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우경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말 그대로 제가 이기적이고 과민 반응하면서 우울증이라고 착각하는 건지, 아닌지 궁금합니다. 제 이야기를 하기 전 이해를 돕기 위해 엄마 이야기부터 하자면 저희 엄마는 흔히 말하는 ‘착취아’로 자랐습니다. 엄마는 장녀였기에 엄마의 가족을 위해 많은 희생을 하면서 자랐고, 이건 외갓집 식구들 모두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엄마가 장녀라 외갓집 집안의 대소사를 모두 신경 써 왔습니다. 저희 아빠 역시 장남은 아니지만 친가에서 그런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저도 어릴 적부터 부모님의 이런 역할을 물려받은 것처럼 친척들로부터 사촌 동생들을 잘 보살피라는 부담을 떠안았습니다. 특히 외갓집의 경우, 제가 제일 큰 손녀라 열일곱 살 때까지 갈 때마다(1, 2주에 한번) 삼촌과 단둘이 깜깜한 방에 들어가 사촌 동생들을 잘 보살피라는 말을 자주 들었습니다. 

당시 집안 분위기가 사촌 동생을 불쌍해하는 분위기라 제 부담감을 티를 낼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만 조용히 있으면 평화로운 분위기가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저는 참고 참느라 소심하고 눈치를 많이 보는 성격으로 변했습니다. 

또한 이런 집안 분위기로 인해 저 역시 제가 원하는 대로 인생을 살지 못하고 항상 사촌 동생을 염두에 두는 삶을 살게 됐습니다. 어릴 적엔 항상 제가 가진 물건을 사촌 동생에게 나눠 줘야 했으며, 대학생이 된 후에도 계속해서 사촌 동생 선물도 챙겨야 했습니다. 심지어 어쩌다 당첨된 연극, 뮤지컬 같은 티켓들도 친구가 아닌 불쌍한 사촌 동생과 보러 가야 했습니다. 

반면 사촌 동생은 항상 자기가 원하는 물건을 갖고, 호캉스를 가며, 공연 등을 보러 다녔습니다. 오히려 저보다 풍요롭게 학창 시절을 보냈습니다. 왜냐하면 전 항상 사촌 동생 것을 사느라 돈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사촌 동생과 저는 한 살 차이밖에 나지 않았는데, 사촌 동생이 제가 자신의 실험쥐라는 말을 자주 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자기 인생을 위한 시제품이라는 거죠.

이런 상황에서 부모님께 힘들다고 털어놓았지만 제가 과민하다는 반응이었습니다. 특히, 엄마는 자신이 더 힘든 과거를 가지고 있는데 겨우 그까짓 걸로 과민하게 반응한다며 저를 나무랐습니다. 학교 폭력으로 인해 막판에 성적이 떨어져 원하는 대학에 진학하지 못해 반수도 하고 싶었지만 제대로 못했습니다. 왜냐면 한 살 차이인 사촌 동생과 수험 기간이 겹치니까요.

