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정재석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취학 전 아동 한글교육 얘기를 시작하기 전에 충격적인 현실 몇 가지 지적하고 시작하려 한다. 매년 다양한 매체의 기자들로부터 너무 일찍 문자 교육을 시키면 생기는 나쁜 영향에 대해 말해달라는 전화를 받는다. 필자는 문자 교육을 비롯해 모든 교육은 강압적이지만 않으면 특별히 나쁠 이유는 없다고 얘기한다. 그러면 기자는 답답해하면서 아직도 뇌가 유연한데 문자가 들어가면 창의성이 파괴되거나 공부에 대한 흥미를 일찍 잃어버리거나 하는 현상이 있지 않느냐고 한다. 그런 현상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하면 기자는 매우 아쉬워하면서 전화를 끊는데, 다음날 어김없이 동물실험을 하는 기초의학교수의 말을 인용하거나 동네에서 발달센터를 운영하는 분의 목소리를 빌려 조기 문자 교육을 하면 창의력이 저해되고 공부에 흥미를 잃어 심하면 우울증, ADHD, 난독증이 생길 수 있다는 기사가 나온다. 기자들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조기 한글교육 관련 그간의 기사를 살펴보니 조금씩 이해가 갔다.

 

2018년 교육부의 발표에 따르면 초등학교 신입생은 한글을 모른 채 입학했다고 전제하고 연필 잡기부터 자음과 모음 쓰기 등 기초부터 가르칠 계획이라 한다. 서울교육청은 초1, 2학년을 대상으로 ‘숙제 없는 학교’도 운영하고 알림장 베끼기, 받아쓰기도 하지 않을 테니 학교를 믿고 한글 선행학습을 하지 말라고 한다. 여기서 키워드는 ‘사교육’과 ‘선행’이고 이 2가지 악을 퇴치하기 위해서는 무슨 거짓말을 해도 정당하다는 결연한 의지가 느껴진다.

 

좋은교사운동이 2015년 전국 영유아 사교육에 대해 실시한 설문조사를 한 결과 한글 선행학습 비율이 3세에 84.5%, 4세에 89.7% 였다. 이유를 물어보니 당연한 것 같아서 31%, 학교에서 제대로 가르치지 않아서 25%, 다른 아이들보다 뒤쳐질 것 같아서 25%이다. 이렇게 볼 때, 학부모들은 국가의 교육과정을 믿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유명 교육평론가인 이범은 “우리나라는 국가가 모국어 문자 교육을 책임지지 않는 거의 유일한 국가이다. 국가가(영유아 한글 선행을 알면서) 이중 플레이(초1에서 시작)하고 있다.”라고 비판했다.

 

사진_픽사베이

 

국가가 책임지겠다는 말을 믿어야 할까, 각자도생의 길을 찾아야 할까? 한글읽기과학연구단(조증열 외, 2015)은 만 4세, 5세, 초등학교 1~3학년 아동을 대상으로 전국적으로 각 200명씩 연구한 결과 한글 읽기, 쓰기 부진학생의 비율이 14~20% 정도라는 충격적인 결과를 발표했다. 받침 없는 글자를 모르는 학생은 초등학교 입학과 함께 크게 줄어들었지만(입학 전 2월 48% → 초1학년 6월 7%) 받침이 있는 글자(자음+모음+자음)는 초등학교 3학년까지 계속 모르고 있는 학생이 많았다(초1 6월 76% → 초2 6월 34% → 초3 6월 17%). 대부분의 글자는 받침이 있으므로 초등학교 3학년 1학기가 끝나도 혼자서 교과서를 읽거나 시험문제를 풀 수 없는 학생이 17%나 된다는 충격적 결과이다. 일선 교사들도 비슷한 경험을 얘기하는데 특히 사회경제적으로 열악한 지역이나 읍면지역(농산어촌)에서 초등 1~2학년을 지도한 경험이 있는 교사의 34.7%가 읽기, 쓰기 부진학생의 비율이 10% 이상이라고 응답(도시지역 16.5%)했다.

 

한글 선행을 막기 위한 정부와 언론의 필사적인 노력, 정부를 신뢰하지 않는 교사와 학부모, 그리고 가난한 집 아이들의 형편없는 한글 읽기 실력. 이것이 현재 한글교육의 현실이다. 이렇게까지 상황이 나빠진 근본 원인으로 두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서구의 발달된 물질문명에 기가 죽은 우리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찬란한 정신문명, 그 대표적인 ‘한글’에 대한 거짓 신화와 교육학자들이 공자님 말씀처럼 떠받드는 ‘피아제 이론’의 신화이다.

 

훈민정음의 서문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똑똑한 자는 반나절이면 깨우치고 어리석은 자 역시 일주일이면 깨우칠 것이다.”

위키백과에서 ‘파닉스’라는 단어의 뜻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이 나온다.

