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정신건강의학과 정희주 전문의

 

사연) 안녕하세요, 청년기까지는 주변인들이 힘들어할 정도로 감정 기복이 심하고 예민했었습니다. 그러던 중 일련의 사건(누명으로 인한 강압 수사 등-현재는 해결된 상황)을 겪으며, 모든 인간은 어리석고 멍청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으며, 그 이후로 부정적인 감정의 문은 닫는 법까지 터득했습니다.

사회활동이나 인간관계를 위해 대화를 할 때엔 상대방이 원하는 식으로 맞춰서 해 주지만 저는 별다른 감정은 없습니다. 상대방의 고통, 감정을 가늠할 수 없는 것인데 위로의 말을 주고받는 것 따위는 가식적이고 불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고통은 나누면 두 배라는 생각도 들고요.

저는 내면의 어두운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굉장히 힘들고 고통스럽습니다. 어두운 부분을 굳이 끄집어내어 수면 위로 올리는 행위를 이해할 수가 없어 즐거운 생각만 하며 살고 싶은데, 저의 부정적인 감정들이 누적되어 곪아터질 것을 주변에서 걱정해 주 고있습니다. 저에게 좀 더 솔직한 인간관계를 원하기도 하고요.

슬프고 힘든 감정은 감당하기 힘들고 불필요한 것이라 판단하여 스스로 표현을 절제하게 되었고, 그것이 저와 주변인에게도 좋지 않나 생각하지만, 주변에서는 하나같이 감정 표현과 공감, 소통 방법에 대한 개선을 요구합니다.

최근 코로나 확진으로 고생했을 때, 가족도 아닌 타인이 저를 걱정하는 모습을 보며 고마운 마음과 동시에 어떻게 타인을 걱정하며 저렇게 눈물을 흘릴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문제라는것은 어차피 본인이 해결해야 하는 것인데, 힘들 때 타인에게 기대거나 함께 고통을 나누는 것이 왜 필요한지 이해가 되지 않으며 공감도 안 됩니다. 기쁘고 즐거움만 공유하며 살면 안 되는 걸까요? 이렇게 굳어져 버린 제 성격이나 습관이 장기적으로 봤을 때 문제가 되는 부분일까요?

 

사진_ freepik
사진_ freepik

답변)  안녕하세요 사연자님. 올려주신 고민 잘 읽어 보았습니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있네요. 힘겨운 사건을 겪은 이후에는 특히나 고통스러운 감정을 드러내기 어려워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먼저 감정의 역할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감정은 빠르게 발생하며 강렬한 경험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감정 자체에만 주목할 뿐 감정이 수행하는 기능은 놓치는 경우가 흔합니다. 하지만 감정은 인류가 지금까지 생존할 수 있게 한 진화의 유산이며, 현대인이 삶을 영위하는 데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간략히 설명하면 감정은 아래와 같은 세 가지 기능이 있습니다.

첫째, 감정은 어떤 행동을 하도록 동기를 부여하고 조직화합니다. 특히 즉각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해야 하는 경우에 핵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등산 중에 뱀을 발견했을 때 두려움을 느끼고 도망갈 준비를 하는 것을 하나의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둘째, 감정은 우리 자신과 의사소통하게 합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욕구와 목표가 무엇인지, 지금 상황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직감적으로 판단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셋째, 감정은 일종의 신호이며, 감정을 통해 타인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분노의 감정은 상대방에게 더 이상 나의 권리를 침해하지 말라는 경고의 신호를 보냅니다. 슬픔은 무언가를 상실한 이후에 내면을 재조직하는 과정에 있으니 위로와 격려를 보내 달라고 말합니다. 

 

감정의 기능에 주목한다면 사연자님이 말씀하신 긍정적 감정, 부정적 감정은 올바른 분류가 아닐 수 있습니다. 감정은 단지 나에게 필요한 기능을 수행할 뿐이니까요. 감정은 없애거나 억압하려고 하기보다는 효율적으로 이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연자분은 특히 감정의 의사소통 기능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감정은 논리적인 의견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알려주기 때문에 감정의 적절한 표현은 인간관계의 필수 요소입니다. 나에 대한 많은 정보를 알려주는 감정을 억제한 상태로 타인과 교류한다면 자연스레 그 관계의 깊이가 줄어들게 될 것입니다. 

특히나 부정적이라고 여겨지는 감정은 관계를 돈독히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만일 내가 누군가에게 거절당해 슬프다고 이야기한다면, 이는 상대방에게 나의 약점을 내보이는 행동입니다. 이야기를 듣는 청자는 이 사람이 그만큼 자신을 신뢰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자연스레 위로의 말을 건네게 될 것입니다. 위로받는 나 역시 약점을 보였음에도 자신을 위로하는 상대방을 더욱 신뢰하게 됩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위험을 감수하고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며 깊은 관계를 만들어 갑니다. 고통스러운 감정을 공유하는 것은 위험하지만, 그만큼 가치 있는 행동입니다.

사연자분은 고통이 아닌 기쁜 감정만을 나누고 싶다고 하였는데, 안타깝게도 많은 감정 중 고통스러운 감정만 따로 떼어 내 조절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부정적 감정을 표현하지 않으려다 긍정적 감정 역시 표현하기 어려워지는 경우가 흔한데 이는 감정표현불능증이라는 병리적 상황을 초래합니다.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며 상호작용하는 정도는 모든 감정에 동일하게 적용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혹시 인간관계에서 고통 없이 오직 기쁨만을 표현하는 사람이 주변에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 사람이 표현하는 기쁨은 무언가 비어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될 것입니다. 

 

표현되지 않는 감정은 사라지지 않고 억제될 뿐입니다. 그러니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모든 감정은 정확히 인식되고 적절하게 표현돼야 합니다. 글쓴이분이 특별히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이 있다면, 오히려 대면하고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표현된 것보다 표현되지 않은 것이 나에 대한 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을 테니까요. 그렇게 어려운 감정에 익숙해지고 능숙히 다룰 수 있게 되면 삶에 더 큰 만족감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서울역 마음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정희주 원장

정희주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서울역 마음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건국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졸업
한양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전)성동구 정신건강복지센터 상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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