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6월 11일.

 

* 급격히 상승된 불안증으로 참석하지 못하여, 9, 10화는 개인적인 숲의 기억을 남기도록 하겠습니다. 

 

아카시아 킬러.

초등학교 때 지하철 타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 사람들이 우르르 타서 문이 철컥 닫히고 나면, 앉을 사람들이 오밀조밀하게 앉고 내릴 곳이 도래할 때까지 멍하니 앞을 바라보거나 이어폰을 끼고 노래를 들었다. 신문을 대문짝만 하게 펼쳐 든 아저씨도 있었고, 빈 옆자리에 글자를 쓰는 하릴없는 사람도 있었다. 그 당시 의자는 대구 지하철 참사 이전이라 불에 잘 타는 카펫 소재여서 글자를 쓰면 이리저리 짧은 모 끝이 휘며 글자 모양이 보이곤 했다. 

나는 누구보다 지하철을 빨리 혼자 타 보고 싶었다. 짜증을 내다시피 해서, 

“내 나이에 지하철도 못 타는 애는 나밖에 없어!” 작전을 펼쳤다. 

부모님의 조급증을 일으키는 문장이었고, 단박에 성공했다. 지하철을 혼자 타도록 허락을 받은 것이다. 사실은 혼자가 아니었다. 어린 마음속엔 어마어마한 프로젝트가 꿈틀거렸는데, 도봉산까지 지하철을 타고 가서, 봉사활동 시간도 채우고, 냇가에서 노는 것이 목표였다. 

지하철 역 이름은 멀고 먼데 왜 지어 놓은 걸까? 가까운 곳의 이름을 붙여 놓은 곳이 도대체 있을까? 도봉산역은 내려서도 한참 걸어서 올라가야 도봉산이 나타났고, 안내소에 가서 봉사활동을 하러 왔다고 했더니 주춤, 난감해하다가 두 눈이 번쩍 했다. 분명 두 눈에 ‘번쩍’하는 것이 있었다. 그리고는 삽자루와 가위와 커다란 검은 봉지를 쥐어 주었다. 그리고 앞에 있는 것을 가리키면서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이거 이름이 아카시아야. 얘를 잘라오는 게 너희가 할 일이야. 잔가시가 있어서 조심해. 이게 우리 산에서 가장 골칫거리야. 뿌리째 뽑아오는 게 제일 좋아. 여기 가득 채워 와.” 

 

 

이제는 나도 잘 알고 있다. 아카시아는 번식력도 좋고, 속성수라서 여름 한철 얼마나 빨리 많이 자라는지. 관리자 입장에서 깊게 뿌리내리며 빠르게 자라버리는 아카시아를 귀찮게 봉사활동 온 아이들과 한 묶음으로 묶어버린 자신을 얼마나 기특하게 생각했을지. 돌이켜 생각해 보면 얄밉기도 하다. 

꽤나 성실한 나는 여기저기 쓸려 가며 아카시아를 자르고, 뽑고, 담았다. 우악스러운 나무는 살고자 했을 테고, 그보다 더 우악스러웠던 나는 그게 최고의 봉사인 줄로만 알고 최선을 다해 나무를 뽑았다. 그 앞뒤 사정은 모른 채 아카시아가 산의 불청객이라고만 여겼고, 아카시아 사정은 들어 볼 새도 없이 뽑고 자르고, 담고 잘랐다. 아카시아 나무는 엄마가 산길을 지나다가 툭 꺾어서, ‘좋다. 싫다. 좋다. 싫다.’ 하며 잎 하나씩을 떼어 운을 보던 나무였다. 처음엔 못 알아봤는데 끝날 때에야 ‘어라.’하고 어린 나에게도 추억이 새록새록 해서 미안해졌다. 

 

그렇게 얼레벌레 봉사활동을 마치고, 본격적인 냇가놀이를 시작했다. 어쩌자고 여벌 옷도 가지고 가지 않았을까. 그 나이 때는 다 그렇게 치밀하지 못했겠지. 아무 생각도 없이 한여름에 풍덩 하고 목까지 오는 냇가에 들어가 물장난을 쳤다. 친구들은 봐줄 생각이 없었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치열한 물 격투 끝에 체력도 시간도 너덜너덜해진 그쯤, 우리는 옷 여기저기를 쥐어짜며 산을 천천히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에, 어른들이 한 두 마디씩 보태며 우리를 놀리던 것이 생각난다. 그때는 무지하게 창피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예쁨 받았구나 하고 살며시 웃음 짓게 된다. 

아이들의 몸에서 나는 열기와 산에서 시작된 쌀쌀한 냉기가 만나 옷은 빠르게 말랐다. 작은 닭살들이 호르륵 팔다리를 타고 올라 다들 어깨를 잔뜩 오그리고 반대편 지하철에 탔다. 집으로 가는 길에 타오르는 노을을 보며 우리는 아쉬움을 나눴고, 곧 다시 오자며 전의를 다졌다. 아카시아에 쓸려 물장구에 불은 상처를 서로 돌봐주며 “으-, 아파!” 하면 같이 “아악!” 해 줬다.

몇 주에 한 번씩 여름 내내 도봉산에 아카시아 봉사활동을 간다는 핑계로 물장구를 치러 다녔고, 슬슬 발만 담가도 물이 차가워진 어느 날이 되어서야 봉사활동은 시간도 넘치고, 전의도 타오르지 않게 되었다. 

나에게 첫 숲은, 첫 지하철이고, 초등학교 아카시아와 봉사활동과, 냇물이었다. 그것들이 남긴 오감은 내게 지금도 과분하도록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그중 몇몇은 지금도 이름을 기억하고 있어, 꿈 속에서 부르곤 한다. 그들이, 내가 숲을 지금도 좋아하도록 해주고 있는 듯해서 어딘가 상상치도 못할 모습으로 살고 있을 그들이, 오늘 몫의 행복을 충분히 챙겨 행복하고, 평온하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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