부모님의 눈높이에 맞추지 못한 대입 실패, 사촌 동생과의 이런 관계와 숨 막히는 집안 분위기로 인해 자살 시도를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그 무렵, 친구의 권유로 학교 심리상담센터에 가서 심리상담을 받았습니다. 상담 중 자살 이야기가 나와서 엄마에게 연락이 갔습니다. 그러나 그 뒤로도 엄마에게 고민 이야기를 했다가 몇 번 더 혼나면서부터 엄마에게는 제 힘든 점은 아예 이야기하지 않게 됐습니다. 제 목숨 값 정도로도 안 될 만큼 엄마는 힘든 젊은 날을 보냈으니까 감히 이야기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고 저도 모르게 엄마한테 취업 준비가 너무 힘드니까 우울증 약이라도 먹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엄청 오래전부터 다 포기하고 다 놔 버리고 가루처럼 사라져서 이세상에서 없어지고 싶었고… 지금도 그렇다고 털어놨습니다. 또다시 잊고 있던 엄마의 나무람이 시작됐고 이번에는 동생까지 합세했습니다. “진짜 죽지도 못하면서, 자기만 힘든 줄 안다.”라는 질타를 받다 보니 ‘내가 착각하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단 저의 지금 상태는 무기력한 편인데, 엄마만 보면 숨이 막히고 가슴이 조이는 증상, 엄마가 소리를 지를까 봐 불안하며, 가만히 있다가도 자주 울화통이 터져 눈물이 납니다. 죽고 싶다는 생각보단 그냥 항상 생각의 끝이 죽음입니다. 이런 상황들을 다른 사람들도 보편적으로 자주 겪는지 궁금하고, 이런 사소한 상황들로 인해 제가 병원을 가도 되는지 궁금합니다.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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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안녕하세요, 사연자님. 이렇게 용기 내셔서 이곳에 고민 상담을 해 주신 점, 감사드립니다. 사연자님의 글을 읽으면서 왠지 모르게 가슴 한쪽이 뻐근해지고 읽는 내내 마음이 아팠습니다. 자신이 어찌하기 힘든 가정환경과 성장 배경 속에서 어린 시절부터 가족들의 눈치를 살피느라 자기주장을 하거나 온전히 감정을 표출하지도, 이해받지도 못한 채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내셨을지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그동안 참으로 고생 많으셨네요.

사연자님의 어머니께서는 원가족에서 자신이 장녀라는 이유로 다른 가족들을 위해 희생해 왔던 역할을, 사연자님께서 외가에서 큰 손녀라는 이유로 대물림하고자 하셨던 것 같아 몹시 안타깝습니다. 또한 어머니 본인이 원가족 안에서 치렀던 희생과 고통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보니, 사연자님께서 사촌 동생들을 돌보거나 양보하는 일 정도는 과거에 본인이 해 왔던 역할에 비하면 그다지 힘든 일은 아니라고 여기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연자님의 입장에서는 본인도 어린 나이에 단지 첫 손녀라는 이유로 사촌 동생들을 보살피는 것을 당연시하고, 양보가 강요되던 일상이 어찌 버겁지 않으셨겠어요. 사연자님을 더욱 힘들게 한 것은 사촌 동생들을 보살피는 행위 자체보다도 이에 대한 가족들의 인정이나 고마움도 없이 그것이 마치 사연자님의 의무라도 되는 듯한 집안 분위기가 아니었을 싶습니다. 

더욱이 오랜 시간 이러한 양보와 희생을 납득할 수 없어 마음의 상처와 억울함이 한계에 이르러 그것을 어머니께 표현했을 때 돌아오는 답변은 오히려 질타와 과민하다는 반응이셨다니 얼마나 낙담이 크셨을까요. 마음이 아픕니다. 사연자님께서 어머니께 듣고 싶었던 말들은 아마도 어린 자녀에게 감당하기 힘든 역할과 부담감을 지웠던 데 대한 미안함과 사과, 그리고 그간 사촌 동생들을 돌보고 양보하느라 수고가 많았다는 인정의 말이었을 겁니다. 또 지금 심적으로 너무나 고통스러워하는 사연자님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 사연자님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며, 따뜻한 위로와 관심을 받고 싶으셨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외람되게도 사연자님의 어머니는 사연자님의 어린 시절부터 성인이 된 지금까지 줄곧 사연자님께 필요한 심리적 지지와 공감, 위로를 제공할 만한 정신적 자원이 충분하지 않은 분이라 생각됩니다. 본인의 본가에서 ‘희생양’이라는 역할을 하면서 받았던 마음의 상처와 구멍이 잘 메꿔지지 못한 탓에 다른 사람의 아픔, 심지어 그가 자신의 자녀라 할지라도 잘 들여다보지 못하는 측면이 있으신 것 같아요. 안타깝게도 치유되지 못한 부모의 상처는 그 자식에게 대물림될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니 사연자님께서는 자신의 인생은 물론 미래에 만나게 될지 모를 가족을 위해서도 마음의 상처를 잘 치유해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사연자님께서 본인이 과민한 건지, 병원 상담을 받아야 하는 건지 궁금하다고 하셨지요? 이 지면 답변글을 빌려 말씀 드릴 수 있는 것은, 사연자님께서 과민하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마음이 힘든 것이 아니라,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머니와 동생 분은 사연자님께서 힘들다고 털어놓았을 때 ‘나는 너보다 더 힘들었다.’거나, ‘자기만 힘든 줄 안다.’며 사연자님의 ‘힘듦’은 어머니의 ‘힘듦’에 비하면 별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도 다 힘드니 티를 내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해 오셨지만, 이것이 과연 맞는 걸까요? 가족이란, 나의 고통만큼 다른 가족의 고통도 가벼이 여기지 않고, 내가 힘들 때 위로를 바라는 것처럼 다른 가족이 힘들어할 때 위로를 해 주는 존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비록 몸과 마음의 힘이 없던 어린 시절의 사연자님은 가족들이 부여한 장손녀라는 역할을 거부할 수 없어 그 책임감을 모두 짊어지셨지만, 거기에 다른 가족들의 눈치를 보느라 정작 자기주장도 잘하지 못하고, 원하는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하셨지만, 이제는 더 이상 나약한 어린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하셨으면 합니다.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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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상처를 직면하고 치유하는 것은 단지 부모의 잘못을 시인하게 하거나 어린 시절에 부모에게 받지 못한 인정과 보살핌을 구걸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겪었던 부당함이나 상처를 있는 그대로 꺼내 놓고 표현할 수 있되, 상대의 반응이 비록 기대했던 바가 아니더라도 담담히 놓아 주고, 지금껏 짊어졌던 무거운 마음의 짐을 마침내 내려놓는 것입니다.

