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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기고] 용서는 회복을 낳고 8화. 눈에 보이지 않는 고통
옥탑방 글쟁이 | 승인 2018.03.08 19:01

조현병 환자 10명 중 4명이 자살시도를 해보았으며, 그중 한 명은 실제로 목숨을 잃는다는 통계 조사가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조현병

조현병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엑스레이나 혈관 검사로도 알 수 없다. 어디가 부러지거나 피가 나는 병도 아니다. 발병 원인이 뚜렷하지 않으며 증상의 고통도 당사자가 아니고서는 느끼기 힘들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고통이 가벼운 것은 아니다. 직접적으로 죽음에 이르게 하지 않지만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게 만드는 무서운 병이다. 뉴스 기사에 따르면 조현병 환자 10명 중 4명이 자살시도를 해봤으며 그중 한 명은 실제로 목숨을 잃는다고 한다. 그만큼 이 병은 치료가 시급하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정신건강의학과 병원에 가는 것을 피하고 숨긴다. 많은 이들이 우울증과 불면증에 고생하면서도 상담과 약물치료를 거부한다. 사회적 인식과 편견이 사람들을 고통에서 빠져 나오려는 시도조차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나 역시 스스로 이 병을 이길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정신과 의사의 진단을 무시했고 약물치료의 도움을 거부했다. 인생의 큰 실수 중 하나였다.

 

사진_픽사베이

 

또 다시 잘못된 다짐

5개월의 부산 생활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와 며칠간 쉬었다. 쉬는 동안에도 내 머릿속에는 과거 날 괴롭혔던 사람들과 사건들이 계속 떠올랐다. 내 정신적 상태에 대해 알고 싶었다. 그래서 어머니와 동네 정신과 병원에 찾아갔다. 의사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들, 떠오르는 생각들을 말했다.

“제가 빨리 마음이 편해져야 공부를 하고 대학에 갈 수 있어요!”라고 간구했다.

그러자 의사는 걱정스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지금 상태로 공부를 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어서 약을 먹고 치료를 받아야 해요!”

아직 수능일이 5개월이나 남아 있었다. 병원을 다니며 공부할 시간을 허비할 수 없었다. 약을 먹으면 잠자는 시간도 늘어날 것이다. 공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다음에 와서 치료를 받겠다는 말을 남기고 병원을 나왔다. 약을 먹지 않고도 강한 정신력으로 버틸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이후 강북지역에서 제법 규모가 큰 재수 종합학원에 등록했다. 다만 스스로 한 가지 다짐했다. 이번 학원에서는 선생님이건 다른 재수생이건 아무하고도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과거에 받은 상처의 기억들로 괴로웠다. 앞으로도 사람에게서 상처받는 일은 계속 생길 것이라 생각했다. 당시로선 더 이상 티끌만한 갈등과 문제조차 감당할 수 없었다. 쉽게 상처받고 분노하여 공부에 집중하지 못할 것을 알았다. 그래서 사전에 모든 가능성을 끊기로 한 것이다.

 

사진_픽사베이

 

자발적 벙어리 생활

학원 등록 첫날부터 나는 인사도 없이 공부만 했다. 누구하고도 말을 하지 않았다. 수업시간은 물론 쉬는 시간에도 책만 쳐다봤다. 누군가 말을 걸어도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고개를 좌우로 절레절레 흔들거나 위아래로 끄덕이며 No와 Yes 정도의 표시만 했다. 말없이 심각한 표정으로 공부만 하다 보니 다들 내게 말 거는 것을 포기했다. 다만 옆자리의 여학생만이 “너는 왜 말을 하지 않니?”라며 계속 물어볼 뿐이었다. 선생님들도 내 목소리를 들어보는 것이 소원이라 할 정도로 난 철저한 벙어리가 되어 갔다.

어느 순간부터 벙어리로 지내는 것이 편했다. 누군가와 부딪힐 일도 없고, 상처받을 일도 없었다. 인간관계에 신경 쓸 일이 없으니 공부에도 집중이 잘 되는 듯했다. 그러나 수업 시간이나 쉬는 시간에 과거 기억들이 계속 생각났다. 그때마다 분노의 감정도 일어났다. 어릴 적 아버지의 폭력과 학창시절의 왕따, 고3 담임선생님의 말들이 계속 떠올랐다. 미치도록 괴로웠다. 다시 머리를 쥐어 뽑고 가만히 있다가 눈물 흘리는 일이 반복되었다.