“파닉스(Phonics)는 단어가 가진 소리, 발음을 배우는 교수법이다. 영어권에서는 다소 난독증을 보이는 아이에게 읽는 법을 가르치기 위한 교육 방법으로서 이용되고 있다. (중략) 한국어의 음절은 앞의 받침이나 두음법칙과 같이 단어의 위치와 관련된 단순한 법칙을 제외하고는 그대로의 소리를 가지고 있으므로 별도의 파닉스 학습이 필요하지 않다.”

 

문자 교육이란 파닉스 교육을 말하는데, 한글은 누구나 쉽게 깨칠 수 있으므로 책만 읽어주면 되지 따로 문자 교육이 필요 없다는 믿음이 아직도 굳건하다. 최근까지도 난독증에 대해 교육관료들은 영어권에는 많지만 한국에는 거의 없는 희귀병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난독증 학생을 학교에서 더 교육하려 하기보다는 치료비를 지원해서 병원으로 보내버리는 식의 대책을 수립한다. 치료비는 몇 달치밖에 지원하지 않으나, 난독증 치료는 몇 년이 걸리므로 좋지 않은 대책이다.

 

1896년생인 피아제의 유명한 인지발달이론은 인지발달을 유기체와 환경의 상호작용으로 파악하였고,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이론이었으며 아직도 우리 교육에서 중요한 이론이다. 그의 이론은 인지발달단계를 만 7세를 기준으로 전조작기와 구체적 조작기로 나눈다. 만 7세 이전에는 구체적인 사물을 가지고 실제 경험을 하는 활동들을 통해서 지식을 습득해야 하고, 추상적인 기호인 문자나 숫자를 가르치는 것은 아이들의 발달 특성에 맞지 않다고 주장한다. 피아제 이론이 나온 지 80년 이상 지난 지금, 피아제 이론은 현실 적용 가치가 없는 골동품이라고 보면 된다. 구체적 조작기에 도달했다는 증거인 수(數)의 보존성은 만 2세 아이에서도 발견되었다. 유아기에 하는 수나 문자의 교육이 뇌를 가장 광범위하게 활성화시킬 수 있는 좋은 교육방법이고, 만 4세가 넘어 음절 수준 음운인식이 가능하다면 문자를 배울 수 있다는 연구결과가 나와 있다.

 

결론적으로 잘못된 훈민정음과 피아제 신화 때문에 유치원에서 한글과 수를 가르치지 못하기 때문에, 또 누구를 더 지도해주어야 하는지 진단평가를 하면 과열경쟁이 생길까 두려워하는 사람들 때문에, 가난한 집의 학생이 학습부진학생이 되는 걸 막을 수 있는 골든타임 2년은 그냥 지나간다. 이 상황을 찬성하는 관료들은 ‘일단 지켜보기’(WAIT TO SEE)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반대하는 학자들은 ‘망할 때까지 기다리기’(WAIT TO FAIL)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슬픈 일은 초등학교 3학년이 지나면 학습부진학생을 선별한 후 구제하기 위해 수백억을 들이는데 효과가 적어 교사들의 고민이 깊다.

 

사진_비상티스쿨 홈페이지

 

답답한 현실을 뒤로하고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우리는 수학은 사다리나 계단처럼 단계가 있어서 앞의 단계를 모르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한다고 생각하지만, 국어는 저금통에 돈을 모으듯이 차곡차곡 말하고, 듣고, 읽고, 쓰는 경험을 늘려주면 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은 절반만 옳은데, 국어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게 되기 전에는 밟아야 할 단계가 있다. 그것은 음절 인식-음소 인식-낱자/소리 대응(파닉스) 단계이다.

그다음에야 어휘력, 배경지식 등이 쌓이며 이해력이 늘어가는 과정이 시작된다. 취학 전에 한글을 가르쳐도 잘 늘지 않는 아이들 중 대부분이 ‘음소 인식’이라는 단계에서 막혀서 다음 단계로 올라가지 못하고 있으며, 초등학교 학생 중 한글이 힘든 학생은 ‘음소 인식’ 단계는 막 벗어났지만 아직 낱자/소리 대응 단계를 넘어서려 분투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사진_비상티스쿨 홈페이지

 

음소 인식이란 무엇인지 알아보자. 위의 그림처럼 /gom/이란 단어를 귀로 듣고 나서 이것이 더 이상 분해할 수 없는 한 덩어리로 듣는 것이 아니라, /g/ /o/ /m/이라는 3가지 발음 성분으로 나누어 들을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그렇게 나누어 들어야만 '곰' 이란 단어에서 'ㄱ'이 /g/라는 발음 성분과 대응된다는 걸 알 수 있다. 위 그림에서 오른쪽을 보면 /gom/이란 소리는 더 이상 분해하지 못하고 그냥 '곰'이라는 단어와 통째로 대응시키고 있는데, 음소 인식을 하지 못하는 상태로 한글 습득이 늦거나 난독증을 가진 아이가 처한 상황이 바로 이렇다.

