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정재석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세호는 초등학교 2학년인데 아직 한글을 제대로 읽지 못한다. 받침 없는 글자는 대체로 읽을 수 있지만 받침이 있는 글자나 전에 본 적이 없는 글자를 읽을 수 없다. 세호는 수업 시간에 하는 과제를 할 수도 없으며 시험문제를 혼자 풀 수 없어 선생님이 읽어주어야 한다. 선생님이 읽어주기만 하면 점수가 좋은 편이고 수업을 듣고 잘 이해할 수 있다. 희한하게도 받아쓰기는 전날 어머니와 20-30분 같이 연습하면 1-2개밖에 틀리지 않는다. 초등학교 1학년 때 교사는 집에서 안 시켜서 한글을 늦은 것일지도 모르니 집에서 열심히 시키라는 조언을 하고 아이가 기죽지 않도록 배려해주었다. 세호는 점점 학교 가기 싫어하고 어두운 표정으로 집에 올 때가 많다. 세호 어머니는 대안학교나 홈스쿨링을 알아봐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다.

 

글을 제대로 읽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능력이 필요한데 하나는 글에서 의미를 파악하는 능력, 즉 언어 이해력이고, 다른 하나는 문자로 표기된 단어를 소리로 바꾸는 해독(음독) 능력이다. 이 두 능력은 기초가 되는 여러 인지능력들이 단계별로 온전한 경우에만 제대로 발달할 수 있으며, 과정 중 어느 하나에서 큰 문제가 있거나 작은 문제가 여럿 모이게 되면 글을 제대로 읽을 수 없게 된다.

 

사진_픽셀

 

언어 이해력과 관련된 요소를 두 가지로 나누어 보면, 하나는 언어의 형식에 관한 지식이고 하나는 세상사에 대한 지식으로 나눌 수 있다. 언어의 형식에 관한 지식은 다시 크게 세 가지 요소로 나눌 수 있는데 언어의 소리에 관한 지식(phonology), 언어의 의미에 대한 지식(semantics), 단어의 조합 규칙(syntax)이다. 세상사에 대한 지식 즉 배경지식은 주변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얻어진 사건 및 절차에 관한 지식이다. 우리는 인쇄된 글을 해독한 다음 언어 지식과 배경지식을 이용해서 추리, 추론하여 의미를 구성해 낸다.

해독은 글자를 대응하는 말소리로 바꾸는 과정을 말하며 그 연결이 매우 규칙적인 언어도 있고 불규칙한 언어도 있다. 글자를 말소리와 연결시키기 위해서는 몇 가지 중요한 능력이 미리 발달해 있어야 한다. 그중 음소 인식능력이 가장 중요한데, 귀로 들은 말소리 속에 들어 있는 소리의 하부단위인 음소 즉, 자음과 모음을 지각하고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다. 단어를 구성하는 자·모 낱자(예를 들어 ㄱ, ㅜ)가 분절하여 지각한 자음, 모음과 일대일로 대응된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그 낱자의 소리값([g], [u])을 알 수 있고, 자모 낱자가 모여서 만든 글자가 귀로 들은 단어와 일치한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이 경우에 알파벳 원리, 다시 말해 자모 체계의 원리를 이해했다고 한다.

 

낱자와 소리의 대응을 깨우친 아동이 글을 자주 읽다 보면, 어떤 자모가 조합된 특정 단어를 유난히 자주 만나게 되고, 결국 그 단어의 시각적 심상과 청각적 심상을 기억하게 된다. 이후에 그 단어를 접할 때는 자소-음소를 일일이 대응시켜 음소를 합성해서 읽을 필요가 없이 한눈에 읽고 뜻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충분한 독서 경험을 통해 한눈에 읽을 수 있는 단어가 쌓이면 글을 빨리 그리고 적절한 억양으로 읽을 수 있다. 이를 가리켜 읽기 유창성이라고 한다.

