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이성찬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인간관계에서 완벽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솔직히 완벽이란 말이 정말 우스운 소리이긴 하지만 인간관계에 하나씩 대응할 수 있는 매뉴얼이라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항상 주변 친구들을 보면 그들의 문제점과 장단점을 평하기에 바쁘고, 그들과의 친분도를 나누기 바쁩니다. 적당히만 친해질 친구를 나눠서 일부러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저와 소문이 안 좋은 친구 곁에서 선을 지켜 내 평판을 올리려는 무식한 행동도 그만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방법을 모르겠습니다. 계속 이렇게 살아왔기네 이게 정답인 듯 싶습니다. 사회에서는 다들 공과 사를 지키니 저도 이게 맞다고 보았습니다. 아직 사회생활을 하는 게 아닌 고등학생이지만, 제가 여태껏 만난 이들이 전부 다 제 인연은 아닌 것 같습니다. 성인이 된다면 연락을 다 끊어버리고 싶은 생각도 많습니다.

항상 어떠한 일이 닥치거나 미래의 일을 두려워하는 일도 그만하고 싶습니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가 깜깜하고 두렵습니다.

이건 조금 주제에서 벗어난 이야기입니다. 아버지가 술을 좋아하십니다. 굉장히 보수적이고 자기중심적에 다혈질입니다. 자기와 무언가 맞지 않다면 엄청나게 화를 냅니다. 어머니는 그에 반해 기분 나쁜 말을 들어도 항상 그냥 넘기거나 꿍해 계십니다. 현재 친할머님이랑 같이 살고 있는데 할머니도 정말 자기중심적으로 목소리도 크시고 아는 척을 많이 하십니다. 저는 중간에 껴서 할머니가 동생을 무시하는 것도 말리고, 아버지와 어머니 관계가 어느 정도 잘 흘러가게끔 하고, 어머니의 할머니 흉도 같이 봐 드립니다. 정말 머리가 터질 것 같습니다. 성인이 된다면 바로 나올 수 있게 집에서 가장 먼 대학들로만 진학할 생각입니다. 하지만 걱정되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남겨진 동생이 너무 불쌍합니다. 어쨌든 지금은 술을 마시고 들어와서 그게 자랑인 듯 당당한 아버지의 모습도, 항상 잘난 척하시고 말 많은 할머니와 그 흉을 보는 어머니의 편을 들어 주는 것도 너무 힘들고 죽겠습니다. 다 무시하고 살고 싶지만 아버지는 자기 엄마인 할머니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니 불쌍하고, 할머니도 살아온 세월이 그랬기에 이해되고, 어머니는 집에서 직계 가족이 없기에 제가 아니면 편이 없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그냥 상황을 다 무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너무 죄책감이 들고 힘듭니다. 그걸 무시밖에 못하는 제 인생이 너무 짜증나고, 이 시기에 이딴 고민을 하는 것도 너무 울분이 터집니다. 당장 가출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에요.

학교에서는 인간관계 때문에 어찌할 빠를 모르겠고 집에서는 눈치 보기 바쁩니다. 진짜 힘들어 죽겠습니다. 어떡하죠, 저는?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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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사연자님 안녕하세요, 글 잘 읽어 보았습니다. 대인관계에서 완벽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제목과 내용을 읽으며, 사연자님의 욕구가 무엇인지 생각했습니다. 아마 대인관계에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수준으로 유연하게 잘 대처하고 싶은 마음이 있으신 게 아닐까 합니다. 매뉴얼을 원하는 마음 이면에는 혼자 아등바등 고민하느라 많이 지치고 막막한 감정이 있는 듯합니다.

