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하지 않으면 후회만 남는다

<이호선의 가족의 심리학(16)> 사랑할 시간이 그리 많은 건 아니다 

-표현하지 않으면 후회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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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의학신문: 서대문 봄 정신건강의학과 이호선 정신과 전문의]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슬픔에 겨워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어 병원을 찾는 사람들이 있다. 대개 갑작스러운 사고 또는 질병으로 부모나 배우자나 자녀가 일찍 세상을 떠난 경우다. 이럴 때 쉽사리 가족의 죽음을 인정하거나 받아들이기 어렵다. 비애와 쓸쓸함, 분노와 허탈감이 파도처럼 밀려든다.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 도저히 일상으로 돌아가기가 힘들다.


충격이야 매한가지겠지만, 유족이 처한 상황을 들여다보면 보통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고인과 가족 사이에 사랑이 넘쳐흘렀고, 가정 분위기가 화기애애했으며, 서로에게 충분히 애정을 표현했고, 아름다운 추억을 많이 쌓은 경우다. 이럴 때는 세상을 떠난 가족에게 더 잘해주지 못한 데 대한 후회나 가책보다는 그토록 사랑하던 사람이 갑자기 나를 떠나갔다는 상실감과 앞으로 남은 시간을 그와 함께할 수 없게 되었다는 허망함이 더 크다.
유일한 가족이자 친구이면서 소울메이트였던 사랑하는 남편 빌이 전혀 예상치 못하게 세상을 떠난 후 바닥까지 고꾸라진 자신의 마음을 추적한 책 『상실의 언어(원제: Languages of Loss)』에서 빌의 아내였던 사샤 베이츠는 자신이 겪은 처절한 고통을 이렇게 기록했다.


“‘상실 지향성 스트레스 요인’은 잃어버린 것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추억, 고인과의 소통, 그리움 등을 말한다. 내 경우 거의 모든 것이 이런 스트레스 요인이 될 수 있었다. 우리가 즐겨 찾던 카페를 지나치는 일, 빌이 보고 싶어 했던 연극과 영화의 개막이나 개봉을 알리는 이메일, 특정한 음악을 듣거나 식당에서 (빌이 항상 그랬듯) 와인 대신 수제 맥주를 찾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는 일도. 빌에 대한 그리움과 너무나 달라져 버린 내 삶을 상기시키는 고통스러운 추억들이 끝도 없이 밀려왔다. 일상에서 이런 추억들에 부딪히다 보면 마치 수천 번 종이에 베여 죽어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또 하나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고인과 가족 사이에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적었고, 서로에게 충분히 애정을 표현하지 못했으며, 가정 분위기는 냉랭했고, 이렇다 할 추억을 쌓을 기회가 없었던 경우다. 이럴 때는 세상을 떠난 가족에게 뭐 하나 제대로 해준 게 없다는 죄책감과 앞으로 이를 만회하거나 회복할 기회가 없다는 데 대한 절망감이 뼛속 깊이 사무친다. 남은 가족이 느끼는 후회와 가책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중압감으로 자신을 억누른다.


형편이 좋지 않아 반지하 전셋집에서 맞벌이하며 외동딸을 키우는 부부가 있었다. 남편은 지방으로 발령이 나 어쩔 수 없이 주말부부가 되었다. 중학생 딸과 여행도 다니고, 같이 영화도 보고, 맛집을 찾아 외식도 하고 싶었지만, 너무 바쁜데다 여유도 없었다. 딸이 대학생이 되기 전에 내 집을 마련하겠다는 목표로 허리띠를 졸라매며 살았다. 딸에게는 미안한 마음뿐이었으나 조금만 더 참으면 좋은 날이 오리라 생각하며 서로 참고 견디자고 위로했다.


그런데 어느 날 하굣길에 딸이 신호를 무시하고 달리던 자동차에 치여 그만 목숨을 잃었다. 청천벽력이었다. 부부는 그대로 맥없이 무너졌다. 인생의 목적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내가 누구를 위해 밤낮없이 일하며 달려왔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이럴 줄 알았으면 회사 때려치우고 같이 여행이나 다닐 걸, 그 좋아하는 영화 한 편 같이 못 보고, 사달라는 피자 한 번 배불리 못 먹이고...... 아, 이 죄를 어찌 다 갚을지.......”
딸의 영정 사진을 붙들고 오열하는 아빠의 모습은 차마 볼 수 없는 극한의 처연함이었다.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으로 인한 심리적 충격은 실로 엄청나다. 특히 동고동락을 함께한 배우자와의 사별이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자녀와의 이별에서 오는 고통과 슬픔은 헤아릴 수 없이 크고 깊다. 주로 나타나는 증상은 내가 좀 더 잘해주지 못했다는 죄책감, 죽음 자체에 대한 부정, 죽음을 불러온 원인에 대한 분노, 끊임없이 이어지는 비애감 등이다.


