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선의 [부모의 심리학] (12)

[정신의학신문 : 서대문 봄 정신과, 이호선 전문의] 

 

…… 어머니의 주의력은 내 가녀린 기척도 곧장 알아챌 만큼 언제나 예민했다. 선하품을 거푸 하며 바느질로 밤을 지새우는 때가 아니라 할지라도, 어머니의 귀는 언제나 문밖 어딘가를 맴돌고 있는 것 같았다. 원하건대, 제 발로 돌아와 어머니의 자존심에 더 이상의 상처는 주지 않을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내 미세한 기척도 눈치챌 수 있었을 것이었다.

어머니는 떠나 가버린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고, 나는 보이지 않는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당신만 간직하기 위해 아버지의 추억을 내게 말하지 않았고, 나는 그런 어머니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나 혼자만의 아버지를 추억하려 애썼다. ……

 

김주영 소설 『홍어』의 한 장면이다. 외진 산골 마을에서 삯바느질로 연명하는 젊은 어머니와 어린 아들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화자인 세영이 열 살 되던 해에 집을 떠난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는다. 부엌 문설주에는 너부죽하게 꿰어 연기와 그을음을 뒤집어쓴 홍어포 한 마리가 매달려 있다. 한량으로 빈둥거리다가 유부녀와 바람을 피운 뒤 처자식을 버리고 집을 나간 아버지를 상징하는 물건이다. 서정적인 묘사가 한 폭의 수묵화처럼 아름다운 소설이지만, 해체된 가족 구성원들이 느끼는 깊은 상처와 상실감은 한없이 무겁기만 하다.

이 작품뿐 아니라 한국 문학을 대표하는 많은 소설을 관통하는 하나의 큰 줄기는 ‘아버지의 부재’다. 소설은 인간의 삶을 다루기에 주인공과 여러 인물들이 가정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사건을 만들고 갈등을 겪는다. 당연히 다채로운 인간 군상과 다양한 가족이 등장한다.

그런데 이상하리만치 가정 안에 아버지가 없거나 있더라도 역할이 미미하든가 주변을 맴도는 대상으로 존재한다. 왜 ‘아버지의 부재’가 한국 문학을 특징짓는 모티브가 되었을까?

 

아버지가 없는 소설을 주로 써 온 작가 김주영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 적 있다.

“제가 소설을 쓰면서 늘 아쉬웠던 것은 내가 왜 이렇게 아버지 이야기를 기피하는 작가가 되었을까 하는 거였어요. 사람들은 왜 당신 소설에는 아버지 이야기가 없냐고 늘 묻곤 했죠. 그래 가만 생각해보니까 자신이 없었던 거예요. 

문학하는 사람들 작품 중에 괜찮은 작품들을 보면 그 사람들이 어릴 때 경험했던 이야기와 고향 이야기들이 많이 나와요. 독자들이 그런 작품을 좋아하는 건 자신의 체험과 가장 익숙하기 때문이죠. 익숙하다는 거 이게 꽤 괜찮은 거예요. 일단 자신이 있으니까요.

그런데 제가 작품 속에서 아버지 이야기를 자주 못했던 것은 어릴 때 아버지랑 너무 오래 떨어져 있어서 아버지에 대한 지식도 없었고, 아버지에 대해서 쓰기가 두렵고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한국 문학에 나타난 아버지 부재 현상은 작가들의 실제 경험이 그대로 투영됐기 때문이다. 작가들이 겪었던 유년의 삶 속에서 아버지는 아예 없거나 집을 나갔거나 가족에 대한 책무를 방기하거나 투전판을 전전하면서 폭언과 폭력을 일삼는 무도한 존재였을 뿐이다.

아버지 부재 현상은 가정 안에서 아버지가 사라져 버린 현실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아버지로 상징되는 가부장적 질서, 준거 가치 체계, 전통이나 권위 등의 상실을 의미하기도 한다.

아버지 없는 가정을 지키는 건 언제나 어머니다. 어머니는 홀로 모진 고난을 헤쳐 나가며 묵묵히 생계를 책임지고 자식들을 건사한다. 이 또한 문학에 그대로 반영된다. 아버지의 부재가 한국 문학의 한 축이라면 다른 한 축은 어머니의 희생이다. 어머니는 열혈전사다. 어머니의 삶은 늘 눈물겹다. 어머니의 위대한 모성애는 한국 문학을 가로지르는 도도한 강줄기와 같다. 좋은 싫든 부성애와 모성애의 판이한 양면성이 한국 문학의 자양분이 되었다.

