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선의 [부모의 심리학] (14)
[정신의학신문 : 서대문 봄 정신과, 이호선 전문의]
빈 둥지 증후군(empty nest syndrome)이란 어미가 물어다 준 먹이를 먹고 자란 새끼 새들이 스스로 날갯짓해 둥지를 벗어난 뒤 텅 빈 둥지 안에 홀로 남겨진 어미 새가 느끼는 허전함과 공허함을 사람에게 빗대 만들어진 심리학 용어다. 어리게만 여겼던 자녀들이 훌쩍 성장해서 대학을 가거나 군대를 갔을 때, 취직이나 결혼으로 독립하게 되었을 때 부모가 느끼는 쓸쓸한 감정을 가리킨다. 아버지나 어머니 모두 이런 감정을 느끼겠지만, 특히 양육자 역할을 거의 전담했던 여성에게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중년 여성의 위기인 셈이다.
의학 용어는 아니지만 빈 둥지 증후군을 흔히 ‘폐경기 증후군’이라고도 부르는 것은 폐경기를 전후로 호르몬 변화를 겪는 중년 여성에게 많이 나타나는 증상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증후군 자체가 질병은 아니지만, 오래 지속될 경우 심한 우울증으로 발전할 수 있다. 세계보건기구(WHO)에서도 빈 둥지 증후군으로 인한 우울증이 인류를 괴롭힐 세계 2위의 질병이 될 것이라고 예측한 바 있다.
서양의 가정은 대체로 부부 중심이지만, 우리는 다분히 자녀 중심이다. 결혼해서 둘이 살다가 아기를 갖게 되면 거의 모든 선택이 아기를 기준으로 이루어진다. 달콤한 신혼생활, 즉 진정한 허니문은 둘이 살 때뿐이다. 예전처럼 자녀가 많은 게 재산이고 미덕이던 시절에는 워낙 자식이 여럿이다 보니 한 명 한 명 일일이 신경 쓰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으나 요즘은 외둥이가 흔하고 많아야 두어 명 정도다 보니 어느 집엘 가나 아이가 상전이다. 밥상도 아이 중심으로 차리고, 가구도 아이 중심으로 배치하며, 소비도 아이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이사도 아이 등하교 시간을 고려해야 하고, 이왕이면 학군이 좋은 동네로 가야 한다.
모성애야 전 세계 어머니들에게 공통적으로 있는 것이지만, 한국 어머니들의 자식 사랑과 자녀 교육은 좀 유별나다. 새벽같이 일어나 더 자겠다는 아이를 깨우고, 밥상을 차려놓고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고 가라고 채근한다. 지금은 학교에서 급식을 주니까 도시락을 싸지 않아도 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성장에 좋은 영양가 높은 식단으로 정성껏 싼 도시락을 챙겨주고 나서야 매일 치르는 등교 전쟁이 끝났다. 남편 출근 준비까지 거들다 보면 이제 겨우 하루가 시작되었을 뿐인데, 중노동을 한 것처럼 맥이 풀린다. 아이와 남편이 집을 나서기 전 어질러 놓은 것들을 치우고, 청소와 정리정돈을 마친 후에야 겨우 한숨 돌린다.
오후에도 아이가 학원에 잘 갔는지 확인해야 하고, 세상이 워낙 험하다 보니 위험한 일은 당하지 않는지 스마트폰 자녀 안심 앱 등을 수시로 들여다봐야 한다. 다른 아이들에 비해 성적이 뒤떨어지지는 않는지, 어떤 과목을 더 집중적으로 공부해야 좋을지, 좋은 대학에 무난히 합격하려면 어떤 준비를 더해야 할지, 아이가 혹시 과학이나 어학, 예체능 등에 남다른 자질이 있는 건 아닌지 등 고민하고 챙겨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아이가 무사히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고 공부하다가 잠자리에 들기까지 단 한시도 긴장을 놓을 수 없다.
