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6월 4일.

 

지금, 여기

명상과 요가는 참 비슷한 점이 많다. 명상도 수련해 가는 과정이라면, 요가도 운동보다는 수련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요가에서는, 마음과 생각, 몸의 하나 됨을 중요시 여긴다. 그리고 ‘지금, 여기 있음’의 중요성을 아주 강하게 말한다. 그래서 몸의 움직임이 굳이 운동이나 다이어트만을 위한 강렬한 움직임보다 내 마음과 몸의 하나 됨을 위한 명상, 수련의 과정이라고 여긴다. 언젠가 나의 몸 한 군데에 mind, think, body라는 글귀를 새겼다. 그것을 마음속에서 실천하는 언젠가는 here and now도 새기는 날이 올지 모르겠다. 

이번 주 서울숲에서도 중간에 첫 주에 했던 걷기 명상을 했다. 느리게, 완보하며 드나드는 생각들을 억지로 잡지 않고 자유롭게 놓아 주며…, 무엇보다 ‘내가’, ‘여기’에 있음을 충분히 느끼는 것. 그것을 목표로 하여 명상했다. 새소리가 시끄럽게 명상을 방해했다. 그러나 곧, 그것이 내가 여기 있음을 증명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숲치유가 아니라면 이렇게 자주 오지 않았을 서울숲을 거닐며, 빠른 속도로 산책하는 사람들을 지나치며 나는 곧 명상에 스며들었다. 몸이 아주 딱딱하게 굳어 있다는 생각을 했다. (몸을 더 풀고 걷기를 시작하는 건데…) 일상을 살며 나는 짧게 명상을 하려고 매우 노력한다. 베란다를 활짝 열어 두고 향을 피우기도 하고, 초를 켜기도 한다. 그런 시간에 나는 짧게나마 의식적으로 명상의 시간을 갖으려고 노력한다. 

 

이름 모를 풀도, 꽃도 명상 중 만나면 반갑게 머리에 들어왔다, 나간다.
이름 모를 풀도, 꽃도 명상 중 만나면 반갑게 머리에 들어왔다, 나간다.

 

 명상은 뇌를 맑게 회전시켜 주면서 비워 주고, 그간 내가 쌓아왔던 쓸데없는 데이터들을 밀어내고, 맑고 선하게 받아들인 기운들을 여러번 회전시켜 준다. 맑은 기운이 없다면, 그 자리에서 잠시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그래도 생겨나지 않는다면 그게 지금의 나다. 그걸 받아들이고 침잠하는 나의 기운을 느껴 보려고 노력한다. 

기운(氣運, energy, 어떤 일이 벌어지려고 하는 분위기) 은 확실히 흐름이 있다. 내가 요즘 어떤 일들에 기운이 밀린다든가, 눌린다든가, 올라선다든가 하는 것들은 내가 확실한 컨트롤러(controller)가 될 수는 없지만 북돋을 수는 있다. 기운에 밀리면 반대쪽에서 막아 설 수 있고, 기운이 눌리면 이겨내려 기운의 힘을 낼 수 있고, 기운의 힘을 올라섰다면 그 흐름을 더 타고 놀 수 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다만, 인간의 힘으로 마지막까지 노력해 보는 것이다. 

명상이며, 지금 여기며, 기운이며, 모호한 말들을 가득 써 놓으니 뭔가 선무당 잡는 소리 같아 글이 추상적으로 보일 수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인간 세상에는 인간이 하는 일 외의 기운들이 존재하고, 그것은 인간이 마음대로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흐름을 읽고, 나의 존재함을 깨닫고, 존재함의 기운을 깨닫고, 그것을 되도록이면 좋은 방향으로 흐르도록 바라 보는 것이다. 그것 말고 우리가 또 무엇을 해 볼 수 있겠는가. 

 

바깥의 나무들이 푸르르려면 종종 시원한 비가 내려줘야 한다.
바깥의 나무들이 푸르르려면 종종 시원한 비가 내려줘야 한다.

 

숲을 거닐면 축 쳐진 나무들이 존재한다. 비가 흠뻑 내린 지가 얼마나 지났을까. 비가 내리는 날에는 끔찍한 두통이 오는 나로서, 사실 비가 달갑지 않다. 그런데 이렇게 비를 기다린 것도 오랜만이다. 숲을 몇 주간 연달아 다니면서 바깥 나무들이 비가 부족해서 시들해지는 것을 목도하게 되었다. 축 쳐진 잎과 가지를 보면 나도 덩달아 목이 다 탄다. 이상 가뭄현상 속에 시원하게 한나절쯤 비가 내려 줬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다. 

이맘때가 내 생일인데, 그래서 복장이며 기온을 정확히 기억한다. 내가 교복을 입는 6년 동안에 내 생일에는 춘추복을 입었다. 열심히 걸으면 등굣길에 블라우스 사이로 땀이 찔끔 흘러나왔지만, 낮에 30도를 오르내리는 일은 절대 없었다. 그때쯤 선생님들께서 자기네는 어릴 적 비가 내리면 ‘와아’ 하고 입 벌려 받아 먹어도 뭐라는 어른이 없으셨다는데, 그게 시대가 지나는 일일까. 아니면 우리는 점점 안 좋은 기운으로 흘러가는 걸까. 확실히 좋은 징후들은 아닌 것 같다.

나는 아이가 없어서, 자연과 기후를 물려줄 자손은 없지만 크게는 모든 이의 어머니가 될 수 있기에, 모든 것에 무한한 책임을 느낀다. 그러한 책임감으로 오늘도, 내일도, 올해도, 내년도 살아가야겠다.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이 하나씩 들어온다. 

지금, 여기에 내가 있기에 내일의 나도 내년의 나도 있을 것이다. 아니다. 내일의 나는 내년의 나는 약속할 수가 없다. 당장 내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지금의 나뿐이다. 순간순간 나에게 상대방에게 최선을 다하고, 최선의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그러다 힘들면 푹 쉬면 된다. 그게 잠을 자는 일일 수도 있고, 향을 보며 멍하는 일일 수도 있다. 차를 한 잔 마시는 일일 수도 있고, 명상을 하는 일일 수도 있다. 

 

흰나비가 행운같이 사진에 예쁘게 나와줬다. 모두와 함께 하고 싶다. 
흰나비가 행운같이 사진에 예쁘게 나와줬다. 모두와 함께 하고 싶다. 

 

이 순간의 나에게, 응원을 보낸다. 동시에 이 순간, 그곳에서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무한한 응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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