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선의 [가족의 심리학] (1)

[정신의학신문 : 서대문 봄 정신과, 이호선 전문의] 

 

A군은 겉보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스물네 살 대학생이다. 집안 형편도 넉넉하고 가족 관계도 단란해 보여 주변의 부러움을 산다. 아빠는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사업가고 엄마는 알뜰살뜰한 전업주부다. A군은 초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동네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외모가 준수하고 활달한 아이였다. 어딜 가나 눈에 띄는 A군은 반장을 도맡아 했다.

그런데 초등학교 고학년에 접어들면서 엄마의 태도가 점점 달라지기 시작했다. 학업에 대한 압박이 심해진 것이다. 학교 시험은 물론이고 학원 숙제까지 일일이 확인하고 간섭했다. 

“이건 정신만 똑바로 차렸으면 맞혔을 문젠데 집중을 안 해서 틀린 거잖아?”

“내일 시험은 정말 중요해. 지난번처럼 같은 실수를 하면 안 돼. 알았지?” 

어떤 날은 엄마가 밤늦게까지 붙잡아 놓고 공부를 시켰고, 성적이 기준에 못 미칠 때는 고개를 들지 못할 만큼 야단을 맞았다. A군은 갈수록 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중학생이 되면서부터는 선생님이나 친구들과도 쉽사리 어울리지 못했다. 활발한 성격은 간데없고 늘 주눅이 든 듯 의기소침한 모습이었다. 고등학생 때까지 이런 상황이 이어졌다.

 

사진_pixabay
사진_pixabay

 

젊은 나이에 자수성가한 아빠는 워낙 분주해 아들과 대화를 나눌 시간이 없고 감정적인 교류도 적은 편이다. 나날이 사업이 번창하면서 소위 성공한 사람들과 교제할 기회가 많아지자 그들의 화려한 학력과 경력을 보면서 하나뿐인 아들에 대한 기대도 덩달아 커졌다. 

그러나 A군이 아빠의 간절한 바람과 달리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점차 소심한 아이로 변해가자 보기만 하면 이것저것 트집을 잡아 윽박지르고 괜스레 짜증을 내기 일쑤였다.

“사내자식이 왜 쭈뼛거리면서 살아? 어깨 쫙 펴고 당당하게 살란 말이야!”

“내가 너라면 악착같이 공부해서 1등 한번 해보겠다. 너는 그런 오기도 없냐?”

 

다행히 입시정보에 밝은 엄마 덕분에 대학은 갈 수 있었지만, 적성에 맞지 않는 학과 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한 현재도 A군은 하루를 거의 혼자 보낸다. 코로나 사태로 모든 강의가 온라인으로 진행되면서 집 밖을 나갈 일이 없어졌다. 사업에 바쁜 아빠는 일찍 나갔다 늦게 들어오니 얼굴 마주칠 일이 별로 없다. 엄마는 자신이 기대했던 일류대학에 입학하지 못했을 때부터 A군에 대한 희망을 접은 듯 잔소리를 끊었다. 포기했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A군은 혼자 집에 있으면서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내가 히키코모리가 된 걸까?’      

어떤 문제도 없는 것처럼 단란해 보이는 가족, 남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행복한 가족의 이면은 드러난 실상과 전혀 다를 때가 있다. 한 가족의 속사정은 그 가족 구성원이 아니면 속속들이 알기 어렵다.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A군 가족은 아빠, 엄마, 아들, 세 사람이 한집에 살기는 하지만, 저마다의 성을 쌓고 살아가는 전형적인 한 지붕 세 가족이다.

권위적이고 강압적인 방법으로 가족을 대하는 아빠. 사사건건 잔소리를 입에 달고 살면서 자녀의 일거수일투족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한 엄마. 이런 아빠와 엄마 때문에 집에 있는 게 너무 힘들고, 한번 나오면 다시 들어가기 싫은 아이들. 현관에 들어서면서부터 고개를 푹 숙이고 쏜살같이 자기 방으로 들어가 밥 먹을 때만 잠깐 나왔다가 다시 제 방에서 꿈쩍도 안 하는 아이들. 가족이지만 전혀 소통도 공감도 이루어지지 않는 묵언 가족 혹은 침묵 가족의 모습이다. 이런 가족의 문제가 뭘까? 소통의 실마리를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까?     

