 단어가 아이에게 일견단어가 아니라는 것이고, 흔히 나오는 단어가 일견단어가 아니라는 것은 아이의 읽기 능력이 충분히 늘고 있지 않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사진_픽셀

 

먼저 잘못된 받아쓰기 방법에 대해 말하고 그 대안을 제시해 본다.

 

1. 초등 저학년의 경우 아이에게 내일 시험 볼 부분 1번부터 10번까지 한번 써보라고 하고, 이어서 어머니가 불러주고 잘 받아쓰는지 확인한다.

⟶ 잘못된 방법이다. 아이는 시험 볼 부분을 베껴 쓰면서 사진을 외우듯이 시각 기억으로 외우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외운 것은 하루 이틀 후면 잊어버리게 된다. 반대로 아이가 시험 볼 부분을 한 번도 보지 않은 상태에서 어머니가 불러준 것을 받아쓰는 것으로 시작한다.

 

2. '생활'이라는 단어를 불러주었더니 아이가 '생' 은 잘 쓴 다음 "엄마, '활'은 어떻게 써?"라고 묻고 어머니는 '활동' 할 때 '활'이잖아, 또는 '화'에 '리을' 이잖아 하고 가르쳐 준다.

⟶ 잘못된 방법이다. 예시처럼 하는 것을 ‘통글자 단서’를 준다고 한다. '닌' 자를 어떻게 쓰냐 물으면 '닌텐도' 할 때 '닌'이라고 말해주는 것인데, 단어를 통째로 기억하는 습관을 조장할 수 있다. 화에 리을이라고 말해주는 것은 받아쓰기의 핵심적인 부분을 대신해 준 것이다.

대신 ㅎ-ㅗ-ㅏ-ㄹ 하는 식으로 단어의 자음, 모음을 늘려서 발음해주면 좋다. 하나하나 끊어지면 안 되고 부드럽게 이어서 발음해 준다.

 

받아쓰기의 핵심은 어떤 소리를 듣고 더 작은 단위로 분절한 다음, 하나하나 자음모음 글자로 바꾸는 작업이다. 작은 단위로 분절해서 쓸 수 있어야 처음 듣는 단어도 글자로 바꾸는 능력이 생긴다.

그런 능력이 갖추어지면 우리말 맞춤법은 96% 이상은 외우지 않고 쓸 수가 있으며, 예외적인 맞춤법만 기억하면 된다. 예를 들어 'ㅔ'와 'ㅐ'를 구별해서 쓰는 상황, 'ㅅ'과 'ㅆ'을 쓰는 상황, 겹받침을 쓰는 상황은 물론 일일이 외워야겠지만, 그 외 대부분의 단어의 맞춤법은 외울 필요가 없다.

공부를 암기를 위한 투쟁으로 만드는 것, 그것은 공부를 싫어하게 만드는 지름길이다. 기억할 부분을 줄이고 원리를 적용할 수 있게 해주는 상황을 자주 만들어 주어야 공부를 좋아하게 된다.

 

사진_픽셀

 

3. '컴퓨터'를 받아쓰기하라 하니 '컴퓨처' 라고 받아쓰기한 경우 '처' 가 아니고 '터'라고 하면서 'ㅌ'으로 고쳐쓰라고 하면서 정신 차리라고 말해준다.

⟶ 잘못된 방법이다. 아이가 저지르는 이 실수를 '낱자-소리 대응의 부정확' 유형으로 분류하는데, 파닉스 공부가 아직 충분치 않다고 보아야 한다. 문장이나 단어 수준의 받아쓰기를 하거나 일기, 독서록 같은 것을 쓸 수준이 안 된다.

이런 아이는 연필을 내려놓고 어릴 적 쓰던 자석글자 모형을 준비해서 '터' 라고 불러주고 모형으로 만들어보게 한다.

잘 만든다면 다음에는 모음은 그냥 두고, 자음만 바뀌는 퍼,허,버,머 같은 글자를 차례로 불러준다. 이어서 자음은 그냥 두고, 모음만 바뀌는 글자나 받침만 바뀌는 글자를 불러주면 좋다.

아이가 어떤 글자든 척척 만들 수 있을 때 단어수준 받아쓰기를 할 수준이 된 것이다.

 

4. '쫓아가서'를 받아쓰기시켰더니 '쫒아가서'로 받침을 틀리게 쓴 경우, 지우고 다시 'ㅊ'으로 쓰라고 한다.

⟶ 잘못된 방법이다. 이렇게 하면 다음에도 계속 틀릴 확률이 높다. 이 학생이 철자를 틀린 이유는 실수가 아니라 연음법칙을 아직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읽을 때 '쫓아가서'를 /쪼차가서/로 정확하게 연음해서 읽었더라도, 1:1로 대응시킨 게 아니라 4:4의 대응을 시킨 것이다. 악보를 보고 음표대로 피아노를 치는 게 아니라 악보의 앞부분만 보고 연주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많이 부르면 악보를 안 봐도 연주할 수 있지만 처음 보는 악보를 보고 연주할 때는 힘들어하는 상황과 비슷하다.

‘ㅊ’ 받침이 /쪼차가서/ 에서 /ㅊ=ch/ 이라는 발음 성분을 담당한다는 인식이 없다면, 쫓기는, 쫓는 등의 단어에 나오는 '쫓'이라는 성분이 같은 의미가 있다는 의미의 확장이 되지 않아, 이해력과 어휘력의 발달이 더디게 될 가능성이 높다.

잘 읽어야만 어휘력이 늘지, 무턱대고 많이 읽는다고 어휘력이 늘지 않는다. 이 학생에게 틀리게 쓴 걸 지우지 말고 바로 아래에 바르게 쓴 다음 아래위 단어에서 어떤 부분이 차이가 나는지 찾아보게 동그라미 쳐보게 하면 좋다.

 

 

정재석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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