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정재석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미국 대통령의 연설문이라 하면 1863년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이라 불리는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정부”라는 민주주의에 관한 연설을 우선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이후로 많은 명연설이 있었으나 2004년 민주당 전당대회 기조연설로 행해진 17분짜리 연설은 무명의 정치가 오바마를 전국적 스타로 만들어 결국 대통령이 되게 해준 전환점이 된 명연설이다. 이 연설의 후반부가 무엇보다 압권이다.

“우리 중 몇 명만이 잘 사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것을 압니다. 훌륭한 개인주의와 함께, 우리를 하나로 연결해주는 지혜와 믿음이라는 미국 고유의 또 다른 요소가 존재합니다. 만약 시카고 남쪽 지역에 글을 읽지 못하는 한 아이가 있으면, 내 자식이 아니어도, 그것은 저에게 중요한 문제입니다. 만약 약 값을 못 내고 약과 집세 중 어느 하나를 골라야 하는 고령자가 계신다면 비록 제 할머니가 아니더라도 저의 삶은 불행해집니다. 변호사의 도움도 못 받고 정당한 법 절차에 따르지 않은 채 경찰에 끌려가는 아랍계 미국민 가족이 있다면, 제 인권도 위협받는 것입니다. 내 형제자매를 돌보는 사람이 바로 ‘나’라는 이 근본적인 믿음이 미국을 지탱하는 힘입니다.”

연설 영상 링크 : https://youtu.be/66NwSKiNV6o

 

 

 

위 도표는 2000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제임스 헤크먼(James Heckman)이 만든 도표이다. 그가 주로 연구하는 것은 계량경제학인데 인간의 모든 경제행위가 비용투자 대비 나중에 얼마나 이익이 되는지 계산하는 일을 한다. 그는 어린아이일수록 능력이 낮은 그룹의 교육에 투자하고 성인이라면 오히려 능력이 높은 그룹의 교육에 투자하는 게 더 이익이라고 주장한다.

뇌의 발달은 어렸을 때 급속하게 이루어지므로 되도록 어린아이의 지능 발달을 돕기 위해 투자한다면, 1달러 투자 당 나중에 7달러 이상의 이익을 얻을 수 있으며 이는 가장 수익률이 높은 투자라고 하였다. 낮은 능력의 아이를 그냥 내버려둘 경우 범죄자가 될 확률이 높아 더 많은 경찰을 뽑고 교도소를 더 만들어야 하는데, 일찍부터 투자할 경우 이 사회에서 중요한 노동을 담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 우리나라는 헤크먼의 계산과 반대로 하고 있지 않나 걱정이 된다. 영재아동에 대한 투자가 부진학생에 대한 투자보다 훨씬 많으며, 취업에 실패한 사람의 재취업을 위한 교육에 대한 투자가 많다. 부진학생에 대한 투자보다 영재에 대한 투자가 많은 이유는 천재 한 명이 십만 명을 먹여 살릴 거라는 기대 때문인데 학자들은 잘못된 생각이라 말한다.

우리나라에서 부진학생에 대한 투자가 적은 이유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앞서 오바마처럼 만약 경기도 남쪽 지역에 글을 읽지 못하는 한 아이가 있으면 내 자식만 아니라면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공부 머리가 아닌 모양이니 공부 말고 좋아하는 걸 찾아서 하게 해 주고 공부로 스트레스 주지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아마 더 많을 것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난독증 학생을 일찍 찾아내서 조기에 치료하면 아이의 인생이 달라질 정도의 진단, 치료방법이 나와 있는데 그걸 모르고 미리 찾아내 봤자 학생에게 창피만 주는 셈이 되고 미리 공부시켜봤자 별 효과 없이 스트레스만 줄 걸로 예상하기 때문이다. 치료약이 시장에 나왔는데 약이 있는지 모른 채 체념하고 죽어가는 환자의 상황과 유사하다.

 

사진_EBS

 

2001년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의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성인 중 문해력이 최저 수준 (예: 의약품 설명서를 봐도 정확한 투약량을 알지 못하는 정도)인 사람의 비율이 38%로 나타났다. 다른 회원국은 평균 22%를 훌쩍 뛰어넘었기 때문에 우리나라는 20개국 중 19위로 하위권을 차지했다. 한국 교육개발원이 발표한 ‘2004년 한국 교육인적자원지표’에서도 같은 결과가 나왔는데 반상회 공고문을 보고 반상회가 누구 집에서 열리는지를 파악 못하는 사람이 100명 중 38명에 달했다. 2008년 국립국어원이 국민 기초 문해력을 조사한 결과, 전체 성인의 5.3%가 은행, 관공서의 서식 작성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1.7%는 글을 읽지 못하는 완전 비문해자로 드러났다.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나절이 되기 전에 이를 이해하고,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 만에 배울 수 있다는 한글을 전체 성인의 7-38%가 제대로 읽지 못한다는 사실이 믿기 힘들 것이다.

 

글을 읽을 줄 안다는 말을 2가지로 구분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최저 문해와 기능적 문해. 최저 문해는 그저 읽고 쓰는 능력을 말하지만 기능적 문해는 구청·은행 등을 방문할 때 스스로 자유롭게 용무를 볼 수 있으며, 정치집회나 강연회 등에 참석하는 데 필요한 지식과 의사소통 기능을 갖고, 간단한 회계업무도 볼 수 있는 수준을 말한다.

최저 문해가 되어야 지식 사회에서 간단한 아르바이트라도 할 수 있다. 과거 초등학교 6학년 수준의 국어실력만 되면 단순한 일은 할 수 있다고 보았으나 최근은 중학교 3학년 수준 이상이어야 일을 할 정도가 된다. 그래서 아르바이트를 뽑을 때에도 현역에 근무할 병사를 뽑을 때에도 고졸 이상을 뽑는 경향이 많아졌다.

그래서, 아이를 적게 낳아 노동력이 귀한 선진국들은 국가가 나서서 단 한 명의 국민도 놓치지 않고 국민들의 기능적 문해 수준을 끌어올리려 하고 있는데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우리는 국가가 나서서 한글 선행학습을 막아내는 데만 엉뚱한 신경을 쓴 나머지 받아쓰기도 하지 말고 알림장도 쓰지 말라고 한다. 이제 한글 선행학습을 막는 데만 치중하기보다는 기능적 문해가 어려운 성인을 줄이기 위한 긴 안목의 정책이 요구된다.

 

 

정재석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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