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폭력과 사회적 참사가 새긴 트라우마의 차근한 회복을 위하여
2025년 11월 서울중앙지법에는 붉은 꽃무늬 스카프를 두른 열세명의 여성이 나란히 모습을 드러냈다. 5·18 성폭력 피해자 자조모임 ‘열매’의 일원인 이들이 ‘계엄군에 의한 성폭력 피해’에 대해 45년만에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관련 기사가 보도되면서 용기있는 행보를 응원하는 목소리가 잇따랐다.
그러나 국가 폭력과 사회적 참사의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낼 때마다 늘상 따라다니는 싸늘한 시선도 여전히 존재했다. ‘진짜인지 어떻게 증명하느냐’ ‘그만 좀 하자, 진절머리 난다’ ‘얼마나 혜택을 받으려고 그러냐’ 등.
이 책은 그 오래된 ‘싸늘한 시선’을 향한 가슴 아픈 반박이자, 도전적인 제언이다. 이 책의 저자이자 ‘열매’의 자문의를 맡고 있는 정찬영은 5․18 민주화운동 피해자 외에도 세월호 참사,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를 비롯한 사회적 트라우마로 고통받는 이들을 오랫동안 치유해 왔다. 그 과정에서 이들의 악몽이 긴 시간 후에도 끝나지 않는 이유와 해결책을 깊이 연구할 수 있었다.
그는 책에서 다양한 트라우마 감정들, 즉 외상적 슬픔, 독성 수치심, 산 자의 죄책감, 도덕적 손상 등이 실제로 어떤 양상으로 발현하며 이를 회복할 방법이 무엇일지, 피해자들의 인터뷰와 함께 구체적 으로 제시한다. 나아가, 이런 사건의 주역이 계속 나타나는 이유를 정신과 의사 특유의 관점으로 짚어 보며, 정치인․종교인 나르시시스트와 그들의 추종자들이 얽히게 되는 메커니즘, 이를 막기 위한 구조적인 해법을 살펴본다.
무엇보다, 두 번 다시 우리 사회에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기 위한 방안에 대해 지금껏 어느 책에서도 들려주지 않았던 종합적인 통찰을 제공한다. 점점 외집단에 대한 혐오가 깊어지 고, 사회적 트라우마의 피해자를 2차 가해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는 지금, 그가 제시하는 ‘탈 극단주의 센터’나 ‘시민 감정 교육’이란 해법은 특히 눈여겨볼 만하다.
출판사 서평
독성 수치심, 외상적 애도, 산 자의 죄책감, 도덕적 손상… 지독한 트라우마 감정은, 결코 사적이지 않다.
“대통령이 느닷없이 TV에 나와 비상 계엄을 선포한다고 떠들잖아요. 날벼락이었어요. 아들의 희생으 로 어떻게 만든 민주주의인데. (…) 5․18이 다시 일어난 것만 같았어요. 계엄이라고 하면 그날(5월 27 일) 아침이 생각나요. 오메! 도청 앞에서 사람 다 죽여 놓고 즈그가 승리했다고 군홧발 쾅쾅 울리면서 군가 부르던 기억이 떠올라요.” “내란을 일으킨 사람을 어째서 석방시킨대요. 그 사람 나온다고 하니 심장마비 올 것 같애요. 내 마음을 어떻게 할 줄 모르겠어요. 이 나라가 어떻게 될까요.”
한강 작가의 소설 《소년이 온다》의 등장인물 ‘동호’의 모티브가 된 고 문재학 열사의 어머니 김길자 님은 2024년 12월 3일 계엄 선포 후, 저자와 나눈 통화에서 이런 심정을 토로했다. 실제로, 5․18 민 주화운동 피해자 중에 트라우마 재경험을 호소한 이는 한둘이 아니었다. 무려 45년이 지난 일임에도 그들에게 국가 폭력에 대한 두려움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것이다.
대체 손에 잡히지조차 않고 측정마저 불가능한 이 상처는 왜 이토록 오랫동안 그들을, 또 우리를 괴롭히는 것일까. 이 책은 바로 이 지난한 의문에서 출발한다.