읽기 유창성은 독해에도 매우 중요한데, 느리고 힘들게 해독하는 아이는 자신의 인지적 자원을 해독에 대부분 할당해야 하므로 이해나 기억을 위해 필요한 집중력이 부족해지기 때문이다. 해독 과정에 집중력을 70% 투자해야 하고 이해하고 생각하는데 남은 집중력이 30%인 아이가 있다면 아무리 언어 이해력이 좋아도 읽은 내용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아무리 옆에서 책 읽기가 중요하다고 말해주어도 읽어도 내용도 잘 모르겠고 이내 책을 내려놓곤 한다.

 

사진_픽사베이

 

하는 수 없이 책을 읽을 때는 해독 과정에 집중력을 많이 뺏기지 않으려고 2가지 꼼수를 사용한다. 하나는 건너뛰며 읽기(skip reading)로 익숙한 단어만 골라서 읽고 모르는 단어는 넘어가는 방식이고, 하나는 추측 읽기(guess reading)로 단어의 앞부분만 읽고 뒷부분은 자세히 읽어보지도 않고 문맥에 따라 그럴 것이라고 추측해서 읽어버리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책을 읽으셨다’를 ‘책을 읽었다’로 마음대로 추측해서 읽는 것은 그래도 의미가 크게 바뀌지 않겠지만 ‘빛이 바랬다’를 ‘빛을 받았다’라고 읽는다면 의미가 크게 바뀔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책을 읽다 보면 처음 보는 단어를 만날 수도 있고 의미가 애매한 문장을 만날 수도 있는데 넘어가 버리거나 자기 입맛대로 바꾸어 이해하므로 국어 실력이 늘 기회가 없어지는 점이다. 최근 인터넷 기사에 본문과 무관한 댓글을 다는 사람에게 네티즌들이 난독증이냐고 비난을 하는 모습이 자주 보이는데 난독증을 가진 사람이 본문의 내용을 제대로 읽어보지 않고서 임의대로 이해하는 성향이 있기는 하다.

 

해독 과정에 정신적 에너지를 전혀 투자하지 않아 남은 집중력 전부를 읽는 내용을 이해하고 생각하는 데 사용하는 아이가 있다면 이 아이는 TV나 게임만큼이나 책 읽기를 좋아할 것이다. 독서량이 많으면 배경지식과 어휘력이 점차 쌓이므로, 무슨 책을 읽던지 읽은 내용과 연관하여 이미 아는 내용을 폭넓게 연상할 수 있어 공부가 싫지 않을 것이다. 읽기 유창성이 상위 10퍼센트인 아이들은 하위 10퍼센트인 아이들에 비해 독서량이 300배 이상 많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이를 ‘마태효과(Matthew Effect)’라고 부르기도 한다. 성경 마태복음 25장 29절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에 착안해서 미국의 사회학자 로버트 머튼이라는 사람이 만든 학술용어이다. 가진 자는 더 많이 갖게 되고 덜 가진 사람은 점점 더 적게 가지게 되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소득 양극화 현상뿐 아니라 성적 양극화 현상도 설명할 수 있다.

 

사진_픽사베이

 

현재 우리나라 초등교육의 키워드인 ‘창의력’ 강조의 분위기 속에 상대적으로 읽기, 쓰기 같은 기초학습기술이 전보다 덜 중요시되고 있으며 심지어는 기초학습기술이 약해야만 창의성이 생긴다고 얘기하는 사람도 생겨난다. 창의성이 갑자기 영감처럼 떠오른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창의성은 많은 경험들 사이의 관련성 중에 다른 사람이 보지 못했던 관련성을 발견하는 능력이다. 많은 경험을 하려면 체험도 중요하지만 독서만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유창하게 책을 읽을 수 있고 독서량이 많은 학생이 더 창의성이 높을 가능성이 높다.

 

난독증은 왜 생기냐는 질문에는 3가지 측면에서 대답할 수 있다. 첫 번째, 대부분의 난독증은 태어나기 전에 결정되기 때문에 가족력과 유전이 중요한 병이다. 부모 중 한 명이 난독증이면 자식의 40-50퍼센트는 난독증이다. 지금까지 발견된 난독증 유전자는 엄마 뱃속 태아의 뇌에서 뇌신경세포가 제자리를 잡고 적절히 연결되는 것을 방해한다고 밝혀졌다.