아직 고교생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관계를 맺는 친구와 가족의 성격, 장점, 단점을 파악하고 있다는 점은 놀랍습니다. 친분도가 어느 정도인지 대략의 숫자로 ‘느끼고’, 분류할 수 있는 섬세함을 갖추고 있습니다. 친구들 성격에 따라 선을 긋고 자기 평판을 올리려는 행동이 무식하다고 하셨는데요.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사실 굉장히 영리해야 할 수 있는 행동이죠. 친구들과의 관계를 하나하나 파악하고 조정하는 ‘통제’는 왜 하는 걸까요? 결과적으로는 사연자님의 피해나 상처를 최소화하기 위한 행동입니다. 이는 상당히 적응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타인과 선을 긋고, 소모적인 관계를 걸러낼 수 있는 단호함은 종종 필요합니다. 관계에서 거리 둘 수 있는 힘은 분명히 좋은 자원입니다. 다만 사연자님이 그동안 관계에 굉장한 에너지를 쓰느라 소진 상태에 다다른 것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사연자님의 행동을 ‘무식하다’고 비난하기 전에, 자신의 성격과 기질, 소망을 분명히 이해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사연자님의 이해를 돕기 위해 기질과 성격의 개념을 소개하겠습니다. 기질(Temperament)은 유전적으로 타고나서 일생동안 유지되는 것으로 인성 발달의 기본 틀이자 재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극에 대해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정서적 반응 성향을 의미합니다. 성격(Character)은 환경과 상호작용하며 성장하는 과정에서 후천적으로 습득된 특성입니다. TCI(Temperament and Character Inventory)라는 기질 및 성격 검사가 대중적이고 유명한데요. 클로닌저(C.Cloninger)의 심리생물학적 인성모델에 기초하여 개발된 검사입니다. 기질은 네 가지 차원, 성격은 세 가지 차원으로 분류하는데 다 설명하지 않고, 이 중 ‘사회적 민감성(Reward Dependence)’ 기질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사회적 민감성대인관계에서 타인이 보이는 사회적인 신호(표정, 목소리톤, 비난, 칭찬 등)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경향성입니다. 사회적 민감성이 높은 사람들은 상대방의 변화를 섬세하게 파악할 수 있고, 이에 따라 자신의 반응을 유연하게 조절합니다. 타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는 자동적인 노력을 기울이다 보니, 자신의 욕구가 뒤에 밀리는 경우가 일어납니다. 양육자의 기대를 빠르게 눈치채고 이에 맞춰 반응하다 보니, 유순한 자녀로 성장하기 쉽습니다. 타인에게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으니 잘 융화하지만 그만큼 타인에게 영향을 많이 받는 것을 허용한다는 점에서, ‘정서적인 거리 조절’이 아주 중요한 과제가 됩니다. 

설명을 보면 사연자님의 모습과 많이 닮아 있다고 생각이 들 겁니다. 가족 이야기도 꺼내셨는데요. 앞서 말한 친구 관계와 연결되는 중요한 현상이 있습니다. 사연자님의 가족 관계에서는 오히려 친구들과는 가능한 ‘거리 조절’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극단의 모습을 보인다는 겁니다. 사연자님은 놀랍게도 아버지, 어머니, 할머니, 동생까지, 가족 구성원 네 명의 마음을 전부 헤아리고 있습니다. 정말 섬세하고 공감 능력이 뛰어나신 분이라고 봅니다. 그러니 얼마나 가족 관계에서 피곤하실까 싶습니다. 사연자님의 가족 체제가 큰 갈등이 촉발되지 않도록 잘 유지되게끔 가족 상담자 역할을 맡고 계시니까요. 

그렇지만 사연자님은 자신의 경계를 보호하지 못하고, 가족 구성원들의 세계에 과도하게 개입하고 있습니다. 거리 조절이 안 되고 정서적으로 돌보고 눈치를 보느라 과도한 에너지를 써 왔습니다. 스트레스를 극심히 느끼는 것이 당연합니다. 통제가 어려운 갈등 상황에서 무력감도 많이 느껴 왔습니다. 아마 이에 대해 균형을 맞추기 위한 무의식적인 대처로서, 친구 관계에서 극단의 효율 추구, 대인관계를 통제하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고 봅니다. 다시 말하면 가족 관계가 주는 무력감과 소진감이 너무 커서, 일반적인 관계에서 통제하고 효율을 따지며 자신의 에너지를 조절하는 중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듯합니다. 