 

위 그림을 보면 글자와 발음(소리)을 연결시킬 때 필요한 능력 3가지를 보여준다. 첫째는 ‘곰’ 글자를 보고 ‘ㄱ’,‘ㅗ’,‘ㅁ’으로 눈으로 나누는 능력, 둘째는 ‘ㄱ’이란 시각 기호와 /g/라는 소리를 연결시키는 기억력, 셋째는 /gom/이라는 소리를 듣고 그 안에 /g//o//m/라는 소리 성분으로 나누는 능력이다. 지금까지 난독증이나 한글이 늦은 아동은 첫 번째, 두 번째 능력이 부족할 것으로 보았으나 과학적 연구결과 예상을 뒤엎고 세 번째 능력인 음소 인식 능력이 부족한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그래서 한글이 늦은 아이에게 글자를 베껴 쓰게 하거나 같은 글자를 찾게 하는 방식의 접근방법이나, 글자를 기억하는 기술을 가르쳐주는 접근법은 효과가 별로 없다고 보면 된다.

 

대부분의 취학 전 아이들은 책을 많이 읽어주고 통 글자 방식으로 몇 개월만 공부시키면 ‘곰’의 ‘ㄱ’과 ‘간’의 ‘ㄱ’이 같은 소리가 난다는 사실을 깨우친다. 이를 흔히 낱글자 인식이 된다 또는 자음, 모음을 안다고 하는데 전문용어로 음소 인식(음소 수준 음운인식)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더 심한 경우는 /불곰/에서 /불/ 과 /곰/도 분절해서 인식하지 못하는데 이를 ‘음절 인식’이라고 한다. 이 경우 글자의 소리뿐 아니라 글자의 이름도 학습하기 어렵다.

 

위에서 제시한 예는 음소 인식 중에서 '분절' 능력에 관해서만 말한 것이고 ‘합성’이라는 능력 또한 중요하다. 예를 들어, 그냥 아무 글자가 없는 상태에서 말로  /크/(ㅋ) 더하기 /이/(ㅣ)소리를 합해서 부드럽게 이어서 말하면 무슨 소리가 될까? (정답 키) /끄/(ㄲ) 더하기/어/(ㅓ) 더하기 /므/(ㅁ)소리를 부드럽게 이으면 무슨 소리가 될까?(정답: 껌)

 

이런 능력을 이용하면 아래 그림처럼 '활'이란 단어를 보고 /ㅎ/ /ㅗ/ /ㅏ/ /ㄹ/라는 자음 모음을 차례로 부드럽게 합성해서 읽을 수 있다. 어른은 그렇게 읽지 않고 한눈에 보고 읽지만 이제 막 한글을 배우는 아이는 그렇게 읽어야 하며, 영어 같은 외국어는 특히 그러하다. 합성 능력이 있어서 자음, 모음을 이어서 부드럽게 글자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자음 14개와 모음 10개만 알면 무슨 글자든지 읽을 수 있다. 그렇지 않고 한 글자씩 외우려면 경우의 수로는 1만 개 이상의 한글 글자를 외워야 한다. 자주 쓰는 것만 외우려고 해도 2000개 정도는 외워야 하는데 이 작업은 좀 나이가 들어서 집중력이 올라가는 초등학교 4학년 정도가 되면 완성될 수 있다. 그래서 음소 인식이 안 되는 난독증 학생은 초등학교 4,5학년 정도면 한글을 읽을 수는 있게 된다.

 

사진_비상티스쿨 홈페이지

 

만약 /활/이라고 소리 내어 읽을 수 있지만 그전에 /활/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는 '활'이라는 단어를 읽어도 뜻을 모를 것이다. 미국에 유학 간 우리나라 학생이라면 읽긴 해도 뜻이 모르는 단어가 많을 것이다.

 

결론을 내려보자. 뇌과학 및 발달심리학적으로 만 4살이 넘고 음절 인식이 가능하면 한글을 가르쳐도 되며 강제적으로 하지 않는 한 나쁠 건 없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취약계층의 아이들이 한글을 잘 읽지 못해 학습부진의 늪에 빠지는 경우이다. 이를 막기 위해서 취약계층이 많은 지역의 어린이집에서는 6살, 7살에 한글과 수 교육을 많이 시켜야 한다. 또 초등학교 입학하자마자 선별검사를 해서 부진의 위험이 있는 아이들에게 한글교육을 제공해야 한다. 현재 교육정책은 미리 선별할 좋은 검사법이 없고 선별해봐야 조기에 예방하는 교육법이 없다는 가정 하에 수립되었다. 최근 검사법과 교육법이 많이 나와 있다. 다음 편에서는 한글을 어떻게 교육하면 좋은지에 대해 얘기하려 한다.

 

 

정재석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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