두 번째, 남들과 다른 유전자가 어떻게 난독증을 발생시키는지 설명이 필요하다. 난독증 유전자가 어렸을 때 말소리를 정확하게 듣는 능력에 지장을 주므로, 어려서부터 말이 늦거나 발음이 좋지 않게 만들다가, 학교 들어갈 무렵까지도 머릿속 모국어 말소리에 대한 샘플이 정확하지 않게 만든다. 예를 들어 “볼펜”이라는 말소리를 듣고 아이의 뇌신경은‘볼펜’, ‘골펜’ ‘돌펜’에 모두 연결시킨다. 이런 현상을 음운인식능력이 부족하다고 하는데 그래서 난독증이 생긴다.

세 번째, 말소리를 듣는 신경이 발달하지 않아서 글자랑 연결을 잘 못 시키는 게 원인이라면 왜 난독증 학생들 중에서 수학을 못하는 난산증, ADHD, 운동신경 문제가 자주 동반되는지, 또 남자아이들한테 많은지에 대한 설명도 필요하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나온 것이 거대세포 이론이다. 말소리, 수감각, 집중력, 운동신경을 담당하는 각각의 뇌신경에서 특수한 역할을 하는 세포인 거대세포에 문제가 있다는 이론이다. 우리가 사진을 찍을 때 손을 떨면 잔상이 남아 사진이 선명하게 나오지 않는데 최근 손떨림 방지 기술이 적용되어 웬만큼 손을 떨어도 사진이 잘 나온다. 이처럼 말소리의 잔상, 물체의 잔상, 감정의 잔상을 깨끗하게 정리하여 잘 듣고, 집중하고, 수를 세고, 공을 던지게 해주는 거대세포의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여러 가지 현상이 난독증 학생한테 발견된다. 거대세포 이론은 주류 학계에서 인정받고 있으나 반론도 적지 않다.

 

사진_픽사베이

 

현재 난독증의 일차적인 치료는 교육심리적 치료이다. 난독증에 대해서는 음운인식능력 훈련, 체계적인 발음 중심 교수(phonics), 해독 훈련, 철자법 지도, 유창성 훈련이 결합된 치료교육이 가장 효과적이다. 예일대 셰이위츠 박사 팀은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 77명을 대상으로 음운인식능력 향상에 초점을 맞춘 치료를 한 결과, 읽기 유창성과 이해력이 향상되었고 MRI 뇌 사진에서도 건강한 학생의 뇌처럼 정상화되었음을 보고해서 세상을 놀라게 한 바 있다.

비록 유전적이지만 불치병이 아니고 조기에 발견하고 집중적인 치료교육을 적절하게 실시한다면 대부분 극복할 수 있거나 어려움이 최소화된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물론 미국에서도 난독증 학생의 90퍼센트는 사이비 치료를 받고 있다는 조사가 있어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킨다. 사이비 치료는 난독증에 대한 대중의 지식이 아직 부족한 점을 파고들어 상당히 그럴듯해 보이는 치료를 제공한다. 청지각(토마티스) 치료가 대표적인 사이비 치료인데 말소리 지각의 문제가 난독증을 일으킨다는 점에 착안하여 특정한 소리를 들려주면 청지각이 개선된다고 유혹한다. 모국어의 말소리 지각이 안 되는 문제를 프랑스제 기계, 그것도 말소리도 아닌 소리를 들려줌으로써 치료할 수 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 말소리는 우리나라 말소리로만 치료할 수 있다. 또 집중력 부족이나 운동신경 부족이 동반된 경우가 많으니 집중력이나 운동신경을 치료하면 난독증도 같이 치료될 거라면서 뉴로피드백이나 IM 같은 치료로 유혹하는데, 팔과 다리가 같이 다쳤을 때 다리 치료한다고 팔이 같이 치료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네이처, 사이언스와 함께 세계적인 학술지로 불리는 <란셋>은 2012년 난독증 치료에 관해 아래와 같은 기사를 실었다.

“음운인식능력을 중심으로 한 읽기 장애 치료의 효과와 조기개입의 이득에 관한 객관적 증거는 많이 축적되었다, 그러므로 청지각, 시지각(안구운동, 얼렌 등), 감각통합, 운동치료 등 근거가 빈약한 치료가 난독증 아동에게 권하여져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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