 

가족의 출발은 부부 두 명에서 시작하지만, 자녀가 생기면서 삼각관계를 형성한다. 부부 사이에 갈등이 있을 때는 두 사람이 원만히 해결하지 않으면 좌절하면서 상대방에게 화를 내고 문제를 더 크게 키운다. 중재자가 없으니 둘 중 한 명이 화해의 손길을 내밀지 않으면 결말이 나지 않는다. 그러다가 자녀가 태어난다. 부부를 빼면 가족 안의 제삼자다. 자녀로 인해 부부 사이의 갈등이 줄어들기도 하지만, 반대로 악화하기도 한다. 이 미묘한 삼각관계로부터 시나브로 축적된 긴장과 갈등은 가족 관계의 고유한 형태인 양 고착되기도 한다.

가족 구성원 간에 감정적 교류가 어려운 남편은 아내와의 관계도 소원해지기 쉽다. 그러면 아내는 자녀에게 더욱더 관심을 쏟게 마련이다. 남편과의 관계에서 거리감을 느끼면 아내는 불안한 마음으로 차츰 자녀에게 애착을 갖게 되는데, 보통은 특정 자녀에게 과도한 애착을 보인다. 이런 경우 애착의 대상은 장남이나 장녀인 경우가 많다. 첫 아이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던 까닭이다. 반면 가장 늦게 낳은 막내나 자신과 제일 닮은 아이일 가능성도 있다. 불안을 달래기 위한 집착에 가까운 관심이다. 아내와 자녀의 관계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반대로 남편은 아내나 자녀와의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 또한 엄마가 자신의 불안으로 인해 자녀에게 집착하고 몰두할수록 자녀의 독립적인 기능은 저하된다. 자녀가 나이 들어가면서 어른의 역할과 기능을 하지 못하는데도 엄마는 자꾸 그 자녀를 품으려고만 한다.

 

자신의 감정을 좀처럼 표현하지 않는 권위적인 남편과 매사 날카롭고 예민하게 반응하는 아내로 가족 관계가 형성된 경우는 특징적인 상호작용이 있다. 그것은 쫓아가는 자(pursuer)와 거리를 두려는 자(distancer)로 나뉘는 것이다. 부부 중 한 사람이 대화하려고 상대방에게 다가갈수록 그를 피하려고 의도적으로 텔레비전을 보거나 바쁜 척하거나 일부러 직장에서 늦게 퇴근하면서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이럴 때는 도망가는 사람을 억지로 붙잡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성난 표정으로 텔레비전을 꺼버리거나 뭐가 바쁘냐고 화를 내거나 무서운 얼굴로 퇴근하는 남편을 현관 앞에서 노려보고 있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분위기만 험악해질 뿐이다. 오히려 쫓아가는 자에게 “당신 인생에 그 사람 외에 무엇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짐으로써 그의 내적인 공허감을 탐색하도록 돕는 것이 현명하다.

부부의 정서를 표현하는 방법 중에 잘 알려진 방법은 ‘내 입장(I-position)’에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을 진솔하게 표현하되 상대방을 비난하는 방식으로 말하지 말고, 오직 자신의 내면에 있는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는 차원에서만 ‘나’를 위주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당신 똑바로 해!”라고 분노를 표출하기보다는 “당신 행동을 보니 내가 화가 나고 슬퍼.”라고 표현함으로써 부드럽게 자신의 감정을 상대에게 드러내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보면 삼각관계는 두 사람만의 쌍방관계보다 긴장과 갈등을 풀기 쉽다. 둘 사이에 누구라도 중재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윽박지르는 아빠가 소통을 가로막는다면 딸이 부드러운 중재자가 될 수 있고, 잔소리가 심한 엄마가 대화에 장애가 된다면 아들이 관계를 풀 열쇠가 될 수 있으며, 자녀를 위해서라면 부부가 굳은 결심으로 열린 가족을 위한 초석을 놓을 수 있다. 한 사람의 변화로 인해서 가족 모두가 변화할 수 있다. 모든 가족이 치료에 참석하지 않더라도 한 사람의 긍정적인 변화가 모든 가족을 바꿀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누가 나설 것인가다. 가족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제일 먼저 나서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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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서대문봄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학사, 석사
한양대병원 외래교수, 한양대구리병원 임상강사
(전)성안드레아병원 진료과장, 구리시 치매안심센터 자문의, 저서 <가족의 심리학>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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