오랜 시간 국가 폭력 및 사회적 참사 피해자를 치유하고 연구해 온 저자는 이들이 시달리는 트라우마 감정을 몇 가지로 나누어 상세히 분석했다. 그중 스스로를 자기 의심과 자기부정으로 마비시키는 ‘독성 수치심’은 방어 기제로서 ‘분노’를 불러오고 이 격노가 또다시 수치심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특 히 헤어나오기 힘든 악순환을 보여준다. 저자는 정작 수치심의 가해자는 책임만큼 지분을 가져가지 않으면서 피해자 홀로 오롯이 그것을 감당해 내는 것을 지켜보며, 이 불공평한 분담을 ‘수치심의 불공정’이라 일컫는다. 그리고 자기혐오에 빠진 피해자에게 이 개념을 제시하면서 그들 스스로 자신을 친절하고 이해심 있게 대하는 자기연민을 갖도록 이끈다.
그는 부당한 명령이나 불가항력적인 상황으로 인해 비윤리적인 경험을 하게 된 이들에게 발생하는 ‘도덕적 손상’에도 주목했다. 주로 전투에 참여해 인명 살상 등의 임무를 부여받은 군인들에게 자주 나타나는 이 증상은 12․3 계엄 후 계엄군들에게도 일부 나타난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 외에도 사랑하는 대상을 폭력적이거나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잃게 되었을 때 극심한 슬픔으로 애도 반응이 중단되거나 왜곡되는 ‘외상적 애도’와, 희생자들을 먼저 보내고 남은 자들이 느끼는 ‘생존자 죄책감’에 대해서도 깊이 있게 다루며, 각각의 회복 방안에 대해서도 짚고 있다.
트라우마는 물결처럼 번져나간다 이는 역으로도 가능하다. 회복도, 결국 물결처럼 온다
사회적 트라우마는 개인에게 그치지 않는다. 자연재해, 대형 참사, 국가 폭력 사건, 테러나 전쟁 등 이 발생한 후 공동체 내에는 우울증, 불안, PTSD 등 정신건강 문제가 물결처럼 번져 나간다. 뒤이어 직접 피해를 입지 않은 이들 역시 생존자 죄책감을 비롯해 트라우마 감정에 시달릴 수 있다. 세월호 사건을 지켜보며 전 국민이 느낀 짙은 절망감을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이렇듯 트라우마가 그것을 직접 경험하지 않은 집단에게까지 번져 가는 것을 ‘물결 효과’라고 한다.
저자는 이것을 역으로도 일으킬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를 위해서는 집단 치료와 피해자의 공동체 활동, 집단 증언이나 사회적 기억 활동, 시민 사회의 연대 등이 필수적이다.
피해자들의 회복에 가장 중요한 것은 ‘인정’과 ‘의미 찾기’이다. 즉, 내가 겪은 고통이 실제로 발생 한 것임을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것 그리고 이 희생이 어떤 식으로든 무의미하지 않았음을 깨닫는 것 이다. 이를 위해서는 개인적 차원의 치유도 중요하지만 사회적 차원의 움직임이 절실하다.
그런 점에서 증언 치유는 중요한 해법이 될 수 있다. 이는 피해자에게 감정적 지지를 경험하게 하는 동시에, 여러 참여자의 기억이 서로 덧대어지면서 ‘사적인 이야기’가 ‘공적으로 검증된 기억’으로 전환되도록 한다. 그 과정에서 그들의 무고함과 고통의 생애사를 공동체가 인정해 주는 사회적 증명이 일어난다. 한 발 더 나아가, 피해 집단과 가해 집단, 서로 다른 피해 집단, 갈등 양측 공동체 등이 만나는 ‘집단 간 증언 치유’도 눈여겨볼 만하다. 쉬운 일은 아니다. 부작용도 존재한다. 하지만 그동안 악마화하고 불신했던 상대와의 인간적 연결을 회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시도할 가치는 충분하다.
