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정정엽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안녕하세요. 저는 타인에게 참 잘하는 사람입니다. 의견 충돌이 생길 만한 이야기는 하지 않고, 제가 원하는 것보다는 타인이 원하는 것에 맞춰 주려고 노력해요. 칭찬과 같은 긍정적인 표현은 잘하지만, 화가 나거나 섭섭할 때 부정적인 표현은 잘 못해서 되려 제 자신에게 섭섭하고 화가 날 때도 많습니다. 

그런데 가까운 사람에게는 너무 쉽게 짜증과 화를 내고 통제하려고 해요.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한마디도 못하고 듣고만 있으면서 부모님 앞에서는 어떻게 그리 당당하고 아는 체하는지 제가 다 부끄러울 정도입니다. 다른 사람에겐 짜증 섞엔 말투가 될까 봐 매번 조심하면서 부모님께는 너무 쉽게 짜증 내고 속상하실 말도 서슴없이 합니다. 오죽하면 부모님께서 제 눈치를 보실 정도세요. 더 잘해 드려야지 마음먹고도 왜 그렇게 부모님께는 쉽게 화가 나는지, 그래 놓고 후회하고 하루 종일 혼자 속상해서 눈물이 날 정도예요. 이 세상에 부모님처럼 제 짜증을 다 받아주는 사람이 없으니까요.

반대로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가까운 사람에게는 겸손히 듣고 맞장구 쳐 가며 잘 들어주고, 말 한마디도 조심하고 화 한 번 내지 않고, 짜증은 더더욱 부리지 않고, 분위기를 띄우는 분위기 메이커가 되어 드리고, 제가 받는 사람이기보다 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리고 낯선 사람들, 타인의 감정은 신경 쓰지 않고 조심하지 않고 살고 싶어요. 부모님께는 제 잘못인데도 너무 쉽게 부모님 탓을 하며 비난하는데 타인에게는 부당한 화를 묵묵히 들으며 오히려 그 사람 감정을 돌보는 제가 머저리 같아요. 

타인과의 관계에서 생긴 화나 불편한 감정은 유발자에게 풀고 집에 돌아와 내 사람에게는 편안한 감정만 주고 싶은데, 나아가 부모님이 속상하실 때 부모님이 제게 그러셨듯 잘 맞춰주고 달래주고 들어드리고 싶은데 중년의 나이에도 여전히 애 같고 못된 저 자신이 너무 미워서 글씁니다. 

화를 포함한 부정적인 감정을 잘 다루는 법을 알고 싶어요. 그래서 타인에게 시의적절하게 화도 내고 짜증도 부리고, 부당한 요구를 하면 맞서 죄책감 없이 싸우기도 하면 좋겠어요. 화를 내는 게 나쁜 게 아니잖아요, 그렇죠? 더 이상 엉뚱한 사람에게 성내서 제 소중한 사람이 제 앞에서 작아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요. 더불어 연로하신 부모님이 제게 짜증 부리시고 화를 내실 때 그 감정을 잘 달래드리는 법도 알았으면 좋겠어요.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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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안녕하세요. 사연을 읽으며 연로하신 부모님을 더 잘 돌봐드리고 싶은 사연자님의 마음과, 부정적 감정을 적절하게 인식하고 표현하는 방법을 배우고 싶으신 간절함이 잘 느껴졌습니다. 아울러 가까운 주변 분들과의 관계를 건강하게 만들고 싶으신 사연자님의 의지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사연자님께 말씀하신 것처럼 살다 보면 다른 사람들에게는 싫은 소리를 하거나 부정적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면서도 정작 가까운 사람에게는 소홀하거나 함부로 대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할 때가 많습니다. 특히 부모님께는 더욱 그렇습니다. 아마 우리를 낳아주시고, 사랑과 정성으로 키워주신 분들이기에 그만큼 내가 어떤 모습이어도 나를 받아주고 사랑해주시리라는 절대적인 믿음이 있기 때문이겠죠. 살면서 만나는 많은 사람은 내 사소한 행동도 평가하고 실망하거나 거절할 수 있지만, 부모님은 그렇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사연자님의 부모님께서는 많은 사랑과 지지를 보내주셨고, 사연자님도 부모님에 대한 유대감이나 신뢰감이 매우 깊으신 것 같습니다. 

부모님과 타인에게 대하는 태도가 매우 다른 점에 관해서는 ‘에너지의 크기’라는 측면에서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모두 한정된 에너지를 갖고 살아갑니다. 몸과 마음의 에너지에는 모두 정해진 양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에너지를 특정 대상에게 많이 쏟다 보면 상대적으로 다른 대상에게는 적은 양을 쏟을 수밖에 없겠지요. 다른 사람의 기분을 살피고 맞춰 주면서 사연자님의 욕구나 원하는 것을 억누르는 과정에서 많은 신체적, 심리적 에너지를 소진하게 됩니다. 