“다 내 잘못이야. 내가 좀 더 잘해줬더라면 절대 죽지 않았을 텐데.......”
“아냐, 죽지 않았을 거야. 나를 두고 혼자 떠날 리가 없어. 결코 그럴 사람이 아니야.”

이런 증세가 계속되면 우울증, 불안감, 불면증, 대인기피증 등이 나타나면서 심각한 정신적 고통을 겪게 된다. 이를 당연한 슬픔이라 여기고 가볍게 생각하면 증상이 악화할 수 있다. 몇 달 정도 애도 기간이 이어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1년 이상 증상이 이어지는 사례도 있다. 이럴 때는 반드시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하다.


증상이 아주 심하면 복합 비애(Complicated Grief, 사별 후 나타나는 정상적인 애도 과정을 벗어나 지속적인 심리적, 신체적 부적응을 일으키는 과도한 비애 반응) 또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 생명을 위협할 정도의 극심한 스트레스를 경험하고 나서 발생하는 심리적 반응)로 발전할 수 있다. 극한의 슬픔을 참지 못해 극단적 선택을 하는 사람까지도 있다.


흔히 “있을 때 잘해.”라는 말을 하곤 한다. 언제 못 보게 될지 모르니 볼 수 있을 때 더 잘하라는 의미로 하는 말이다. 살다 보면 이 말이 우스갯소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이 언제 내 곁을 떠나갈지 아무도 모른다. 기꺼이 내 생명을 바쳐도 아깝지 않은 아내가, 세상에서 오직 나만을 지극정성으로 사랑하는 남편이, 늘 내 편이 되어주는 아빠가, 맛있는 것만 있으면 내 생각부터 하는 엄마가, 나를 쏙 빼닮아 볼 때마다 신기한 잘생긴 아들이, 시집가지 말고 영원히 내 옆에서 살았으면 하고 바라는 예쁜 딸이 어느 날 갑자기 한마디 인사도 없이, 편지 한 통 남기지 않은 채 홀연히 사라져버릴 수도 있다. 언젠가 잘해주겠다면서 미뤄둔 미래는 영영 오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경기도 벽제와 용미리 등에는 서울시 시설관리공단에서 운영하는 납골 시설이 있다. 이곳을 찾는 유족들이 고인을 추모하는 글을 남길 수 있도록 ‘고인에게 쓰는 편지’라는 노트를 비치한 적 있다. 여기에 적힌 편지 3,500여 통 가운데 193편을 추려 엮은 책이 『눈물의 편지』다. 먼저 간 남편과 아내에게, 그리운 아빠 엄마에게, 눈에 밟히는 아이들에게 가슴으로 써 내려간 편지 한 통 한 통에는 눈물 없이 읽을 수 없는 애절한 사연들이 가득하다.


“여보, 당신이 너무도 보고 싶어서 달려왔어요. 나 좀 바라보아 주어요. 그냥 바라
보기만 해줘도 좋아요. 아무 말 안 해도 좋아요. 마음은 항상 내 곁에 있지만, 당신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 사무치도록 애타게 보고 싶고 그리운 마음을 어떻게 보여드
릴까요.”


“밤잠을 못 자고 밤하늘의 별을 쳐다보며 집을 나서며 졸려서 눈이 안 떨어져 애쓰는 당신의 모습은 너무 안타까웠어요. 우리는 너무 힘들고 고달프게 살았어요. 지나간 날들이 너무 후회스럽고 원망스러워요. 다시 태어나면 후회 없이 잘 살 수 있을까요?”

“아버지! 며칠 전에 꿈속에서 쇠고기죽 한 그릇만 달라고 하셨는데, 제가 안 드려서 삐치시던 게 생각납니다. 그날따라 어머니께서 많이 아프셔서 제가 죽을 끓인 걸 아셨는지 꿈에 나타나시기까지 하시고...... 아침에 아버님께 새로 만든 죽을 한 그릇 해서 사진 앞에 드렸는데, 많이 드시고 가셨는지요?”

