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선의 [부모의 심리학] (13)

[정신의학신문 : 서대문 봄 정신과, 이호선 전문의]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

기원전 5세기경에 활동한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프로타고라스가 남긴 말이다.

“돈은 만물의 척도다.”

프로타고라스의 말을 현대인들에게 적용하자면 이렇게 바꿔 말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돈은 가치의 기준이 된다. 우리가 사는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어지간한 건 다 돈으로 그 가치를 환산할 수 있다. 가치 있는 건 비싸고 가치 없는 건 싼 게 상식이다.

“돈 가는 데 마음 간다.”

서구 자본주의가 밀려들기 전 우리 조상들은 이런 말을 하며 살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회 시스템이 어떻든 사람 사는 곳이라면 돈의 위세는 늘 대단했다. 돈을 어떻게 벌어서 어떻게 쓰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가치관이나 됨됨이를 파악할 수 있는 척도가 된다.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곳, 어렵사리 번 내 돈을 사용하는 곳, 그곳에 내 마음도 따라간다.

“마음 가는 데 돈 간다.”

이렇게 바꾸어 말해도 그대로 통한다. 현대인들에게 돈과 마음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사진_픽셀
사진_픽셀

 

해가 바뀌면 사람들은 한 해의 계획을 세운다. 그 계획의 상당 부분을 좌지우지하는 것도 역시 돈이다. 올해 수입은 얼마나 될까, 장사가 잘될까 잘 안 될까, 집값이 오를까 내릴까, 월급이 인상될까 깎일까, 등록금과 학비는 어떻게 될까, 저축을 할 수 있을까 아니면 빚을 내야 할까, 이런저런 계획을 세우다 보면 웃음이 나올 때보다는 한숨이 나올 때가 더 많다.

빠듯한 수입으로 가계를 운영하거나 가게를 유지하거나 회사를 경영하려고 하면 가장 시급하고 필수적인 사항부터 지출 계획을 짜게 마련이다. 우선순위에서 밀리면 당분간 지출을 억제하는 게 당연하다. 그 우선순위라는 게 바로 마음이다. 마음이 더 쓰이는 부분, 더 중요하고 더 급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에 돈을 쓰는 것이다. 마음이 덜 쓰이는 부분, 덜 중요하고 덜 급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에는 돈을 쓰기 어렵다. 억제와 절제의 기준이 곧 내 마음이다.

 

‘언젠가 여유가 생기면, 고아원이나 양로원에 기부도 하고 살아야지.’
‘좀 살만해지면 불쌍한 사람, 가난한 사람을 돕는 곳에 돈도 송금하면서 살고 싶어.’

이렇게 말만 하고, 생각만 하고, 실제로 돈은 한 푼도 보낸 적이 없다면 그것은 마음이 없는 것이다. 언젠가 오리라 믿었던 여유와 조만간 누릴 수 있을 것 같았던 살만한 세상은 영영 오지 않을 수도 있고, 설령 왔다 해도 왔다고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마음이 있다면 돈이 가는 게 이치고, 돈이 갔다면 내 마음도 같이 간 것이다. 이것이 현대 사회의 진리다.

 

언젠가 지인이 모친상을 당해 상가에 조문을 간 적이 있었다. 점잖은 분들이라 빈소는 조용한 분위기였다. 조문을 마친 뒤 몇몇 지인과 식사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소란스러웠다.

“아이고, 엄마! 살아생전 효도 한번 제대로 못했는데, 이렇게 가시면 어떻게 해요!”

고인의 딸로 보이는 중년 여인이 영정 앞에 엎드려 대성통곡했다. 조용하던 상가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밥을 삼킬 수가 없었다. 좀 놀랐던 건 중년 여인의 그다음 한마디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매달 용돈이라도 드리는 건데…… 그걸 못 드렸으니…….”

장성한 자식이 연로한 부모님께 미처 생활비나 용돈을 드리지 못하고 있다면, 자식 노릇을 다하지 않는다거나 효도와는 약간 거리가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얼마 되지 않는 돈일망정 매달 정해진 날짜에 부모님께 송금해 드리고 싶은 마음은 자식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저마다 사는 형편이 다르고, 각자 말 못 할 사연 또한 있는 법이다.

“언젠가 여유가 생기면, 좀 살만해지면 그때 생활비나 용돈을 제대로 보내 드릴게요.”

이런 말을 듣는 부모님은 자식에 대한 고마운 마음, 걱정하는 마음이 들기 마련이다. 안타까운 건 부모님은 내가 여유가 생기고 살만해질 때까지 기다려 주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달자 시인은 자신과 엄마 사이에 있었던 돈에 관한 일화를 『엄마와 딸』이라는 수필집에서 이렇게 풀어놓은 적 있다.
 

[우리 엄마는 돈을 좋아했다. 그러나 좋아하는 만큼 가지지 못했다. 그 돈의 만족을 줄 수 없는 아픔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30년이 훨씬 넘어도 아프다.

