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이호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언니가 대학생이 된 이후에 같이 다니던 친구들과 작년부터 잦은 트러블이 생겼습니다. 언니는 집에서 저에게 친구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는 날이 많아졌고, 친구들을 한 명 한 명 알려주면서 있었던 일을 설명하기도 했고, 울거나 기분이 나빠지면서 불안하고 우울해지기도 했습니다.
 
한두 번의 일화로 끝나지 않고 약 일 년 동안 언니의 친구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언니의 대학교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별로 듣고 싶지 않고, 언니가 힘든 것에 공감이 되어 기분이 자주 우울해집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혼자 저녁을 먹으며 쉬고 있는데도 언니가 방에서 나와 본인이 그날 겪었던 안 좋은 일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고, 강아지랑 같이 산책을 갈 때에도 걷는 내내 본인의 힘들었던 이야기를 합니다.

언니는 고등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심리 상담을 받고 있습니다. 정서적으로 불안정하고 자존감이 낮다는 걸 알게 된 이후로 언니가 상처받는 것에 대해 저도 예민해지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고3 수험생일 때 언니도 삼수를 했었는데, 언니가 상처받는 것이 두려워 차라리 제가 언니보다 좋은 대학에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언니에게 힘든 이야기를 그만해 달라고 하기가 더 어렵게 느껴지고, 들어주자는 생각과 듣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자주 충돌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가 힘든 일이 있어도 다른 사람까지 힘들게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부정적인 이야기나 말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게 더 심해졌습니다. 심지어 한숨도 최대한 참으려고 합니다.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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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안녕하세요, 사연자님. 반갑습니다. 사연을 읽어 보니 현재 언니분의 장기적인 우울감으로 인해 언니의 이야기를 들어 주고, 공감해 주는 데 다소 한계가 오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부정적인 감정이나 우울한 기분도 곁에 있는 사람에게 전해지면서 함께 우울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힘든 사연자님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우울한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고 공감해 주는 것은 상당한 정신적 에너지를 소모하게끔 합니다. 하물며 어쩌다가 있는 일이 아니라, 한 집에서 생활하며 시도 때도 없이 언니의 하소연을 들어 주어야 했던 것이 사연자님께는 무척이나 버거운 일이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들어하는 언니에게 힘이 되어 주기 위해 묵묵히 언니의 불평불만을 들어 주셨던 사연자님께서는 참으로 마음이 선한 분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우울한 기분이 들거나 우울증에 빠진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에게 일어난 긍정적인 사건은 덜 회상하고 부정적인 사건들을 더 많이 떠올리는 경향성을 보입니다. 즉, 우울한 사람들을 더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기분-유도 편향(moood included bias)’ 때문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인데요, 이는 우울한 사람들은 자기 삶에서 일어난 일들 중에서도 유독 부정적인 사건에 더 초점을 맞추고 긍정적인 측면에는 주의를 덜 기울이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아마 사연자님의 언니분께서도 현재 이런 상태가 아닐지 추측됩니다. 언니분께 이렇게 자신의 힘들고 우울한 마음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동생분이 있다는 것은 무척이나 큰 자원이자 지지적인 존재로서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로 인한 현재 사연자님의 마음 상태입니다. 오랫동안 언니의 부정적인 이야기나 우울한 기분에 공감해 주다 보니 사연자님의 심리적인 에너지가 많이 소진되었을 수 있고, 항상 언니의 이야기나 안 좋은 기분까지 잘 받아 줘야 한다는 생각에 심리적인 부담감도 컸을 테지요.

또 사연자님께서도 생활하다 보면 힘든 일이나 마음이 어두운 날도 있을 텐데, ‘나까지 가족들에게 속상하고 우울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일종의 강박적인 생각과 심리적인 억압을 하고 계신 것 같아 무척이나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나의 마음을 돌보는 것이 다른 그 어떤 사람의 마음에 공감해 주는 일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긍정적인 에너지와 내면적 힘이 있을 때, 누군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줄 여유가 생기기도 하고, 무엇보다 평소에도 내 마음을 잘 들여다보고 보살펴 줘야 힘든 일이 생겨도 잘 이겨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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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는 사연자님께 몇 가지 제안을 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언니의 이야기를 들어 줄 수 있는 한계선을 스스로 어느 정도 설정해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면, 일주일에 두 번 한 시간씩 언니의 무거운 이야기를 들어 주는 것으로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한계를 정해 보는 것입니다. 물론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스스로 정해 놓은 시간을 정확히 지키기 어려울 때도 있고, 횟수를 한두 번 초과할 때도 있겠지만, 일단 보이지 않는 방어막을 어느 정도 세워 두는 것이지요.

