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김인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A: 내가 항상 너한테 맞춰 줬잖아!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가 있어?

B: 뭐? 네가 싫은 게 있었으면 그때 말을 했었어야지! 네가 아무 말도 안 해서 나는 괜찮은 줄 알았지!

A: 너 만날 찌개, 국 들어간 음식 먹고 싶다고 해서 나는 별로 먹고 싶지 않은데도 같이 먹어 줬잖아!

B: 너도 시키면 다 먹었고 싫다는 말도 안 했잖아! 맛있게 다 먹고 나서 지금 와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연인이나 친구 사이에 흔히 있을 법한 대화입니다. 다른 사람의 기분을 맞춰 주려고 항상 노력했다가 상대방에게 고맙다는 이야기도 못 듣고 오히려 ‘누가 너더러 그러라고 했어?’라는 식의 핀잔을 들어 억울한 적이 있지 않으신가요? 이렇게 둘 사이에서 서로 표현하거나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 쌓여 감정싸움이 되어 버리는 것은 드물지 않습니다.

위의 대화에서 A의 의도는 선했습니다. 상대방을 공감해주고 배려하려는 의도는 좋았으나 자신과 상대의 경계를 구분하지 못했다는 점이 아쉽습니다. A는 상대에게 맞춰 주지 못하면 자기 잘못이라고 생각하며 죄책감을 느꼈기 때문에 계속 B에게 맞춰 주었던 것인데, 이는 자기가 책임지지 않아도 될 상대방의 감정까지 책임지는 일입니다. 이런 특징을 가진 사람들은 주로 동정심이 많고 타인을 도와주려는 선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의 기대, 판단 또는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청소년의 경우 자기도 모르게 부모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경우가 해당합니다. 이런 경우의 안타까운 점은 공부를 100점 맞다가 70점을 맞았을 때 부모가 실망하면 자기가 잘못해서 부모님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는 죄책감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서로 간의 감정을 건강하게 나누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경향은 자신의 주장이나 감정 표현을 비교적 삼가는 동양권에서 많이 나타납니다. 사회 초년생이나 여성 등 자신의 기분이나 바람보다는 상대의 기분에 더 신경 써야 하는 사회적 약자들에게서 많이 나타나고, 감정 교류가 많고 일상을 많이 공유하는 연인이나 가족과 같은 친밀한 사이에서도 감정의 책임을 느끼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상황에 대한 책임이 외부 요인보다는 자신에게 있다고 여겨 ‘내 탓이오’라고 생각하게 되는 내적 귀인을 하는 사람들에게서도 많이 나타납니다.

동정심이 많고 섬세하며, 거절하기 어려워하고, 다른 사람을 즐겁게 하는 것이나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에서 보람을 느끼는 사람, 또 자신은 가지고 있으나 남들은 가지지 못한 것에 책임감이나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상대의 감정을 자신도 모르게 책임지려고 하는 경향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감정을 다루는 일에 매우 능숙해서 서로 상처 주지 않거나 상처받지 않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많은 경우 우리는 본래의 의도와 달리 미숙한 감정 때문에 오해를 사곤 합니다. 감정의 발달단계에 대해 좀 더 많은 이해가 가능하다면, 성숙한 인간관계를 맺어 나가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사진_ freepik
사진_ freepik

임상심리학자 Marshall Rosenberg는 감정의 발달을 다음과 같이 3단계로 나누었습니다.

 

1단계: 정서적 노예 상태(Emotional slavery)

감정 발달의 첫 단계는 정서적 노예 상태입니다. 이 단계에서는 다른 사람이 느끼는 감정에 대해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상대가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으면 그 상황에 대해 내 책임이라는 책임감을 느끼면서 상황을 나아지게 하기 위해 뭔가 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기가 쉽습니다.

정서적 노예 상태에 있는 경우 사랑과 인정을 받기 위해서 자신의 본모습을 감추려고 합니다. 항상 남에게 신경 쓰는 나머지 자신의 욕구는 포기하고 돌보지 않으므로 상대의 욕구만을 중요하게 여기면서 피해 의식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가장 중요하고 가까운 사람들이 오히려 더 부담스럽게 느껴집니다.

 

2단계: 얄미운 단계(Obnoxious stage)

감정 발달의 두 번째인 얄미운 단계는 자신의 욕구를 잘 돌보지 않고 무시하며 살았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 분노를 느끼는 단계입니다. 다른 사람의 느낌에 대해 자기에게 책임이 없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지만, 자기 욕구만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어 다른 사람의 느낌이나 욕구에 대해 아직 배려하지 못하는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각자의 인생은 각자가 책임지는 거야. 그건 네 문제고, 네가 어떻게 느끼든 난 아무 책임이 없어.’와 같은 말을 하게 되어 주위 사람들이 그 사람을 얄밉게 생각하여 대인관계에서 갈등을 일으키기도 하는 단계입니다. 이 얄미운 단계는 3단계로 넘어가기 위해 꼭 필요한 단계입니다.

 

3단계: 감정적 해방 단계(Emotional liberation)

감정적 해방 단계는 다른 사람이 희생한 대가로 자신의 욕구를 충족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는 단계입니다. 이 단계에 속하는 사람은 우리가 모두 연결되어 상호 의존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욕구뿐만 아니라, 상대나 단체의 욕구도 동등하게 중요하게 여기고 존중합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분명하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감정적 해방 단계에 도달하면 다른 사람들의 욕구에 대해서 연민을 느끼고 두려움, 죄의식, 수치심에 따라 행동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감정 발달의 3단계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다른 사람의 감정에 책임감을 느끼는 이들은 1단계에 머물러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관계의 종류에 따라 머무는 단계가 다를 수도 있습니다. 사회적 관계에서 3단계에 있지만, 연인 관계에서는 1단계에 머무를 수도 있고, 같은 상대방이라도 상황에 따라 1~3단계를 넘나들 수 있으니 주로 어떤 방식으로 상황을 지각하는지 살펴보면 자신의 단계를 알 수 있습니다.

혹자는 2단계인 얄미운 단계가 왜 1단계보다 성숙한 단계인지 궁금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미성숙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얄밉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것 아닐까? 하고 말이지요. 하지만 ‘성숙해지는 과정’은 ‘자기만의 기준을 찾아가는 과정’이라는 뜻에서 1단계보다 2단계가 더 건강한 편에 속합니다. 건강한 관계는 ‘내 경계’를 먼저 설정하고 ‘상대방의 경계’를 안 후에 ‘서로 조정’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감정 성숙의 단계 - 2편’에서는 감정이 성숙한 사람들의 대인관계에는 어떤 특징이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당신의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김인수 원장

김인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당신의숲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서울아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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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때 선생님 글을 만났더라면 좀더 빨리 우울감에서 헤어나올 수 있지 않았을까?"
    "글 내용이 너무 좋아 응원합니다. 사소한 관계의 행복이 회복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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