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5월 18일. 

숲의 주인들

 

누군지 모를, 새의 발자국
누군지 모를, 새의 발자국

까마귀일까? 

아스팔트를 부어 놓고 굳기를 기다리는 그 시간 동안 이 길을 걸었을 주인공은 누구였을까? 반대쪽에서 마주 걸어온 자국이 나는 너무도 흥미롭고 재미있어서, 힘든 걸 다 잊고 사진을 찍고 영상을 찍었다. 그저 내 곁에 빙빙 돌고 있는 까마귀가 한 마리 있어, 그저 까마귀일까? 생각해 볼 뿐이다.

사람들이 걷겠다고 길을, 나무를 꺾고, 그 위에 아스팔트를 들이붓는 바람에, 그게 뭔지도 모를 새가 그것을 밟고 유유히 걷다가, 점점 그 액체가 굳어졌을 것을 생각하니 내 안색도 점점 어두워졌다. 그 새의 발은, 굳어진 아스팔트는 똑 하고 떨어져 줬을까? 그랬기를 간절히 먼 훗날의 지금, 기도해 본다. 

내 곁을 돌고 있는 까마귀가 하나 있다고 했다. 정확히는 둘이다. 두 마리가 번갈아 가며 텃세 부리는 모양으로, 아니면 신기한 것을 바라보는 모양으로 낮게도 날고, 주변을 먼저 날아가서 저 멀리서 기다리면서 자꾸 같이 가 준다. 거뭇한 것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커서 무섭다. 까마귀가 영리해서 저 큰 몸뚱이로 인간이 신기하다고 돌이라도 던져 볼까 봐 겁이 났다. 까마귀는 꽤나 지능이 좋은 편에 속한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자기네 지역에 내가 얻어 걷는 것을. 눈치 보며 걸을 수밖에. 

 

호젓하게 바라보는 까마귀
호젓하게 바라보는 까마귀

검은 나비도 주변을 맴돈다. 신기하다. 하얀 나비는 무조건 반기는데, 검은 나비는 은근히 마뜩잖아 하다가, 가까이 맴돌아 자세히 보니 예쁘다. 아무도 없는 길에 나비와 내가 교류하듯 꽤나 가까이까지 허락했다. 

 

검은 나비에 붉은 점이 있다.

딱 이만큼만, 이라고 하듯 사진 몇 점을 허락하더니 휘리릭 나를 한 바퀴 돌고 날아갔다. 나는 가만히 내 몸을 허락하고, 그렇게 나비를 보내 줬다. 

아직 힘을 못 쓰지만, 산모기도 등장했다. 덩치만 커다래서는 들러붙는데, 걷는 탄성만으로도 떨어져 나간다. 이런저런 날아다니는 곤충들이 많이 보여 입을 오므려 보지만, 금세 숨이 가빠 입을 파~ 하고 터뜨리고 만다. 잡생각이 사라진다. 오만 가지 생각이 달려 있던 초행길을 생각하면 7~8km, 중반에 다다른 길에서는 오직 ‘걷는다.’는 것에만 집중한다. 빠르면 안 된다. 지금 힘을 다 빼 버리면 나머지 절반의 길을 걸을 수가 없다. 너무 느리면 해가 진다. 페이스 조절을 잘해야 한다. 

신비한 노루를 그사이 구경하고, 와장창 페이스가 깨졌다. 신비로운 마음에 심장이 마구 뛰었다. 다시 몸을 정비한다. 걷고 걷는 내 발과 발목과 종아리와 허벅지와 그 모든 것을 흔드는 골반과 그것과 이어진 척추뼈, 그 와중에 이것저것 보고 눈에라도 담겠다고 사방을 살피는 머리통의 눈까지 생각하면 온몸이 최선을 다해 협업하고 있다. 조금이라도 특이한 모습이 보이면, 느리게 걷고, 사진을 찍어 두고, 생각을 한다. 그렇게 반복하다 보면 10km쯤이 와 있다. 이제부터가 정말 고비다. 

북쪽에서 와본 곳, 익숙한 길, 여기저기 눈에 익은 풍경들… 그런 이곳이 반대로 걸으니 이렇게 언덕이 심했나? 있는 만큼의 체력을 모두 다 쓰고, 3km 남았다는 표지판을 보며 없는 힘을 꺼내야 한다는 사실을 깨우쳤다. 마지막 3km는 사실, 한 번 주저앉고 싶은 적도 있었다. 없는 힘을 꺼내 걷는 데만 집중하니, 호흡에 가장 신경이 많이 쓰였다. 호흡이 걷는 거리를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호흡의 수준을 집중하니, 마음이 차분해졌다. 나를 달래며 걷고 또 걸은 것은 확실히 이 마음이 절대적이었다. 

“내가 직접 걷지 않으면 누구도 대신해 주지 않아.”

맞다. 119에 전화를 할 수도 있고, 그렇게 굴욕적으로 내려갈 수도 있지만, 커다란 일이 아니라면, 내가 직접 걸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직접 한 발 한 발 걷지 않으면, 절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삶도, 숲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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