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정정엽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안녕하세요. 저는 30대 중반 여성입니다. 요즘 점점 사람들과 연락하는 것이꺼려지고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는 것 같아 고민입니다. 원래 제 성격은 쾌활하고 농담도 잘하며 사람도 좋아하는 편입니다. 카톡이나 전화 연락이 오면 답장도 바로 하고 SNS로 메시지도 자주 주고받곤 했습니다. 리더십도 있는 편이어서 모임의 장이나 주최자 역할도 많이 했고, 직장에서 관리자로서도 일했습니다.

그런데 2~3년 전부터 우울증을 겪으면서 집 밖에 나가는 것도 꺼려지고, 사람들과의 만남도 피하고 있습니다. 회사와 속한 모임에서 사람들에게 배신당하는 경험을 몇 번 하고 나니 사람을 믿기도 어렵고, 어차피 오래 남을 관계도 아닌데 사람들에게 맞춰주면서 에너지를 쓰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우울감이 심해졌던 것 같습니다. 마침 코로나가 터지면서 자연스럽게 사람들과 만나지 않는 날들이 더 많아진 영향도 있었습니다.

코로나 기간 동안 고립된 외톨이 생활을 계속하다 보니 점점 가라앉는 것 같아서 조금씩 생활 패턴을 바꿔 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지금은 한창 우울감이 심했던 때보다는 좀 나아진 상태로 하루하루 큰 감정 기복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가족들을 제외한 사람들과는 연락을 주고받는 것이 어렵습니다. 막상 만났을 때는 반갑기도 하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 주기도 하지만 집에 돌아가는 길에는 너무 지칩니다. 집에 와서는 핸드폰의 알람을 모두 꺼 놓고 오는 연락에 답을 하지 않습니다. 짧게는 며칠부터 길게는 한두 달, 석 달 이상까지 연락이 밀려 있습니다. 지인들이 싫거나 미운 것은 아닌데, 맞장구 쳐 주고 저와 생각이 다르거나 부딪칠 때도 맞춰 줘야 하는 것 때문에 그런 것인가 싶기도 합니다.

인간관계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들 때도 많습니다. 밥 먹고 차 마시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고, 어차피 언젠가 멀어질 사이일 텐데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들을 전혀 안 보고 살 수도 없고 혼자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기에 사람들과 연락하고 모임에도 나가고 해야 한다는 것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연락하는 것 자체가 심적으로 너무 소진되는 느낌이고, 혼자 지내는 생활에 익숙해진 감도 있습니다.

연락하지 않는 제 모습에 사람들이 서운해하거나 실망하지 않을까, 관계가 단절되지 않을까 걱정도 되지만 쉽게 고쳐지지 않습니다. 누구나 겪는 일인데 제가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누구에게 이야기하기도 어렵고 고민이 되어 사연 남깁니다.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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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안녕하세요. 올려주신 사연 글 잘 읽어 보았습니다. 사람들과 연락하며 함께 지내야 하는 것을 알지만 마음처럼 쉽지 않아 고민이 많으실 것 같습니다. 혼자 지내는 생활에 익숙해지셨다는 것이 안타깝고 안쓰럽기도 합니다. 연락하는 것이 힘들고 에너지가 많이 든다고 하셨지만, 그 이면에는 여전히 사람들과 연결되고 친밀한 관계로 마음을 나누고 싶은 소망을 갖고 계신 것은 아닐까 생각도 해 봅니다.

우울증과 코로나 기간 동안 혼자 지냈던 생활 패턴으로 인해 현재 대인관계에서 어려움을 경험하고 계시지만 원래 밝은 성격에 모임의 장도 하고, 직장에서도 리더 역할을 잘하셨다는 말씀을 통해 사연자님이 갖고 계신 내면의 힘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우울증을 겪기 전 사연자님 모습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사연자님이실 텐데, 예전과 달라진 듯한 모습으로 인해 혹시 더 힘드시지는 않을까 하는 짐작도 듭니다.

우울증이 찾아오면 다양한 증상을 경험하게 되며, 그중 하나가 대인관계와 사회적 장면에서 위축되는 것입니다. 사연에 남겨 주셨듯이 주변 사람들이 싫은 것도 아니고 갈등이 있었던 것이 아니더라도 그럴 수 있습니다. 내 몸과 마음에 힘이 많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서는 다른 누군가에게 에너지를 쏟을 여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들을 피하게 되는 것이지요. 꼭 대면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도 연락을 주고받는 것 자체가 많은 부담이 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더해 과거에 회사와 속한 모임에서 사람들에게 배신당했던 경험이 사연자님이 타인을 신뢰하고 깊이 있는 관계를 맺는 데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연을 통해서 정확하게 어떤 일이 있었고 사연자님께서 얼마만큼의 상처를 받으셨는지 다 알기는 어렵지만,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연자님의 마음에 여전히 크게 자리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과거의 일들이 우리 내면에서 잘 해결되지 못한 채 남아있을 때, 그것은 우리의 현재, 나아가서는 미래에까지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심리학 용어로는 이런 사건을 ‘미해결 과제’라고도 부릅니다.

그러나 과거에 좋지 않은 일이 있었다고 해서 우리가 언제까지나 그 일에 매여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연자님께서 과거에 사람들을 통해 상처받으셨더라도 신뢰할 수 있는 관계를 통해 누군가에게 받아들여지고 믿음을 회복하는 경험을 갖는다면 관계가 주는 행복을 느끼실 수 있습니다.

때로 우리는 살면서 원하는 경험만 할 수 있다면, 혹은 예전에 우리에게 일어났던 안 좋은 일들에 대한 기억을 지울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상상을 하곤 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뢰할 수 있는 관계를 통해 과거의 일을 흘려보내고, 새로운 색으로 칠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한편 사연자님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의미와 즐거움을 찾지 못하는 데는 과거의 배신 경험과 함께 우울증의 또 다른 증상인 무쾌감증(anhedonia)의 영향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우울한 상태에서는 기쁨이나 즐거움을 느끼기 어렵고, 어떤 일에서도 의미나 의욕을 찾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사람들과 밥 먹고 차 마시는 일상적인 일들이 의미 없게 느껴지고, 큰 기쁨을 찾기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사연자님이 겪는 어려움을 많은 사람은 아닐지라도 주변의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나누고, 그분들과 신뢰를 주고받는 경험을 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누군가 나를 믿어 주고 온전히 받아들여 주는 것을 경험하면서 잃어버렸던 관계에서의 신뢰를 회복하고, 내가 소중하고 가치 있는 존재라는 믿음을 가지실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연락이 없어서 서운할지 모를 지인들에게는 사연자님의 상황을 모두 다 이야기하지는 않더라도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서 자주 연락하지 못한다.’, ‘자주 연락하지 못해서 미안하다.’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솔직하게 양해를 구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우울감으로부터 어느 정도 회복되고 몸과 마음에 힘이 생긴 후에는 지금보다 더 편안한 마음으로 주변 분들과 연락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말씀 드린 것처럼 소수라도 믿을 수 있는 분들과 신뢰 관계를 맺는 연습을 해 보시고, 우울증 완화를 위해 건강한 생활 습관을 가지실 것을 권유합니다. 사연자님이 관계가 주는 삶의 풍성함을 누리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광화문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정정엽 원장

정정엽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광화문숲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 의과대학 학사석사, 서울고등검찰청 정신건강 자문위원
보건복지부 생명존중정책 민관협의회 위원
한국산림치유포럼 이사, 숲 치유 프로그램 연구위원
저서 <내 마음은 내가 결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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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생님의 글이 얼마나 큰 위로인지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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