어느 날 어머니가 집에 오셨다. 내가 서른 중반이었을 것이다. 엄마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은 풍경들이 집에는 가득했다. 엄마는 울먹였고 나는 빨리 가라고 등을 떠밀었다. 나는 대문 앞에서 만 원짜리 한 장을 주머니에 넣어 드렸다.

“엄마, 택시 타고 가.”

엄마는 그 돈을 다시 내 주머니에 넣어 주었다.

“혼자 빨리 저 시장에 가서 짬뽕이라도 한 그릇 사 먹어라.”

엄마는 완강하게 날 밀었다. 그렇게 만 원짜리 한 장을 가지고 몇 차례 옥신각신하다가, 나는 돈을 길에 던져 버리고 대문을 닫아 버렸다. 조금 후 대문을 밀고 나가 보니 길에는 만 원도, 엄마도, 없었다. 나는 그 거리에 주저앉아 울었다. 울고 또 울었다. 그 만 원짜리 한 장을 거리에서 허리를 굽혀 주웠을 엄마를 생각하면 지금도 뼈가 저리다.]
 

책을 쓸 당시 이미 칠순의 나이였음에도 시인은 돈만 보면 어머니 생각이 나고, 그 돈을 어머니께 드리고 싶어 안달이 난다고 했다. 돈과 마음은 이렇듯 항상 어긋나게 마련이다.

 

그런가 하면 코미디언으로 유명한 이홍렬 씨는 예전에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았던 잡지 『샘이 깊은 물』에 이런 글을 썼다. 
 

[얼마 전에는 어머니가 내 꿈속에도 찾아오셨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그때 난 용돈 이십만 원을 드렸다. 깨고 나서 얼마나 후회하고 가슴이 아팠는지……. 왜 하필이면 이십만 원을 드렸을까. 더 드릴 수 있었는데. 이백, 이천만 원 아니 내가 가진 모든 것이라도 드리고 싶은데. 늘 받기만 하다 모처럼 드린 용돈이었는데, 고작 이십만 원이었다니 며칠 동안 우울하고 안타까웠다.]


그 역시 자신이 성공하기 전, 아니 결혼하기도 전에 돌아가신 가난했던 어머니를 생각하면 용돈 한번 변변히 드리지 못했던 일이 한처럼 남아 있는 것이다. 꿈속에서 만난 어머니가 너무 반가워 용돈을 드렸는데, 하필 이십만 원이라니. 그 꿈 때문에 며칠 동안 우울하고 안타까웠을 그의 마음이 안쓰럽다. 하지만 어쩌랴. 이제는 결코 되돌릴 수 없는 일인 것을.

 

나이가 들어 노년이 될수록 정서적으로 자식들에게 많이 의존하게 된다. 아직도 일을 하고 사회활동이나 봉사활동을 열심히 하는 노인이라 할지라도 시간만 나면 추억에 젖고 자식들 얼굴이 보고 싶어 지는 게 인지상정이다. 여건상 자주 볼 수 없다 하더라도 정기적으로 생활비와 용돈을 드리면 이를 통해 자식들의 사랑과 부모를 생각하는 따뜻한 마음을 전달받을 수 있다. 오랜 인생 경험으로 돈 가는 데 마음 간다는 이치를 알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여력이 없는 부모님이라면 더욱 그렇다. 액수가 문제가 아니다. 부모를 챙겨주는 자식들의 마음을 전달받음으로써 노인들은 힘이 나고 삶의 에너지가 솟는다. 정기적으로 생활비와 용돈을 보내드리는 것은 부모님의 노년 건강, 특히 정신건강을 돌봐드리는 일이기도 하다.

 

새해 역시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경제적으로 많은 어려움이 예상된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마음만은 좀 더 넉넉해졌으면 좋겠다. 장성한 자식이라면 연로한 부모님께 전화 한 번이라도 더 드리고, 찾아뵐 수 있다면 한 번이라도 더 찾아뵈면 좋을 것이다.

“아버지 어머니, 보고 싶어요. 사랑합니다.”

이런 전화 한 통이면 부모님들은 그 어떤 괴로움도 시름도 다 잊어버린다.

매달 정기적으로 생활비와 용돈을 보내 드리는 것도 좋은 일이다. 사정이 넉넉하지 않아도, 벌이가 신통치 않아도, 다른 데 쓸 데가 많아도, 작은 돈이나마 보내 드리는 습관을 들여 보면 어떨까? 있어도 드릴 수 없는 때가 오기 전에. 사랑한다는 말을 얼마나 자주 했느냐 보다 부모님에게 얼마나 지갑을 자주 열었느냐가 자식의 마음을 더 잘 보여 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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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서대문봄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학사, 석사
한양대병원 외래교수, 한양대구리병원 임상강사
(전)성안드레아병원 진료과장, 구리시 치매안심센터 자문의, 저서 <가족의 심리학>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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