“늘 지나고 나서 후회하며 사는 것이 사람인가 봅니다. 멋진 슈트를 볼 때면 아빠 생신 때 저걸 사 드릴 걸...... 하고, 맛있는 걸 먹을 때면 아빠랑 여기 한 번 올 걸...... 하고, 재밌는 영화를 볼 때면 아빠 손잡고 극장 한 번 와 볼 걸...... 하고, 이젠 오지 않는 아빠의 전화를 기다리면서는 진작에 내가 더 자주 전화를 드릴 걸...... 그렇게 후회하곤 합니다.”


“엄마에게 하고 싶은 말 많이 있는데...... 엄마 눈동자 보며 많은 얘기 나누고 싶은데, 그러지 못한 게 참 슬프고 외롭다. 요즘 따라 엄마 생각 많이 난다. 엄마와 지내왔던 일, 꾸중 들었던 일, 칭찬받던 일...... 엄마, 너무 보고 싶다.”


“오늘은 엄마가 좋아하는 홍시를 사 가지고 왔어. 엄마 홍시 참 좋아하잖아. 늘 사오고 싶었는데, 냉동 감은 맛이 없잖아. 그래서 곡식이 잘 익어가는 이 가을 홍시가 그래도 맛이 최고지. 오늘만큼은 울지 않을 거라 했는데, 오늘도 엄마 속상하게 눈물을 보이고 말았어.” 


“오늘은 비가 많이 오는구나. 넌 특히 비가 오는 날이면 나와 커피 한 잔 마시면서 추억에 젖곤 했지. 오늘 네 올케가 맛있게 커피를 타서 네 앞에 한 잔 놓았단다. 언제나 내 곁에 있는 너지만 체취는 느낄 수가 없구나. 사랑하는 내 딸아, 잘 있거라.”

 

“오늘이 너의 생일이란다. 네가 하늘나라에 간 지 1년 반이 되었지만, 아직도 엄마 아빠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 집에 있으면 문 열고 은행 다녀왔습니다, 할 것 같고, 전화 소리만 울리면 아빠, 하고 나를 찾는 것만 같다. 엄마 아빠는 죽을 때까지 너를 잊지 못할 것 같다.”

 

편지를 쓴 사람도, 받는 사람도 다 다르지만, 한결같이 안타깝고 절절한 가족애가 표현된 편지들이다. 이들은 사랑하는 가족이 그렇게 빨리 자신들 곁을 떠날 줄 몰랐다고 말한다. 사랑할 시간이 앞으로도 많이 남아 있을 줄 알았다고 고백한다. 나중에 충분히 잘해주고 만회할 기회가 올 줄로 믿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런 시간은 오지 않았고, 그런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그럴 줄 알았으면 좀 더 다정한 말을 건네고, 좀 더 웃는 얼굴을 보여주고, 좀 더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고, 좀 더 진솔하게 마음을 드러내고, 좀 더 맛있는 거 해먹이고, 좀 더 좋은 옷 사 입히고, 좀 더 멋진 곳으로 여행을 떠나고, 좀 더 많이 사랑할 걸 그랬다고. 미루지 말고 즉시 표현하고 행동할 걸 그랬다고.

사랑은 표현하는 것이다. 사랑은 행동하는 것이다. 표현하지 않는 사랑, 행동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표현하고 행동해야 할 시점은 바로 지금이다. 나중으로 미루면 그 나중이 언제 올지 모른다. 미래가 중요한 게 아니다. 현재가 가장 중요하다. 인생이 굉장히 긴 것 같지만, 사랑할 시간은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다. 남편과 아내가 옆에 있을 때, 부모님이 아직 살아 계실 때, 아들딸들이 내 눈에 보일 때, 형제자매의 이름을 부를 수 있을 때 즉시 표현하고 행동해야 한다. 사랑한다고. 네가 최고라고. 너를 믿는다고. 네가 있어 행복하다고. 이 말과 행동을 내일로 또 미룬다면 후회와 낙담으로 밤을 지새우게 될 수도 있다.

서대문봄 정신건강의학과| 이호선 정신과 원장

이호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서대문봄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학사, 석사
한양대병원 외래교수, 한양대구리병원 임상강사
(전)성안드레아병원 진료과장, 구리시 치매안심센터 자문의, 저서 <가족의 심리학>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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