사연자님께서 가족들에게 받았던 부당한 대우나 상처는 사연자님의 잘못이 아니지만, 성인이 된 이후로 그 상처를 치유하고 회복하는 것은 이제 온전히 사연자님의 몫으로 남겨졌습니다. 아마도 그 치유의 과정을 시작하는 첫 번째 걸음으로 이렇게 용기를 내어 사연글을 올려 주신 것 같고요. 이제부터는 타인의 시선과 가치가 아닌, 나만의 생각과 가치를 기준으로 사연자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모습을 만들어 가시기를 바랍니다.

사연자님께서 중요시하는 인생의 가치와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은 무엇인지 숙고해 보는 시간을 통해 앞으로는 타인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혹은 함부로 누군가가 나의 삶을 통제하지 못하도록 자신이 세운 경계선을 잘 지켜 나가셨으면 합니다.

물론 처음부터 이러한 시도가 성공하지 못할 수도,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꾸준히 자신만의 경계를 명확히 하고, 사연자님이 중요시하는 가치관을 향해 자신의 말과 행동, 생각과 감정 등을 일치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그 어떤 주변의 지나친 간섭이나 근거 없는 비난에도 흔들림 없이 원하시는 삶의 모습으로 살아가실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말씀은, 사연자님 본인이 더 이상 원치 않으신다면 이제는 외가 쪽 가족들과는 거리를 두시고, 부모님이나 다른 가족들과 한 집에서 지내는 것이 현재 심적으로 많이 힘드신 만큼 독립이 가능하다면 잘 준비하셔서 독립하는 문제도 생각해 보셨으면 하는 점입니다.

또 자살 사고나 오래된 우울감과 무기력감, 숨이 막히고 가슴이 조이는 등 신체적 증상으로까지 나타날 만큼 심적 어려움이 있으신 만큼 빠른 시일 내에 정신건강의학과에 방문하시어 전문적인 상담과 도움을 받으시기를 권유 드립니다. 

사연자님께서 앞으로 인생을 살아가면서 기억해야 할 것은, ‘내 인생의 주인은 나이며, 내 가치관과 생각, 감정, 행복이 그 어떤 타인의 것보다 우선순위에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물론 이러한 가치관에 근거한 명제를 받아들일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 역시 사연자님의 가치판단에 의해 이루어져야겠지요. 사연자님의 앞날에 축복을 빕니다.   

 

강남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우경수 원장

 

우경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강남숲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대구가톨릭대병원 의과대학 학사 , 석사
대구가톨릭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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