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전형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저는 이혼한 부모님과 따로 살고 있는 30대 초반 여자입니다. 외동이라 형제도 없어서 저, 어머니, 아버지 모두 따로 살고 있습니다. 부모님은 제가 성인이 된 이후에 이혼하셨어요. 이유는 아버지가 주식투자로 많은 돈을 잃으셨고, 파산하고 개인회생을 신청할 정도로 빚이 어마어마하게 많아졌는데요. 여기에 성격 차이, 시집살이로 인한 고충 등이 더해져서 갈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이혼하셨습니다.

부모님은 정말 많은 시간을 부부싸움을 하며 보내셨지만, 어렸던 제가 모든 걸 이해하진 못했고 부모님도 제게 디테일한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어요. 정말 사소한 일인데 끝에는 소리 지르고 나가는 일이 너무 많았어요. 지금은 전부는 아니지만 상황과 두 분을 이해하고 있지만, 감정적으로는 양가감정에 빠져 있습니다.

다행히 지금은 부모님께서 일도 열심히 하셔서 빚은 청산한 상태예요. 그건 정말 다행이고 감사하죠. 제 공부에 지장을 주지 않으려고 정말 노력하셨어요. 이제 각자 따로 살고 있기도 해서 집안에 트러블은 거의 없는 상태입니다. 

문제는 어머니의 피해 의식이에요. 어머니가 많이 힘들게 살긴 하셨어요. 어릴 때는 아들(삼촌)이랑 차별당하고, 시집 와서는 고부 갈등, 시집살이, 아버지 빚 대신 갚기 등등. 이런 인생의 굴곡 때문인지 어떤 힘든 일이 생기거나, 그럴 것 같은 조짐만 보여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주변인에게 화를 많이 내고 ‘세상이 나에게 왜 이러나….’라고 생각하시는 듯합니다.

최근에도 부모님께 따로 연락드릴 일이 있었는데요, 아버지가 어머니께 무언가를 해 드렸는데, 어머니가 그걸 오해하시고 또 본인에게 피해를 입혔다고 생각하셨어요. 제가 그런 게 아니라고 설명했지만 이미 너무 당한 게 많다고 생각하시는지 ‘너는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너는 너무 이성적이고 남이라서 그렇게 말한다.’, ‘아버지가 자기를 평생 힘들게 했기 때문에 내가 이런 마음을 품는 건 당연하다.’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았어요.

 

어릴 땐 어머니에게 감정이입 해서 아버지를 많이 원망했지만, 지금은 어머니의 이런 성격을 저도 감당하기 힘들어요. 제 학창 시절은 상처 입은 어머니를 위로하고 이해하고, 같이 우는 일도 많았고…. 여기에 제가 보탤 수 없다고 생각해서 부모님께 힘든 일이나 일상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았어요.

왠지 스스로를 가장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일종의 책임감도 느끼고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더욱 문제라고 생각되는 건, 남의 힘든 이야기를 듣게 되어도 ‘내 힘듦에 비하겠어….’라고 속으로 생각하게 되는 저의 마음. 저도 한때 피해 의식에 사로잡힌 적이 있었어요. ‘왜 우리 부모님은 나에게 힘든 상황을 만들었을까?’, ‘화목한 가정은 어떤 모습일까?’, ‘나는 재능도 있고 똑똑한데 금전적인 문제가 발목을 잡는 거다.’, ‘아버지는 왜 무리하게 주식을 하셨을까?’, ‘내 힘든 이야기는 어디에 할 수 있을까?’, ‘내 부정적인 성격은 다 부모님 탓이다.’ 등등. 물론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결론은 어머니도 그만 아버지를 용서하고, 상처에서 벗어나서 본인의 감정보다 타인의 감정을 어루만질 줄 아는 사람이 되셨으면 좋겠다는 마음, 그리고 부모님께서 서로 성숙하게 대화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요.

그리고 저 또한 이제 따로 두 분을 한꺼번에 챙기며 살고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도 하지만, 가끔은 버거울때도 많아요. 가는 길도 반대이고… 부모님 건강 걱정도 많이 돼요. 혹시나 쓰러지기라도 하시면 119 불러줄 사람도 없을 텐데…. 언제까지 어머니를 위로하고 아버지를 이해하고…. 이렇게 박쥐처럼 살아야 할까?나는 솔직히 둘 다 이해가 되는데… 왜 둘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할까?

부모님은 서로 안 보면 그만인 사이가 되셨지만, 저는 앞으로 평생 이런 딜레마를 안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두 분을 따로 부양해야 한다는 부담감도 크고, 빚 때문에 모아 두신 돈도 없으니까요.