저자가 궁극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이런 집단 트라우마를 관장하고 사회적 자본을 강화하기 위해 국가가 나서야 한다는 점이다. 바로 여기에 사회적 트라우마 사건들의 피해자들을 두고 ‘그만 좀 하자, 진절머리 난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건네는 대답이 숨어 있다. 지금껏 국가는 ‘그만 좀 하라’는 말이 나올 만큼 한 것이 없었다. 참사 이후 진상 규명은 관련 분야에 문외한인 유가족들의 몫이 되어버린 경우가 허다했고, 국가 폭력 사건에 대해서도 이를 책임져야 할 국가는 은폐와 부인주의로 일관하곤 했다. 그럼에도 잘 알지 못하는 이들은 피해자들에게 무분별한 2차 가해를 퍼부었다.
제대로 치유된 적 없으므로 그들의 상처는 곪아 갔고, 분노는 쌓여갔다. 그 결과, 그들의 생애는 글로 다 담지 못할 만큼 무너져 내렸고, 그 영향은 자녀 세대에까지 뻗어갔다. 저자는 묻는다.
“살해 협박과 윤간 후 유산, 냄새나 군인 등의 단서에 의한 트라우마 재경험, 성 생활 장애와 부부 불화, 직업 기능의 손상, 우울증, 수치심과 두려움, 대인관계의 어려움과 같은 그의 긴 생애사적 고통을, 국가는 과연 피해 범위에 담아낼 수 있을까?”(8장 계엄군의 성폭력이 만든 섬/p.203)
책에는 실제 피해자들과 유족들의 생생한 인터뷰가 고스란히 실려 있다. 저자는 우리가 이들의 고통에 공감하고 서로 연결되는 동안 집단 트라우마로 인한 분열과 갈등도 서서히 통합되어 갈 것이며, 그것이 민주주의로 가는 느리지만 단단한 길이라고 이야기한다. 내 것 혹은 내 가족이나 이웃의 것이 되었을지도 모를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숨죽이고 이 책을 펼쳐보길 권한다.
저자 소개
정 찬 영
2013년부터 광주트라우마센터에서 국가 폭력 생존자와 유가족을 대상으로 증언 치유를 해온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5·18 민주화운동, 세월호 참사, 학동 붕괴 사고,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등의 집단 트라우마 사건 피해자 및 유족과 학생 자살 등의 학교 위기 사건 당사자, 화순 PC방 노예 사건 피해자, 탈 성매매 여성 등 사회적 트라우마로 고통받는 이들을 치유하고 돕는 일들에 참여해 왔다. 증상 중심의 개인적 치료를 넘어 공동체에 기반한 사회적 회복을 지향한다. 2021년 오월 어머니 상을 수상했고, 현재 광주 동명병원 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국립트라우마치유센터 자문의, 12·29 여객기 참사 피해자 지원 및 희생자 추모위원회 위원, 한국 트라우마스트레스학회 교육부위원장 등으로도 활발히 활동 중이다. 함께 쓴 책으로 《그대의 마음에 닿았습니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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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폭력과 사회적 참사가 남긴 상처는 시간이 흐른다고 쉽게 지워지지 않습니다. 많은 경우 피해 당사자에게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사회 공동체에는 반드시 그 상처의 흔적이 투영되기 때문입니다. 4·3과 5·18, 세월호와 이태원으로 이어진 비극은 그래서 여전히 우리 사회에 ‘기억’과 ‘책임’의 과제입니다. 지난해 겨울, 12·3 비상 계엄이 많은 이들에게 낯선 공포가 아니었던 이유도 이와 같을 것입니다. 이 책은 국가 폭력과 사회적 참사라는 우리 현대사의 상처를 톺아보며, 사회적 트라우마가 결코 개인만의 고통이 아닌 우리가 모두 함께 짊어져야 할 책임이라는 점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나아가 ‘함께 회복하는 민주주의’가 왜 중요한지에 대한 깊은 성찰을 제시합니다. 국가 폭력과 사회적 참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우리 사회가 어떤 약속을 세워야 하는지 고민하는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을 추천합니다.
우원식 | 국회의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