그러다 아이가 고3이 되면 하루하루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으로 살아야 한다. 입시를 치르는 아이보다 어머니가 스트레스를 더 많이 받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이가 좋은 대학에 합격하면 자기가 머리가 좋고 공부를 열심히 해서 그런 거고,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지 못하면 어머니가 게을러 아이 뒷바라지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라고 여긴다. 이러나저러나 어머니는 죄인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도 대다수 어머니는 기꺼이 자녀 입시 전쟁의 총사령관 역할을 떠맡는다. 최근에는 대학생 자녀의 학업이나 군대 간 아들의 병영 생활 심지어 직장 다니는 자녀의 회사 생활까지 일일이 챙겨주고 뒤치다꺼리해주는 어머니들도 있다고 한다.
그래도 이건 전업주부일 경우고, 맞벌이를 하거나 자영업을 하는 어머니일 때는 직장 일과 사업만 해도 할 일이 태산인데, 가사와 양육 부담까지 떠맡아야 하니 고충과 애로가 이만저만 아니다. 가사와 양육을 남편과 아내가 분담해서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상당 부분 아내에게 비중이 더 많이 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어머니는 그야말로 슈퍼우먼이 되어야만 한다. 그나마 자기 일이 있는 여성은 자신의 분야에서 나름 성취감을 맛보지만, 전업주부들은 자식이 잘되는 게 곧 자신이 잘되는 것이라 여긴다. 자식은 자신의 정체성이자 거울이다.
이렇듯 자식만 바라보고 살아온 어느 날, 하나뿐인 아들과 하나뿐인 딸이 다 컸다고, 독립하겠다고 훨훨 날아 둥지를 떠난다. 성인이 되었으니 자기 인생 알아서 사는 게 당연하고, 결혼했으니 자신의 가정을 꾸리는 게 마땅하지만, 어쩐 일인지 섭섭하고 허전하고 뭉클하다. 가슴 한쪽이 뻥 뚫린 것 같다. 집 안이 텅텅 빈 듯하다. 새벽에 일어나 깨울 자식도, 서둘러 밥을 챙겨 먹일 자식도, 도시락을 싸서 들려줄 자식도, 잔소리를 퍼부어댈 자식도 없다. 자신의 인생 전체가 부정당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내가 지금까지 뭘 하면서 살아온 걸까, 허무하고 허망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울하고 불안한 감정이 밀물처럼 몰려온다.
이런 게 바로 빈 둥지 증후군이다. 새벽밥 할 일도 없는데, 일찍 잠이 깨고, 기분이 점점 침체되며, 통 밥맛이 없고, 체중이 줄어든다. 결혼생활이 만족스럽지 않았거나, 자식에게 과도한 기대와 희망을 가지고 있었거나, 세월의 흐름에 따라 삶이 변한다는 가능성을 수용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성격일수록 빈 둥지 증후군을 경험할 가능성이 높다. 이 시기 여성의 남편은 대개 은퇴를 경험한다. 직장에서 일찍 밀려나 정리해고 또는 명예퇴직을 하는 경우도 있다. 무기력해 보이는 남편은 빈 둥지 증후군을 더 악화시킨다. 어디에도 기댈 데가 없는 것이다. 여자로서도, 어머니로서도, 아내로서도 더 이상 자신의 역할이 없다고 느낀다.
빈 둥지 증후군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런 감정이 드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우리나라 어머니들만 그런 건 아니다. 부부 중심의 삶이 보편화되고, 합리성과 객관성이 몸에 밴 서양 사람들도 빈 둥지 증후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것이 보편적인 인간의 감정이다.
빈 둥지 증후군에서 벗어나려면, 아니 이 같은 증세를 최소화하려면 어떻게 해야 좋을까?
제일 중요한 건 가정에 대한 개념을 명확히 하는 것이다. 결혼할 때부터 남편과 아내 두 사람이 함께 가정의 중심은 부부라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 부모로서 아이를 낳아 최선을 다해 양육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자녀는 자녀고 부부는 부부다.
최근 한 텔레비전 예능 프로그램에서 어떤 외국인 부부가 자녀와 함께 여행하는 장면을 본 적 있다. 낯선 곳에서 하룻밤 머무는 시간이었지만, 부부는 아직 어린아이들을 자신들의 영역과 정확히 분리해서 행동했다. 달래 가며 같이 자는 게 아니라 각자 따로 자게 했다.
