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의사가 읽어주는 영화, 열다섯 번째 이야기

[정신의학신문 : 의정부 성모사랑정신건강의학과 원장 유길상 전문의]

 

영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제작사_Initial Productions, Lumiere Pictures)

 

라스베가스는 미국 네바다주의 남동부 사막에 위치한 도시다. 이 도시는 19세기 말까지는 소규모의 광업과 축산업을 하는 마을이었다. 그러나 한적한 도시였던 라스베가스는 1930년대 대공황 당시 후버댐 노동자들을 위한 휴식 공간으로 도박장이 생기면서 유흥과 환락의 도시로 변모하기 시작한다. 현재 라스베가스는 호화스런 호텔과 유명 쉐프들이 운영하는 레스토랑, 화려한 쇼, 그랜드 캐니언 등의 광활한 자연 등으로 전 세계의 관광객을 유혹하고 있다. 사막 위에 마법처럼 세워진 도시, 라스베가스는 아이언맨, 오션스 11, 나우 유 시 미 등 많은 영화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1996년에 개봉한 영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는 단연 라스베가스를 대표하는 영화다. 한때 헐리우드의 잘나가던 시나리오 작가인 벤은 어느새 알코올 중독 환자가 되어 있다. 술로 인해 일상이 무너진 그의 곁에는 이제 매달 월급을 주는 직장도, 사랑하는 가족도 남겨져 있지 않다. 모든 것을 상실한 벤은 만취 상태에서 즉흥적으로 죽기 직전 마지막 쾌락을 위해 라스베가스로 떠난다. 한편 사라는 벤과는 다른 목적으로 라스베가스로 찾아온다. 그녀는 라스베가스의 길거리에서 성매매를 하며 근근이 생활을 이어간다. 지극히 인공적이고 신기루 같은 공간인 라스베가스에서 벤과 사라는 운명처럼 조우하여 그들만의 방식으로 사랑을 시작한다.

 

영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제작사_Initial Productions, Lumiere Pictures)

 

벤이 처음부터 구제불능의 알코올 중독 환자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아마도 일을 마치고 직장 동료들과 혹은 집에서 혼자 기분 좋게 1~2잔씩 술을 마셨을 듯하다. 하지만 내성(tolerance)이 생겨 같은 양의 술을 마셔도 예전만큼 기분이 좋아지지 않았을 것이며 따라서 동일한 효과를 내기 위해 음주량이 늘어났을 것 같다. 이후 벤은 전날 폭음을 하여 직장에 지각을 하거나 결근을 하는 횟수가 점차 늘어나 일자리를 잃게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가족들은 벤에게 술을 그만 마시고 금주 치료를 하라고 수없이 충고를 하였을 듯하다. 하지만 벤의 뇌는 이미 수십 년간 알코올 섭취로 기능과 구조가 변해 버려 그들의 진심어린 충고를 따를 수 없었을 것이다. 술을 처음 마셨을 때 황홀한 쾌감을 다시 느끼기 위해, 그리고 술을 일정 시간 마시지 않았을 때 찾아오는 특유의 불쾌감을 떨쳐버리기 위해, 알코올 중독 환자들은 끊임없이 술을 찾는다.

 

우리가 술을 마셨을 때 신체에는 어떤 변화가 생길까? 보통 체격의 65kg의 남성이 소주를 2잔 마시면 혈중 알코올 농도 0.02~0.04%가 된다. 이 상태에서는 기분이 좋아지고 쾌활하게 된다. 3~5잔을 마시면 0.05~0.10%에 이르며 기분이 더욱 들뜨며 판단력이 흐려진다. 이와 함께 체온이 상승하고 맥박이 빨라지는 신체 변화가 찾아온다. 혈중 알코올 농도가 0.15%~0.30%에 도달하면 말이 어눌해지고 지남력과 균형 감각이 상실되어 간다. 소주를 15~ 20잔을 마시게 되면 0.30~0.40%의 혈중 알코올 농도를 보이게 된다. 이 상태에서는 똑바로 서지 못하고 정상적인 언어구사가 어려워진다. 0.4%가 넘어서면 저체온, 호흡 부전, 순환 부전으로 사망에 이를 수 있다. 영화의 말미, 주인공 벤은 심각한 알코올 급성 중독 상태에서 결국 사망한다.

 

영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제작사_Initial Productions, Lumiere Pictures)

 

일부 환자들은 알코올 중독을 스스로 치료하려고 갑자기 금주를 한다. 하지만 만성 알코올 환자들이 갑작스럽게 술을 마시지 않으면 손 떨림, 식은 땀, 경련, 불안과 초조 등의 알코올 금단 증상이 발생한다. 알코올 금단 증상이 심하면 발한과 빈백 등의 자율신경계 항진, 지남력의 상실, 환시와 환촉 등의 정신병적 증상 등의 진전 섬망(delirium tremens)이 생길 수 있다. 따라서 알코올 중독 치료는 반드시 정신과 의사와의 진료가 필요하다.

 

어제 저녁, 일과를 마치고 직장 동료들과 늦게까지 술을 마셨다면 아마도 당신은 인생 최고의 쾌감을 느꼈을 것 같다. 하지만 오늘 아침, 두통, 어지럼, 더부룩한 속 등의 숙취로 어제 저녁 절제하지 못한 스스로를 후회할 수도 있다. 죽는 순간까지 술병을 놓지 못했던 벤은 쾌락의 끝을 보았을까? 아니면 절대로 피하고 싶은 고통을 느끼지는 않았을까? 어쩌면 쾌락과 고통의 극단은 닮은 모습으로 서로 마주보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유길상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성모사랑 정신건강의학과
가톨릭중앙의료원 수련의, 전공의
(전) 포천시 정신건강증진센터 자문의
(전) 의정부 청소년 쉼터 상담의
대한정신건강재단 해피마인드 상담의, 대기업, 보건소 등에서 다수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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