그리고 부모님께 제 이야기를 하거나 일상을 공유하는 것도 너무 어색하고 이상해요. 최근에 이직을 하고 이사 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그것도 말씀 안 드렸어요. 그리고 형제 많은 가정이 부럽고, 대학생 초년생 때는 부모님께 의지해서 집이나 차, 혹은 카드를 받아서 쓰는 애들을 보면 신기하고, ‘내가 화목한 가정을 꾸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아무튼 우리 가족은 각자 다들 지쳐 있는 상태예요. 서로에게 의지하지도 못하고, 가족이라는 의무감에 갇혀 각자 본인의 피해 의식과 책임감 등등에 빠져 있는…. 솔직히 과거 이야기 지겨워요. 어머니든, 아버지든 하소연 좀 그만 듣고 싶어요. 무슨 일만 생기면 트라우마 때문이라며 본인의 감정을 정당화하는 그런 말들….

오늘은 많이 답답해서 친구에게도 못했던 이야기를 온라인에 털어놓아 봤습니다. 긴 글인데 읽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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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안녕하세요, 사연자님. 사연자님과 가족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 보았습니다. 그동안 오랜 시간 부모님의 갈등을 지켜보며 심적으로 의지할 형제자매도 없이 얼마나 마음이 힘드셨을까요. 부모님 역시 힘든 시간을 보내 오셨겠지만, 어린 사연자님께서 이 모든 것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리고, 또 본인의 잘못으로 인해 생긴 가정불화도 아니기에 감정적으로 무척이나 혼란스럽고 부모님을 원망하는 마음도 드셨을 것 같습니다.

어린 시절, 작고 여린 사연자님의 가슴에 어머니의 무겁고 슬픈 감정을 고스란히 흡수하며 오히려 어머니를 위로하고자 했던 그 마음은 또 얼마나 버거웠을까요. 그리고 어린아이였던 사연자님께서 부모님과 나누고 싶었던 이야기들, 기쁘고 즐거웠던 일, 힘들고 속상했던 일, 소소하지만 함께 이야기하며 웃기도 하고 위로도 받고 싶던 순간들을 부모님과 나누지 못하고 혼자서만 속앓이하며 마음속에 꾹꾹 눌러 왔을 것을 생각하니 참 많이 외롭고 쓸쓸하셨을 것 같아요.

그러니 성인이 된 지금에 와서도 부모님께 사연자님의 이야기나 속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쉽지 않은 점,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리고 시간이 많이 흘러 두 분께서 이혼하셨음에도 여전히 어머니께서는 본인이 힘들고 아픈 이야기만 사연자님께 하고 계신다면, 더더욱 마음을 털어놓기가 어려울 테고요.

비록 짧은 사연글을 통해서 느낀 바지만, 사연자님께서는 굉장히 사려 깊고,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는 태도가 몸과 마음에 밴 분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굉장한 장점이자 또 성숙한 자세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염려되는 것은 이러한 삶의 태도가 너무 일찍 어린 나이에 형성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점입니다. 

 

부모님의 오랜 불화와 긴장감이 감도는 집안에서 사연자님은 마음 놓고 어리광을 부리지도, 마음 편히 기댈 곳도 없으셨겠지요. 그래서 혹시라도 언제 또 두 분이 언성을 높여 싸우지는 않을지, 어머니의 기분은 어떤지 늘 긴장되고 조바심이 나지는 않으셨을까요. 이처럼 두 분의 기분과 집안 분위기를 살피는 데 항상 안테나를 세우며 많은 에너지를 쏟느라, 정작 사연자님의 생각과 감정, 욕구 등을 알아차리고 소화시키며 충족시키는 데는 어려움이 있으셨으리라 짐작됩니다. 

부모와 자녀 간은 비록 혈육이지만, 엄연하게 구별된 존재입니다. 따라서 자녀는 부모가, 부모는 자녀가 나와 다른 생각과 감정을 품을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사연자님께서는 어린 시절 부모님의 갈등에 많이 노출되면서 상처받은 마음에 아직 채 아물지 못한 가슴속 구멍이 남아 계신 듯합니다. 