나쁜 생각이 들 때마다 기분전환을 위해 음식들을 먹어댔다. 학원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매점에 가서 라면을 또 먹었다. 배가 부른 채 교실에 오면 조금 살 것 같았다. 수업 중에도, 자율학습 중에도 책상 위에 과자와 빵을 쌓아 두었다. 안 좋은 생각들이 떠오를 때마다 먹기 위함이었다. 집에 돌아와서도 악몽을 꾸지 않기 위해 잠들기 전마다 밥이나 라면을 먹었다. 재수 생활 동안 몸무게가 15킬로 정도 늘어났다. 그러나 먹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학원 생활 가운데 위기도 있었다. 쉬는 시간에 화장실을 갔다가 교실에 들어가고 있었다. 한 손으로 교실 문의 손잡이를 잡고 살짝 밀어 닫으려 했다. 그 순간 복도 창문을 통해 강한 바람이 불어 왔다. 문이 바람에 의해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 교실에 있던 학생들은 놀라며 나를 쳐다봤다. 그때 반에서 나보다 한 살 많았던 형이 노려보며 “문 좀 살살 닫아라!”라고 협박 조로 말했다. 역시나 나는 아무 말 없이 교실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가방을 싸서 교실을 나갔다. 답답해서 옥상에 올라가려 했는데 문이 잠겨 있었다. 옥상 문 앞에서 벽을 향해 머리를 박아 대기 시작했다. 피가 날 정도는 아니었지만, 머리에 두통이 생길 정도로 박치기를 하며 분을 풀고 있었다. 그때 경비 아저씨가 “뭐야!”라며 소리를 쳤다. 그리고 나를 말리려 했다. 그러나 난 울면서 계속 벽을 향해 박치기를 해댔다. 그날은 어쩔 수 없이 일찍 조퇴를 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학원에 와서 공부를 해나갔다. 그렇게 5개월의 시간을 벙어리로 지냈다. 집에서도 자연스레 가족들과의 대화가 거의 없었다.

 

사진_픽사베이

 

기약 없는 합격을 기다리며

어느덧 수능일이 다가와 무사히 수능 시험을 치렀다. 만족스럽지 않았지만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갈 정도의 성적을 받았다. 수능을 마치고 마중 나온 어머니는 모든 고생이 끝났다며 기뻐하셨다. 이젠 가족들과도 대화하고 즐겁게 지내자고 하셨다. 앞으로 좋은 일만 생길 거라 믿었다. 하지만 고통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수능을 마치고 대학에 입학하기까지 몇 달의 기간은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가,나,다 전형을 통해 세 군데의 대학에 지원서를 넣었다. 어려서부터 텔레비전 보는 것을 좋아하고 글도 잘 쓰는 편이었다. 그래서 방송사 PD나 광고 카피라이터를 꿈꿨다. 자연스레 서울권 대학의 언론학과 위주로 지원했다. 합격자 발표까지는 많은 날들이 남아 있었다. 내가 붙을 수 있을까? 또 떨어져서 삼수를 하면 어쩌지? 라는 생각에 불안했다. 밤에 잠들 때도 초조한 마음에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 같았다.

1차 합격자 발표일이 되었고 세 군대의 학교 모두 불합격했다. 예비 합격자 명단에 내 이름이 있었지만, 앞에 대기자가 꽤 많았다. 한군데는 이미 예비번호 100번을 훨씬 넘었다. 다른 두 곳도 예비번호 34번, 64번이었다. 모집 정원은 각각 50명, 60여 명에 불과했다. 수능만 보면 대학에 쉽게 갈 줄로 알았던 터라 실망이 컸다. 더 낮은 점수의 대학에 지원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결국, 3월 대학교 개강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사진_픽사베이

 

게임과 코미디로의 도피

인터넷으로 합격 대기자 상황을 계속해서 지켜보고 또 지켜보았다. 제대로 잠들 수도 없었다. 불안과 초조함에 하루를 보냈다. 수능을 치른 기쁨에 잠시 사라졌던 정신적인 문제들도 다시 시작되었다. 과거의 기억으로 인한 분노에 합격에 대한 걱정까지 겹쳤다. 괴로움에 괴로움이 더해졌다. 그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 게임에 매달렸다.