 

문학은 현실의 삶을 반영한다. 우리의 삶도, 우리네 가정의 모습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아버지의 부재는 오늘날 대한민국 가정과 사회의 현주소를 여실히 드러내는 모티브다.

늘어나는 이혼율, 감소하는 혼인율과 출산율, 심각해지는 청소년 문제, 역기능적인 가정의 폐해 등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으나 가정의 중심인 부모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한 때문이 크고, 그중에서도 특히 아버지가 아버지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못한 이유가 가장 크다. 가정의 위기는 곧 아버지의 위기로부터 비롯된 셈이다.

 

사진_픽사베이
사진_픽사베이

 

오스트리아의 정신분석학자인 프로이트는 인간의 성격 발달을 다섯 단계로 나누어 설명했는데, 이 중 항문기와 남근기에 해당하는 2세~6세 사이에 아버지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아이가 아버지를 자신을 제약하는 존재, 모성을 훔쳐가는 존재, 자신을 위협하는 존재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이 시기에 아버지가 건강한 부성을 보여주지 못하면 아이가 강박적인 항문기에 고착되거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해결하지 못한다고 했다.

어렸을 때 아버지로부터 충분히 사랑받고 존중받지 못한 채 자란 자녀들, 즉 제대로 된 부성애를 체험하지 못한 아이들은 보이지 않는 상처와 상실감을 안고 살아가게 되고, 그들이 어른이 되어 가정을 이루었을 때 자신 또한 어린 시절과 같은 역기능적 가정을 만들게 될 확률이 높다. 잘못된 가정의 모습이 구조적으로 세습되고, 재생산될 수 있는 것이다.

 

예전의 아버지들은 바깥일로 바빴다. 집안일은 항상 어머니 몫이었다. 그래서 남편을 바깥양반, 아내를 안사람이라고 불렀다. 1960~1970년대 아버지들은 돈을 벌기 위해 중동으로 미국으로 일본으로 떠돌았다. 1980~1990년대 아버지들도 직장에 청춘을 바치며 야근과 특근을 마다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밖에 나가 돈 벌어다 주는 사람이었다. 해가 뜨면 집을 나갔고, 해가 지면 집으로 들어왔다. 아이들 곁은 늘 어머니가 지켰다.

요즘은 세상이 달라져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활발하고, 맞벌이가 대세로 자리 잡았으며, 가사나 육아를 부부가 공동으로 분담하는 시대가 되었으나, 아직도 기본적 전통과 질서는 완전히 바뀌지 않았다.

 

젊었을 때 일터에 뼈를 묻을 각오로 새벽부터 밤중까지 일만 하던 아버지들이 은퇴하고 나이 들어 노인이 되었을 때 자녀들에게 괄시를 받거나 장성한 자녀들과의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 자녀들은 어릴 때부터 어머니하고만 소통했고, 육아와 교육에 관한 모든 걸 어머니가 맡아왔기 때문이다.

자녀들이 어머니와 함께 있을 때는 편안하게 온갖 이야기를 주고받다가도 아버지가 등장하면 대화가 중단된 채 침묵이 흐른다. 자녀들이 아버지하고만 있게 되면 대화가 거의 없다. 아주 어색하고 거북살스러운 정적만이 주위를 감쌀 뿐이다. 젊었을 때는 몸이 집에 없어서 아버지의 부재였지만, 나이 들어 노인이 되었을 때는 몸이 집에 버젓이 있어도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해 아버지의 부재가 이어진다. 현실이 이렇다.

 

아버지들은 억울할 것이다. 자식들을 위해, 가정을 위해 청춘을 바쳐 헌신적으로 일했는데, 늙고 보니 다들 나를 피하거나 홀대하고 아버지 대접을 해주지 않으니 그럴 법도 하다.

하지만 부모와 자식 사이의 친밀감은 하루아침에 형성되지 않는다. 아버지를 가장 필요로 하는 어렸을 때 자녀들과 함께하지 못한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 자식들은 이렇게 묻는다.

