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ㅣ 장승용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드라마에서 부모 자녀 사이의 대화에 단골처럼 등장하는 대사가 있습니다. 바로 주인공이 나이 든 부모님을 등에 업은 채 “왜 이렇게 가벼워?”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며 점점 약해지는 부모님의 뒷모습을 바라볼 때면 만감이 교차하곤 합니다. 늘 든든한 기둥 같을 줄 알았던 부모님이 언제 이렇게 작아지셨나 싶기도 하고, 어린 시절 나에게 상처를 주고 힘들게 했던 부모님의 모습이 겹쳐지면서 묘한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부모님이 나이가 들어가심에 따라 부모 자녀 사이 관계와 역할에도 변화가 생깁니다. 성인기 초기까지 주로 부모님의 일방적 관심과 지지, 통제 아래 있다가 성인이 되면서 점차 독립적인 생활을 합니다. 그리고 부모님이 노년기에 접어드실 때면 이제는 장년 혹은 중년이 된 성인 자녀가 보호자 역할을 하며 필요한 것을 챙겨드립니다. 그러면서 예전에 부모님께 들었을 법한 잔소리나 걱정들을 이제는 반대로 자녀가 부모님께 할 때가 많습니다.
이렇게 관계와 역할 변화는 삶에서 반드시 일어나지만, 그 과정이 항상 수월하고 자연스럽게 진행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부모님이 너무 까다롭고 완고하며 고집이 세셔서 대하기가 어렵다고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너무 의존적이고 도움을 요구하는 부모님의 태도에 어디까지 챙겨드려야 하는 건지 고민이 된다고도 합니다. 성인 자녀의 상황을 존중하지 않고 너무 자기중심적으로 행동하거나 자녀들로부터 버려질까 봐 끊임없이 불안해하면서 자기파괴적인 행동을 하거나 자녀들을 지나치게 통제하고 간섭하려는 부모님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성인 자녀들은 부모님에 대한 부양과 돌봄의 의무, 자식 된 도리, 쇠약해진 부모님에 대한 안쓰러움과 안타까움과 함께 부담감, 존중받지 못하는 느낌, 어린 시절부터 느껴왔던 부모님에 대한 원망과 분노, 불신과 같은 감정들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듯한 양가감정(ambivalent feeling)을 느낍니다. 그러면서 부모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할지 혼란스러워하기도 하고, 너무 과중한 책임 또는 방임/외면 사이에서 내적 갈등을 겪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성장기 동안 겪었던 부모님과의 갈등이나 역기능적 관계가 악화되는 양상을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노년기의 부모님과 빚는 갈등과 마찰은 우리 마음에 많은 짐을 남깁니다.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는 물론이고, 돌아가신 후에는 ‘그때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라는 후회와 부모님과의 관계를 잘 마무리 짓지 못했다는 미해결감이 오래도록 남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나이 든 부모님과 건강한 관계를 맺고, 잘 지내는 방법을 찾는 것은 부모님을 위해서도, 그리고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이 든 부모님과 잘 지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몇 가지 방법을 알려드리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시간이 지나면서 부모님의 정체성 역시 달라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10대의 나와 20대, 30대, 40대의 내가 다르듯이 부모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뇌리에 강하게 박혀 있는 부모님의 모습은 주로 우리가 어렸을 때, 부모님이 한창 젊으셨던 20~50대 무렵일 것입니다. 그때 부모님이 나에게 했던 말이나 행동, 태도가 부모님에 대한 우리의 인상과 판단을 결정짓는 데 많은 역할을 하기 마련이죠. 하지만 부모님 역시 부모이기 이전에 한 사람으로서, 시간과 상황의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바뀔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렇기에 과거의 부모님과 지금 부모님의 정체성이 완전히 동일하리라 가정하고 대해서는 안 되는 것이죠.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과거의 기준으로 현재의 부모님을 평가하고 대하게 되고, 새로운 관계와 역동 속에서 부모님과 상호작용하는 것이 어려워집니다. 내가 기억하고 생각하는 부모님의 모습이 아닌, 현재의 부모님을 온전히 바라보고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2. 과도한 돌봄이나 부모님과의 경계가 없어지는 것을 주의하기
흔히 우리는 자녀로서 부모님이 괜찮다고 해도 더 많은 것을 챙겨드리는 것이 좋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부모님이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서도 자녀들에게 부담이 될까 봐 미안해서 표현하지 못할 때가 많으니 어느 정도 맞기도 합니다. 하지만 부모님이 필요로 하는 것 이상으로 과도한 관심이나 돌봄을 제공하는 것은 부모님과 자녀 모두에게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부모님으로서는 자녀가 내 능력이나 판단력을 믿지 못하거나 내 고유 영역을 침범받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자녀로서는 과도한 희생과 돌봄이 어느 순간 부담으로 느껴질 수도 있고, 부모님을 돌보느라 자신을 충분히 챙기지 못하고 신체적, 정서적, 경제적 측면 등에서 소진될 수도 있습니다. 역기능적인 부모 자녀 관계에서는 이런 과도한 돌봄과 경계의 부재가 서로에 대한 의존과 끊임없는 요구, 통제, 독립성/개별성 결여와 같은 문제를 더 심화시킬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서로를 위해 건강한 경계를 만들고 필요한 부분에 대해서는 본인이 직접 이야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3. 감사와 배려, 존중의 표현을 하며 예의를 지키기
가족 간에는 어떤 말이나 행동도 다 용인되며, 예의를 따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가족 구성원을 감정 쓰레기통으로 여기거나 정제되지 않은 언행,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이유로 자주 사용됩니다. 하지만 가족 간에도 지켜야 할 예의와 선이 분명히 있습니다. 가족이니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굳이 이런 것까지 일일이 표현해야 하나 싶을 때가 있지만, 말하지 않으면 모릅니다. 감사와 배려, 존중의 표현은 서로를 소중하게 여기며 가족으로서 받는 지지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데 대한 반증입니다. 이런 표현을 많이 할수록 가족 간의 신뢰와 애정이 두터워지고,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주고 다른 쪽은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닌, 상호의존적이고 수평적인 관계가 형성되는 데 긍정적인 작용을 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일평생을 함께 해온 부모님이지만, 부모님과의 좋은 관계가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연세가 드시면서 부모님이 겪는 변화와 그로 인한 부모님과의 관계에서의 변화를 잘 받아들이고 현명하게 대처할 필요가 있습니다. 소개해드린 방법들이 도움이 되셨기를 바랍니다.
합정꿈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ㅣ 장승용 원장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회원
한국정신분석학회 정신분석적 정신치료 Master class 수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