사연자님이 가진 에너지 총량이 물 한 컵이라고 가정해 보면, 4/5 정도를 타인에게 다 쏟는 것이지요. 그리고 집에 돌아오면 1/5만큼 남은 에너지를 갖고 부모님을 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부모님께 그 이상을 써야 하면 물잔에는 물이 하나도 없고 완전히 소진된 상태가 됩니다. 그러다 보니 그렇게까지 반응할 일이 아닌데 ‘내가 왜 이러지?’하면서도 쉽게 짜증이나 화가 나는 것이죠. 

 

또, 타인에게 잘한다고 하셨는데 상대방에게 무조건 맞춰 주거나 사연자님의 욕구를 말하지 않는 것이 꼭 타인에게 잘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관계에서 긍정적인 표현을 잘하고 배려하는 것만큼이나 내가 느낀 부정적 감정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잘 표현하며 갈등을 잘 풀어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각자 다른 생각과 감정을 가진 존재이기에 어떤 사람과도 완벽하게 잘 맞기만 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가까운 관계가 될수록 갈등도 겪고, 싸우고 풀기도 하면서 관계가 깊어지죠. 

말씀하신 것처럼 부정적 감정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기쁨, 즐거움, 행복 같은 감정은 긍정적 감정, 분노, 불안, 좌절, 실망 같은 감정은 부정적 감정이라고 부릅니다. 각각의 감정은 살아 있는 인간으로서 우리가 자연스럽게 느끼는 것들이며, 좋고 나쁨이 없습니다. 감정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다루며 표현함으로써 우리는 자신과 타인에게 더 솔직하며 나답게 살아가면서도 타인과 조화를 이루는 방법을 익힙니다. 

부정적 감정을 타인에게 효과적으로 표현하기에 앞서 타인과의 관계에서 느끼시는 감정들을 그때그때 인식하는 것부터 시작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감정 일기를 쓰면서 어떤 상황에서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기록하고,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상황에서 그런 감정을 느낀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반응임을 기억하고 감정을 그 자체로 수용해 주는 연습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나의 반응은 무엇이었는지 살펴보고 만약 그 상황으로 다시 돌아간다면 또는 앞으로 비슷한 감정을 느낄 때 어떻게 반응할지를 탐색해 볼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화라는 감정을 느꼈을 때 그 원인을 탐색하고 상대방에게 말로 직접 표현할 수도 있고, 그것이 어렵다면 편지를 써서 마음을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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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은 화가 났을 때 폭언이나 폭행 같은 충동적이고 즉각적, 일차원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를 건강한 감정 해소법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물론 화라는 감정 자체에는 옳고 그름이 없습니다. 그저 자연스러운 감정이니까요. 하지만 어떻게 표현하는가 하는 것은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이를 위해 내 행동과 감정을 천천히 살펴보면서 어떤 감정을 느꼈고 그 감정을 느낀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부정적 감정을 어떻게 정화하고 표현할지를 탐색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아울러 감정을 표현할 때 특정 대상에게는 부정적 감정만을, 또 다른 대상에게는 긍정적 감정만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현재 타인에게는 긍정적 감정만을, 부모님께는 부정적 감정만을 표현하시는 방식으로 대상에 따라 표현하는 감정이 명확하게 선이 그어진 느낌입니다. 또, 앞으로는 반대로 부모님께는 긍정적 감정만, 타인에게는 부정적 감정만 표현해야 하는 것처럼 이분법적으로 생각하시는 듯한 모습이 엿보입니다. 

그러나 건강한 감정 표현은 대상에 따라 긍정적, 부정적 감정 중 하나만 선택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이 두 가지를 적절하게 잘 섞어서 그때그때 느낀 감정에 충실하면서도 관계에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타인과의 관계, 부모님과의 관계에서 모두 긍정적, 부정적 감정을 잘 표현하게 되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으시는 것이 관계에서의 균형을 유지하고 심리적, 신체적 에너지를 현명하게 맞춰 가는 비결이 될 것입니다. 타인에게 4/5를 쏟았던 것을 부모님께 쏟는 비율을 높이는 것부터 시작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더불어 긍정적 에너지가 파란색, 부정적 에너지가 빨간색이라면 타인에게 쏟는 물은 빨간색, 부모님에게 쏟는 물은 파란색만 붓는 것이 아니라 두 군데 모두 빨강, 파랑을 함께 쏟아서 양쪽 모두 보라색 물이 되도록 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부모님 이외에 다른 사람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표현할 때 혹시 상대방이 내게 실망하거나 관계가 틀어지면 어떻게 하나 싶은 걱정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 건강하고 오래가는 관계는 한쪽이 일방적으로 맞춰 주는 것이 아니라 서로 맞춰 가며 배려하는 관계일 때 가능합니다. 부정적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연습하는 과정에서 시행착오가 있을 수도 있지만, 꾸준히 연습하며 조금씩 성장하는 자신을 칭찬해주시면서 부모님, 타인과 더욱 건강하고 오래가는 관계를 맺는 사연자님이 되실 수 있기를 응원합니다.

 

광화문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정정엽 원장

정정엽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광화문숲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 의과대학 학사석사, 서울고등검찰청 정신건강 자문위원
보건복지부 생명존중정책 민관협의회 위원
한국산림치유포럼 이사, 숲 치유 프로그램 연구위원
저서 <내 마음은 내가 결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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