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6월 4일

 

쓸모 있는 사람이 되는 것.

나는 아주 까불며 살았다. 이 문장에는 아주 많은 의미가 담겨 있는데, 특히 몸을 소중히 여기며 살지 않았다는 것도 의미한다. 어렸을 때는 몸이 날아다니니 그냥 그런대로 살았고, 20대 중후반부터는 우울증이 있어서 틈만 나면 자살 생각을 수시로 했다. 자살에 대한 생각은 아주 구체적이었고, 나만의 틀과 규칙이 있었다. 그렇기에 내 몸은 언제나 사라질 수 있는 존재였고, 그래야 했다. 나만 사라지면 해결될 일들이 너무도 많았다. 그리고 나는 너무도 명징히 알고 있었다. 이 세상 나 하나쯤 사라진다고 해서, 며칠 정지될 몇몇 사람을 빼고는 아주 잘 돌아간다는 것을. 어쩌면 더 잘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것도.

죽어 보자는 마음과 어디 한 번 마음잡고 살아 보자는 마음은 50대50. 50.1대 49.9. 49.9대50.1. 이런 식으로 매일 백 번씩 흔들렸다. 그러다 어떤 날은 70대 30인 날은 70이 나를 술을 마시게 하면, 30은 안간힘으로 나를 재워 버리기도 했다. 80대 20, 90대 10인 날은 엉엉 울고, 무서움에 두려움에 불안함에 가득 차서 나를 아무것도 못하게 만들었다. 그런 날은 어김없이 공황발작이 일어났고, 죽을 것 같은 고통 속에서 살고자 발버둥 쳤다. 고작 10이고 20인데, 그 10은, 20은… 최선을 다했다. 

 

마음속엔 두꺼운 껍질이 나 있었다.
마음속엔 두꺼운 껍질이 나 있었다.

 

나는 자해를 전혀 하지 않았고, 하지 않을 것이다. 자해는 나에게 어떤…, 반성과 후회의 자국을 줄 뿐 어떤 삶의 영향을 주지 못한다고 아주 어릴 적부터 분명히 깨달아왔다. 그런 내가 중학생 때 내 인생 딱 한 번, 어설픈 자해를 한 적이 있다. 엄마가 내가 퉁퉁거린다며 나를 따돌리고 방으로 들어가라고 한 뒤, 내 동생에게 반찬을 올려주며 둘이 밥을 먹었다. 나에게는 억겁 같은 시간이었는데, 엄마는 그렇게도 내 흉을, 오래도 동생에게 보았다. 싸가지가 없다는 둥, 저래서 정이 안 간다는 둥. 내 방에서 들릴락 말락 하는 크기의 소리였는데, 하도 눈치를 보며 살아온 나는 그 소리가 너무도 잘 들려서 고통스러웠다.

가위를 들었다. 그리고 어설프게 손목을 그었다. 피도 나지 않았다. 그저 따가웠다. 다시 한 번, 이번에는 세게 그었다. 피가 그은 선을 따라 송글송글 맺혔다. 속이 시원했다. 그저 손목을 가위로 그었을 뿐인데, 이렇게 속이 시원하다니. 그 와중에 내 방에 엄마가 들어올까 봐 얼른 손목을 감췄다. 휴지로 피를 닦아 내고, 구급함에 있던 붕대로 대충 두어 번 감았다. 

다음 날 아침, 같이 등교길을 다니던 친구에게 내 손목을 보여 줬다. 나는 친구가 ‘무슨 일 있었어?!’하며 물어봐 주길 기대했다. 그러나 친구의 반응은 정반대였다. 정말 동그랗게 놀란 눈으로, 나를 어이없게 바라보더니 그 길로 거의 뛰듯이 사라져버렸다. 반에서도 하루 종일 나에게 말을 붙이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온화한 가정에서 자란 그 친구가 처음 본, 자해 행위였을 것이다. 놀랐을 것이다. 가족 속에서 외롭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친구였다. 내 생각이 짧았다. 나는 철저히 더 외로워졌고, 그 뒤로 힘든 일이 생겨도 친구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건 내 사정이니까. 친구를 잃고 싶지는 않았다. 즐거운 일만 적당히 말하며, 적당히. 적당한 거리를 두며 사귀었다. 그것만이 내게 허락된 우정이었다. 

 

그래도, 어린 마음에 나는 자꾸 선한 마음만 생겨났다. 
그래도, 어린 마음에 나는 자꾸 선한 마음만 생겨났다. 

 

그때 알게 된 것이 장기기증이었다. 왜 였을까. 꼭 하고 싶었다. 그러나 미성년은 보호자의 동의가 꼭 필요했다. 그 사실을 알고 절망했다. 그런 부분에 예민한 부모님이 허락해 줄 리가 만무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지나 성인이 되어서, 주변에 사후장기기증을 신청했다는 글들이 올라올 때마다, ‘나도 해야지.’하는 생각과 동시에 ‘자살해도 기증할 장기가 남아 있나?’ 하는 암울한 생각이 스쳤다. 내 머릿속 생의 마감은 언제나 자살이었다. 

6월 4일, 조금 이른 시간 공원에 도착했는데 갑자기 장기기증이 번뜩 떠올랐다. 왜 였을까. 복잡할 것 같았지만, 우선 검색을 해서 휴대폰으로 사이트에 들어갔다. 휴대폰 본인 인증을 하고, 간단한 개인 정보를 집어넣고 나니, 무엇 무엇을 기증할 것인지 장기 목록이 나왔다. 

“죽고 나면 끌어안고 가서 뭐 하리, 쓸모 있다면 다 가져가세요.” 하는 마음으로 모두 체크했다. 등록 버튼을 누르고 나니, 끝. 정말 끝이 났다. 이 십 년을 쌓아 둔 나의 과제를 해냈다. 그리고 명상을 했다. 명상하는 과정에서 나의 오장육부가 느껴졌다. 어디 하나 완전히 멀쩡한 곳 없는 나의 몸. 이제 내가 죽고 나면 누군가 가져갈 수 있으니, 나만의 것도 아니었다. 공공재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주 잘 쓰고, 남에게 넘기고 가야지.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은 소중하게 생각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지금, 지금의 내가 20대 80인 지금의 내가 말이다. 

 

수많은 감정 중에 나는 ‘뿌듯해요’와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를 골랐다. 
수많은 감정 중에 나는 ‘뿌듯해요’와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를 골랐다. 

 

감정카드를 한층 더 심화해서 문장완성 카드까지 고르는 연습을 해 봤다. 수많은 감정을 나무마다 달아 놓으셨고, 사람들은 나무에서 자신의 감정을 찾았다. 나는 이 글에서의 감정을 간단히 공유했다. 내 속에서 검은 구렁이가 빠져나간 것 같았다. 늘, 자살이 내 등딱지에 붙은 집 같았던 내게, 이제는 조금 나를, 적어도 부품으로서의 나라도 소중히 여기는 연습을 시작해 볼까 한다. 

 

 

등딱지에 무거운 마음을 달고 살았던 내게, 이제는 누군가에게 나눠 줄 소중함을 갖고 산다고 생각하니 새삼 마음가짐이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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