최근 에너지가 소진되어서 다 무시하고 있다고 하셨는데요, 아주 잘하신 겁니다. 타인에게 쓸 수 있는 에너지의 양은 애초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걸 다 썼으니 신경을 거두는 것이 당연합니다. 죄책감을 가질 일이 아닙니다. 이기적이라며 스스로 몰아세우지 마세요. 가족 구성원 모두의 삶에 관여하는 것은 애초에 사연자님이 감당할 역할이 아님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이제까지 가족이 그나마 평화롭게끔 유지해온 노력 자체는 인정하되, 이로 인해 사연자님이 겪는 피해 역시 분명히 파악하고 인정해야 합니다. 건강한 자존감은 타인이 원하는 것을 채워주면서 자기 욕구를 등한시하는 행동으로는 발달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 사연자님은 자기 욕구를 명료하게 인식하고 표현해야 합니다. 모두를 배려하는 ‘착한 아이’ 역할을 오래 맡아 오셨습니다만, 이제는 다른 역할도 연습할 때가 왔습니다.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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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앞으로도 사회적 민감성의 기질이 자동적으로 발휘되는 순간이 많을 겁니다. 사연자님의 기질과 그동안 기울인 노력과 대처방식은 아주 훌륭한 역량입니다. 다만 이를 건강한 관계에서 발휘하셔야 사연자님도 충전되고 보상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의 가족 관계에 지나치게 관여하는 행동은 자신의 진정한 욕구보다 타인의 욕구를 우선으로 두게 되면서 장기적으로는 억울함, 분노, 박탈감을 쌓게 됩니다.

물리적인 거리 조절은 꼭 하셔야겠지만, 당장은 어려우니 심리적인 거리 조절이 필요합니다. 이제와는 다르게 반응하는 걸 연습하세요. 장단 맞추는 횟수, 흉을 보실 때 맞장구를 치는 리액션도 줄이세요. 할머니와 어머니에게도 ‘요새 많이 신경쓰느라 피곤해서 잘 들어드리기가 힘들다’고 솔직하게 표현해 보세요. ‘동생에게 그렇게 말하시면 상처받아요. 듣는 저도 힘들어요’ 이렇게 말하셔도 괜찮습니다. 상대방의 부정적인 반응을 미리 짐작하기 전에 일단 내 표현부터 던져 보는 연습을 하셔야 합니다. 

가족들을 위해 쏟았던 배려를 거두고 자기 욕구에 따라 행동하면 가족들이 낯설어하거나 비난할 수 있습니다. 그분들은 그분들의 성격대로 변함없이 행동할 뿐입니다. 자연스러운 모습입니다. 원래대로 행동하라는 무언의 압박과 비난에 반응하며 자기 이야기로 삼키지 마세요. 사연자님이 가족에 대해 아는 것에 비해 가족들은 사연자님에 대해 지나치게 잘 모릅니다. 사연자님이 오랫동안 고통받는 것을 전혀 눈치 못 채신 걸 보면 말이죠.

그러니 사연자님을 잘 모르고 던지는 가족들의 판단이나 평가는 신뢰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아무리 가까워도 타인의 말들 중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적당히 필터링해야 합니다. 지금의 사연자님을 제대로 이해하고 평가할 사람은 자신뿐이라는 것을 기억하세요. 지금은 누구보다 타인에게 쏟은 에너지를 회수하여 자신과의 관계를 구축하는 에너지로 쓰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가족의 어려움을 못 본 척하는 이기적인 사람’이 아니라 ‘자기 욕구를 챙기려는 노력을 시작한 사람’이라고 건강하게 정의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게다가 타인을 신경쓰고 돌보는 행동이 책임감이 강한 것처럼 보이지만, 지나치게 되면 실상은 전혀 아니게 됩니다. 오히려 무책임한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가장 크게 책임질 대상은 타인이 아니라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나 없으면 안 돼’라는 걱정은 내려놓으세요. 사연자님이 없으면 없는 상황에 각자 적응할 수 있을 거라 믿고 내버려두는 마음도 필요합니다. 앞으로 자기에게 중요한 욕구를 중심으로 살 때, 막연한 불안들도 일정 수준 줄어들 수 있을 겁니다. 혼자 다 감당하지 말고, 학교 상담사와 상담을 받으며 도움을 받으셔도 좋겠습니다. 사연자님께서 타인보다 자신을 ‘먼저’ 세심히 돌보고 책임지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당산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이성찬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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