“아버지는 그때 어디 계셨어요?”

 

아이들은 부모의 사랑과 관심을 먹으면서 자란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역할이 각각 따로 있다. 어머니가 아무리 잘해도 아버지의 부재는 아이들에게 결핍으로 남는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서 따뜻한 사랑과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는 어른이 되어서도 자신을 향한 다른 사람의 관심이나 사랑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거나 무관심할 수 있다. 예기치 못한 관심이나 사랑을 접하게 되었을 때 어색함을 느끼고 심지어는 두려워하거나 거부하는 일까지 벌어지기도 한다. 일상생활에 지장이 있는 성격장애나 다른 질병으로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가정의 의미가 많이 변했다 하더라도 아직까지 가정은 사회의 최소 단위이며 개인이 삶을 영위하고 유지하는 기초 공간이다. 가정에서 일어나는 여러 병리 현상에 아버지의 책임이 크다. 아버지의 역할이 중요하다. 아버지의 자리가 회복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버지가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한다.

아버지는 돈만 벌어다 주는 존재가 아니다. 자녀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대화하며 눈높이를 맞추고 추억을 공유해야 한다. 그래야 가정이 건강해지고, 부부관계도 회복되며, 아버지와 자녀들 간에 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다.

 

이미 나이 들어 그럴 수가 없다면, 자녀들이 다 장성해 부모 품을 떠났고 자신은 노인이 되어 젊은 시절로 돌아갈 수가 없다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그렇더라도 방법은 있다.

먼저 다가가는 것이다. 장성한 자녀, 결혼해서 따로 살고 있는 자녀라 하더라도 전화나 문자로 아버지의 속내를 내비치는 것이다. 쑥스러울 것 없다. 남이 아니고 내 자식들이다.

“〇〇야, 너 초등학교 다닐 때 달리기 참 잘했는데. 다음에 우리 건강을 위해 공원에 달리기 하러 같이 나가 볼까? 내가 직장에 매여 어렸을 때 너하고 많이 못 놀아주고, 시간을 같이 하지 못해 참 미안하고 아쉽다. 내 속마음은 그렇지 않았어. 아버지가 많이 사랑한다.”

“〇〇아, 요즘 많이 바쁘니? 언제 시간 내서 잠깐 들러라. 내가 네 회사 근처로 가도 되고. 둘이서 소주 한 잔 하자. 무슨 일 있냐고? 아무 일도 없다. 그냥 너 어렸을 때 있었던 일 이야기 좀 하자는 거야. 그때가 그립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내가 너 많이 사랑해.”

젊었을 때나 늙었을 때나 사랑은 언제나 내리사랑이다. 이런 전화나 문자를 받고 외면할 자식은 없다. 젊었을 때 바빠서, 밖으로 도느라 아이들에게 못다 한 사랑과 관심, 늦었지만 늙어서라도 하면 된다. 다소 느리더라도 소통이 회복되고, 아버지의 자리가 또렷한 모습으로 자리하게 될 것이다. 아버지의 부재를 지우는 길은 아버지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뿐이다.

 

자녀들 역시 아버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게 좋다. 늙은 아버지를 대하는 나의 태도나 언행은 내 자식들에게 그대로 학습된다. 아버지 부재의 대물림을 당대에 끝내려면 내가 애쓰는 수밖에 없다.

아버지가 자신에게 끼친 영향력을 부인하면 안 된다. 아버지를 비난하지도 말아야 한다. 아버지와 다른 좋은 아버지가 되려면 아버지처럼 하면 안 된다. 늙은 아버지를 멀리하고 외면하면 자신 또한 아버지를 그대로 닮아갈 수밖에 없다.

어쩌면 자괴감과 죄책감을 느끼고 있을 아버지를 향해 자식이 먼저 따뜻한 손을 내민다면 아버지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그 손을 맞잡을지도 모른다. 천륜의 회복보다 더 중요한 게 어디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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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서대문봄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학사, 석사
한양대병원 외래교수, 한양대구리병원 임상강사
(전)성안드레아병원 진료과장, 구리시 치매안심센터 자문의, 저서 <가족의 심리학>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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