식사 도중 엄마 아빠의 접시를 힐끗 쳐다본 딸이 엄마에게 정중하게 물었다.
“엄마, 나 엄마 것 좀 먹어도 돼요?”
서로 다른 메뉴를 시켰기에 앞에 놓인 음식이 각각 달랐던 것이다.
“안 돼. 너는 네 것이 있잖아. 네 것을 먹어야지. 이건 엄마 거야.”
그러자 딸아이는 엄마 접시에 놓인 음식이 맛있어 보였음에도 조용히 자기 것만 먹었다.
한국인 가족이었으면 어땠을까? 그렇다고 부모 자식 간에 사랑이 없는 게 아니다. 한 둥지에서 정을 나누며 사는 가족이지만, 각자의 삶이 있고, 부부의 영역과 자녀의 영역이 따로 있는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살게 되면 자녀가 어른이 되어 독립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고, 이로 인한 상실감이나 고독감은 많이 줄어들게 될 것이다. 자녀가 장성해서 독립한 뒤에 부부가 어떤 인생을 보낼지, 무엇을 하면서 살지, 어디에 가치를 두고 어떤 걸 목표로 살아갈지에 대해 틈틈이 고민하면서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지향점을 찾아야 한다.
그다음은 자식의 성취와 성공에만 전념하지 말고 자신과 배우자의 성취와 성공을 위해 더 노력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노후 준비는 젊어서부터 해야 한다. 부부가 함께할 수 있는 취미활동과 봉사활동, 운동이나 레저가 있으면 좋다. 자녀가 성인이 되면 내 마음속에서 놓아줘야 한다. 자기들이 날아간 게 아니라 내가 날려 보낸 거라고 생각해야 한다. 나이 든 자식을 끼고 사는 부모는 불행하다. 스스로 날아갈 수 있도록 훈련시키는 게 부모의 역할이다. 혼자 살아갈 수 있을 만큼 키우고 공부시켰으면 제 힘으로 살아가야 한다. 부모가 자녀 결혼 비용까지 다 대주고, 집까지 사주는 것도 모자라 손주들 돌봐주는 일을 떠맡고, 얼마 되지 않는 재산이나 노후 자금까지 자녀 사업자금으로 털어 넣는 것은 삼가야 할 일이다.
부부 문제 전문가로 책도 여러 권 쓰고 강의도 많이 다니는 유명 강사 한 분이 했던 말이 생각난다. 아들 결혼식을 치르고 집으로 오는 차 안에서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여보, 이제부터 우리한테 아들이 있었다는 생각을 아예 지워버립시다.”
이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식에게만 향해 있던 시선을 배우자로 옮기는 게 바람직하다.
둥지를 떠난 자녀들 입장에서는 어떨까? 부모의 허전한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 떠나온 둥지로 다시 날아갈 수는 없다. 한 번 떠나온 둥지는 내 둥지가 아니다. 그러나 자녀를 독립시키고 나서 쓸쓸하고 적적해할 부모의 심정을 이해해야 한다. 자주 전화도 드리고 가끔씩 외식도 하고 직접 찾아뵙는 것도 좋다. 이제 서로의 둥지가 달라졌지만, 우리는 여전히 한 가족이며 사랑하는 부모 자식 사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손주가 있다면 손주 얼굴을 더 자주 보여드리는 것이 최고의 효도다. 배우자 중 어느 한쪽이 먼저 세상을 떠난 경우, 홀로 남겨진 아버지나 어머니는 빈 둥지에서 느끼는 상실감이 더하다. 자녀로서 좀 더 마음을 써야 한다. 나이 든 부모의 눈동자 속에서 지나온 삶의 고된 흔적을 느끼고, 나중에 늙어서 걸어가야 할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자식이라면 참 잘 자란 자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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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병원 외래교수, 한양대구리병원 임상강사
(전)성안드레아병원 진료과장, 구리시 치매안심센터 자문의, 저서 <가족의 심리학>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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