만약 언니분께서 시도 때도 없이 사연자분께 푸념을 늘어놓는다면, 당분간은 혹은 요즘은 사연자님 역시 마음의 여유가 별로 없어서 언제나 언니의 이야기를 들어 줄 수는 없다고 평소에 솔직한 심정을 전달해 보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언니를 마음으로 응원하고 있고, 정말 너무 힘들거나 답답할 때는 언니의 이야기를 경청해 줄 것이라고 부연 설명을 해 줌으로써 언니가 불필요한 오해를 하지 않도록 주의해서 말하도록 합니다. 

두 번째는 언니가 우울한 이야기를 할 때 심적으로 같이 충분히 공감해 주면서도 다르게 해석해 볼 수 있는 여지는 없는지 ‘인식의 전환’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눠 보는 것입니다. 우울할 때는 매사를 부정적으로 인지하거나 해석하기 쉽습니다. 

따라서 별다른 의도가 없는 사람들의 말이나 행동도 좀 더 부정적으로 해석해서 받아들이거나 다른 상황을 고려하지 못하고 나의 시야에만 갇혀서 이해하기 쉬우므로, 기분이 더 자주 또는 쉽게 상할 수 있는 것이죠. 이때는 언니의 이야기에서 왜곡된 사고는 없는지 함께 찾아보고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거나 관점을 달리해 볼 수 없을지 이야기해 보면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이때 주의할 점은 언니의 힘든 마음을 먼저 충분히 공감해 준 후에 이러한 대안적 사고나 관점을 탐색해 보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사연자님만의 스트레스 해소 방법을 찾아서 스트레스 관리를 잘 해 나가셨으면 하는 것입니다. 한숨도 최대한 참으려고 한다는 이야기에서 평소 감정 표현을 많이 하거나 혹은 해소하기보다 많이 참거나 억압하는 편이 아니실까 하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사연자님께서 어떨 때 충분히 이완되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지, 또 어떤 활동들이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되는지 자신만의 방법을 찾아서 주기적으로 휴식을 취하거나 스트레스를 관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만약, 방에서 휴식을 취할 때 언니분께서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온다면 “지금은 휴식 중이니 나중에 이야기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이해해 줬으면 좋겠다.”라고 언니에게 명확한 의사를 밝히시는 게 좋겠죠.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는 복식 호흡이나 명상, 요가와 같은 활동들도 도움이 됩니다. 요가나 스트레칭으로 근육의 긴장을 풀고 이완되면 정신적인 스트레스도 줄어드는 효과도 생겨나니까요. 언니와 사연자님의 정신건강을 위해 함께 꾸준히 요가와 같은 운동을 하시는 것은 어떨까요. 단, 이런 활동조차 언니와 함께하는 것이 에너지를 뺏기거나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상상이 된다면 추천드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주는 아니더라도 때로는 사연자님께서도 힘든 일이 있을 때 언니에게 살짝 털어놓아 보세요. 언니도 마냥 약한 존재만은 아닐 거예요. 또 꾸준히 심리 상담을 받고 있다고 하시니 내면의 힘을 조금씩 길러 가는 중이실 테고요. 어쩌면 항상 흔들림 없이만 보이고, 강해 보이기만 하는 동생도 나처럼 종종 연약한 마음이 되어 힘들어하고 있었다는 생각에 깊은 공감과 작은 위로를 건네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연자님도, 언니분도 어지러운 마음들을 잘 다스리고, 일상의 작은 행복과 기쁨의 순간들을 더 많이 찾아가며 누릴 수 있기를 응원하겠습니다. 

 

서대문봄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이호선 원장

이호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서대문봄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학사, 석사
한양대병원 외래교수, 한양대구리병원 임상강사
(전)성안드레아병원 진료과장, 구리시 치매안심센터 자문의, 저서 <가족의 심리학>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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