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5월 28일.

 

땅의 주인.

호모사피언스는 말을 한다. 그 언젠가부터 불을 쓰기 시작하고, 칼을 쓰더니, 총과 번쩍이는 폭탄도 사용한다. 그러한 것들보다 무서운 것들은 쓰레기더미, 그리고 변화였다. 점점 더워지고 있었다. 그들도 일부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쓰레기를 미친 듯이 쌓아 올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들의 숫자만큼이나 많은 쓰레기를 만들어냈다. 무한 증식하여 의미없는 짓을 하는데, 그중에 하나가 땅을 파서 그 안에 쓰레기를 파 넣는 일이었다. 

 

나무를 베어 만든 숲 속 벤치
나무를 베어 만든 숲 속 벤치
벤치를 멋지게 만들어 두어도, 주인들이 독차지하고 만다. (제주, 너븐숭이터)
벤치를 멋지게 만들어 두어도, 주인들이 독차지하고 만다. (제주, 너븐숭이터)

 

그러려면 나무를 베어야 했고, 그곳에 사는 무리들은 어디로든 쫓겨나야 했다. 나무도, 새도, 동물도, 곤충도, 모두 다. 원래 땅의 주인들 말이다. 그렇게 그들 눈에 보이지 않게 쓰레기를 덮으면서 그들은 쓸데없는 짓을 하기 시작했다. 시간을 계산했다. ‘이 쓰레기가 썩는 데 걸리는 시간’ 같은 것 말이다. 100년도 살지 못할 존재들이 150년, 300년짜리 쓰레기를 묻어 놓고 자손이 와서 제사라도 지낼 것인가? 무엇 하러 그런 걸 계산하느냐 이 말이다. 

그 땅의 주인들이 어디로 갔는지는 궁금해하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황당하기 이를 데가 없다. 더워진 땅의 주인들은 움직이기로 했다. 수천, 만년을 살 던 곳을 벗어나 이제는 더워서 더 이상 이곳을 더 찾지 않겠다고 고하고, 움직여야 했다. 동물은 먹을 것을 잃고, 벌은 사라지고, 새는 지역을 움직였고, 많이는 죽어 사라졌다. 수천 종이 사라졌다. 

 

사려니 숲 속 고사리들
사려니 숲 속 고사리들

 

그럼에도 그들은 살아남아 자신의 유전자를 남기려 노력한다.

등산용 방석을 받아 앉아, 나무에 기댔다. 그리고 호흡에 집중했다. 내가 호흡을 어떻게 하는지 집중했다. 처음에는 구개호흡(입으로 하는 호흡)을 조금 하는 듯도 싶었다. 주저앉아 눈을 감고 나무에 기대니, 온갖 촉감이 살아났다. 왕개미들이 몸을 올라타는 게 느껴졌다. 그런데 순간, 싫지 않다는 생각이 슬며시 들었다. 물론 싫은 감정도 같이 들었다. 낯설고 무서웠다. ‘무서워?’ 그렇게 반문하니 우스웠다. 슬슬 털어냈다. 그러니 개미가 올라타는 감각보다 내 호흡이 더 궁금해졌다. 명상에 조금씩 익숙해지는 기분이다. 명상이라는 게 별게 없었다. ‘지금’ ‘여기’ ‘나’, ‘존재함’. 그 존재함에 대한 인지( 認知, cognition )였다. 존재함은 ‘숨’으로 확인했다.

 

‘그들’이 가득 차 있는 숲(제주)
‘그들’이 가득 차 있는 숲(제주)

 

내가 어렵게도 호모사피언스로 글을 시작했지만, 지구 호모사피언스 종일 뿐인 우리가 온 땅의 주인이라기도 어렵지 않은가? 내 몸을 올라탄 개미는 내가 자기가 사는 땅에 와서 얼마나 황당했겠는가? 덩치는 커서 나를 옮길 수는 없지만, 자신의 울타리는 지켜내야 하니 나름대로 비상이었을 게다. 

 

벽에서 자란 한련화(제주, 구좌)
벽에서 자란 한련화(제주, 구좌)

 

명상이 끝나고 오늘의 모임이 파하고, 집으로 가는 길에, 작은 벌레들이 몸에서 자꾸 나왔다. 아무래도 개미만 그 땅의 주인은 아니었나 보다. 이름 모를 화려한 몸의 작은 곤충들이었다. 그때마다 놀라서 떼서, 길가에 놓아 줬지만 전처럼 호들갑을 떨지는 않았다. 내가 그들의 지역에 다녀온 날이라는 걸 내가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말하자면, 놀랐다면 누가 더 놀랐겠는가 말이다. 그들은 나 때문에 원래의 터지에서 타지로 옮겨지기까지 했는데 말이다. 

자꾸 낯선 그들이, 그저 그 땅 주인인 게 타당해져서 이전에는 기겁했던 나의 반응이 너그러워진다. 이렇게 나도 한 살씩 먹으며 이 땅의 지구인이 되어 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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