그래서 비록 현재 두 분께서 이혼하셨더라도 지금이라도 두 분께서 서로 존중하며 성숙하게 서로를 대하는 모습을 보며 조금이나마 마음의 구멍을 메꾸고 싶으신 게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더불어 ‘어머니께서 본인의 감정보다 타인의 감정을 어루만지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 역시 어쩌면 어머니께서도 이제는 본인의 입장이나 감정만 생각하지 말고, 제발 아버지나 나의 입장과 감정도 좀 헤아려 줬으면 좋겠다는 외침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사연자님께서는 과거의 상처와 결핍감을 지금이라도, 이렇게라도 조금이라도 보상받고 또 채우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요. 사연자님의 이러한 바람이 꼭 실현되면 좋겠다는 작은 소망을 저 또한 조심스레 품어 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꼭 그렇게 되실 거라는 보증수표 같은 말을 해 드릴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연자님께서 통제하거나 변화시키기 어려운 오로지 어머니 본인의 마음과 태도에 달린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노력하거나 변화시킬 수 없는 부분에 집중하거나 집착할수록 ‘내 인생이나 관계에 있어서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바뀌는 것은 없다.’는 무력감과 자괴감에 휩싸이게 되기 쉽습니다. 그러니 지금 당장 어머니께서 아버지를 용서하지 못한다 해도, 또 어머니께서 본인보다 타인의 감정을 어루만지는 사람으로 변화되지 못한다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연자님께서 변화시키기 힘든, 어머니 본인의 문제임을 받아들인다면, 사연자님의 마음이 한결 편안해지시리라 생각됩니다.

이제는 사연자님께서 아무리 바꾸고 싶어도 바꿀 수 없는 과거의 상처나 부모님 두 분의 갈등 관계로부터 좀 더 자유로워지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사연자님의 인생과 욕구, 생각과 감정에 더 많은 초점을 맞추고, 에너지를 쏟고, 본인의 상처를 회복하는 데 집중하시기를 바랍니다.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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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사연자님께서 바라시는 인생의 변화, 그중에서도 가족들과의 관계에서 사연자님의 역할과 태도에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연자님께서는 지금까지 가정 내에서 본인의 역할, 즉 마치 어른과 아이가 뒤바뀐 듯 어머니를 위로하고, 아버지를 이해해 오려고 무던히도 애썼던 그 역할에 상당히 한계가 오신 듯 보입니다. 이제부터는 사연자님의 양 어깨를 짓눌렀던 부모님에 대한 걱정과 책임감의 무게를 사연자님께서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가져가셔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현실적으로 자기만의 한계가 존재합니다. 신체적인, 경제적인, 심리적인 영역 등에서 말이죠. 사연자님께도 이러한 한계가 분명 있으실 겁니다. 본인이 부모님 일과 관련해 감당하고 또 수용할 수 있는 한계는 어느 정도인지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시고, 심리적 및 경제적 영역이나 그 밖에 생각나는 부분들을 적어 가며 구체적으로 정리해 보시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예를 들면, ‘내가 어머니의 하소연을 들어 줄 수 있는 물리적 시간은 일주일에 두 번 정도 내가 바쁘지 않을 때 10분 정도 통화 가능.’, ‘한 달에 한두 번 부모님과 만나 식사하거나 시간 보내기’처럼 목록을 작성해 보실 수도 있겠죠. 이것을 마치 규칙처럼 매사에 적용할 필요도, 또 그럴 수도 없겠지만 이렇게 나의 한계가 이 정도이고, 이 정도면 내가 부모님께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도리는 하면서도 나의 인생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에너지를 쏟으며 집중해 나갈 수 있겠다고 나름의 한계점과 방어막을 세워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번쯤 사연자님께서도 그동안 부모님께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을 해 보셨으면 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꼭 하고 싶었지만 못했던 말들, 속상하고 아프고 외로웠던 그 마음을 말이죠. 어머니의 하소연을 들어 주느라 나도 많이 힘들었다고… 어머니의 속상한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나도 너무 속상하다고…. 이제는 내 이야기도 좀 들어 주셨으면 좋겠다고…. 그리고 이제는 우울하고 힘든 이야기보다 부모님과 만나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도 하고 그냥 편한 마음으로 좋은 시간을 보냈으면 한다고….

어쩌면 어머니께서 이런 사연자님의 마음과 말들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실 수도 있어요. 아니면 그동안 알지 못했던 딸의 아픔에 미안한 마음과 위로의 말들을 해 주실지도 모르죠. 그러나 이제는 어머니의 반응이 그 무엇이든 그것에 연연하기보다 한 번쯤 사연자님의 솔직한 마음을 세상에서 가장 기대고 싶고 위로받고 싶었던 존재에게 표현해 봤다는 데서 나름의 의미가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  

그늘이 있는 나무는 누군가를 쉬어 가게 만드는 넒은 품이 있습니다. 그 풍성한 이파리로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내기까지 나무는 때로 자신의 몸에 박힌 옹이의 아픔을 견디며 성장해 온 것이죠. 사연자님께는 아직 채 아물지 않은 과거의 상처가 앞으로의 삶에서 그리고 관계에서 더 풍성한 그늘이 있는 나무로 성장하는 데 밑거름이 되는 옹이가 될 것임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 나무 그늘에서 사연자님의 들뜬 마음도 열기를 식히며 치유될 수 있기를…. 

 

신림평온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전형진 원장

전형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신림평온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충남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국립공주병원 전공의 수료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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