당시 유행하던 스타크래프트도 할 줄 모를 정도로 원래는 게임과 친하지 않았다. 하지만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만 앉아 있다 보니 자연스레 게임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게임을 하는 나의 모습은 정상적이지 않았다. 여러 명이 함께 하는 ‘강진축구’라는 축구 게임이 있었다. 나는 계속 자살골을 넣어서 우리 편이 지게 만들었다. 그러면 게임 속 채팅방에 욕설이 쏟아졌다. 열 받는 그들의 모습에 희열을 느꼈다. 또 편을 지어 탱크로 전투를 하는 ‘포트리스’라는 게임도 있었다. 여기서도 우리 편 탱크를 향해 대포를 쐈다. 역시나 채팅창에는 나를 향한 욕설이 쏟아졌다. 하지만 난 채팅창에 대응하지 않았다. 그저 대화 없이 계속 같은 편을 죽일 뿐이다. 그래야 뭔가 내 안의 화가 풀리는 것 같았다.

밤을 새워가며 게임을 하다 보니 불면증이 생기고 우울증이 심해졌다. 그래서 인터넷 VOD 다시보기를 통해 코미디 프로그램을 즐겨봤다. 어려서부터 코미디를 좋아했다. 코미디 프로그램을 보면 마음의 우울함이 좀 사라지는 것 같았다. 방송을 재생시키고 누워 있으면 저절로 잠에 들 수 있었다. 그러나 코미디 프로가 많지는 않았다. 그래서 대하 사극이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켜놓고 같은 방법으로 잠에 들었다. 눈을 감고 소리로만 방송을 들으면 마음이 편했다. 하지만 매일은 아니었다. 많은 날들을 눈을 뜬 채 불안감과 두려움, 분노와 억울함으로 새벽을 맞이했다.

겨우 새벽 2시쯤 잠들면 중 2 때 아이들과 고3 선생님, 심지어 아버지가 나타나 나를 괴롭혔다. 악몽 속에서 그들을 끊임없이 때리고 욕을 하며 소리쳤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다음날 밤에도, 또 그 다음 날 밤에도 그들은 계속 나타났다. 심지어 난 칼을 들고 그들을 찌르기도 했다. 그러다 내가 지른 괴성에 놀라 깨어보면 아직 새벽 4시도 안 되었다. 그렇게 하루 서너 시간도 잘 수 없었다. 고통은 꿈이 아닌 현실에서도 이어졌다.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있으면 뭔가 위에서 뭔가 삐그덕 하는 소리가 들렸다. 천장이 무너져 내릴 것 같아 두려웠다. 집에만 계속 있다 보니 밖에 나가는 것조차 두려웠다. 밖에 나갔다가 차에 치여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시달렸다. 가족 관계도 원만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나를 걱정해주고 참아 주셨다. 하지만 아버지와 여동생과는 자주 다투었다. 그렇게 다투는 날이면 내 방문을 잠그지 않고는 잠들 수 없었다. 잠든 사이, 아버지나 동생이 칼을 들고 들어와 나를 해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깨어있는 동안에는 칼을 들고 중2 때 아이들과 선생님을 찾아가는 상상을 즐겼다. 그렇게 해야만 분이 풀릴 것 같았다. 한편으론 내가 진짜 살인을 저지를 것 같은 생각에 주방의 칼만 봐도 소름이 돋아 멀리 피했다.

내가 자살을 선택하는 것도 두려웠다. 남들은 사는 게 힘들어 자살한다. 하지만 난 자살을 통해 세상에 복수하고 싶었다. 가족들에게는 슬픔을 주고 날 괴롭혔던 이들에게는 죄책감과 두려움을 주고 싶었다. 그만큼 내가 받은 고통을 그들이 함께 느꼈으면 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실제 행동으로 이어질까 무서웠다. 간혹 지하철을 탈 때, 나도 모르게 선로로 뛰어들지 않을까 두려워 뒷걸음질 쳤다. 그렇게 내 머릿속에서는 수많은 살인이 일어났다. 언제나 죽음과 죽임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혀 지내야 했다.

 

사진_픽사베이

 

뒤늦게 찾아간 병원

결국 대학병원 정신건강의학과에 찾아갔다. 그곳에서 간호사의 안내에 따라 몇 가지 테스트를 받았다. 심리와 성격에 대한 설문조사와 아이큐 검사를 했다. 기초적인 사고 능력과 기억력 테스트도 받았다. 모든 사전 검사를 끝내고 상담실 밖 대기실에 앉았다. 대기실에 있으면 왠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 쓰였다. 환자의 가족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나를 쳐다봤다. 나를 미친 사람으로 여긴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도 젊고 멀쩡하게 생긴 사람인데.. 어디가 문제일까.. 어떤 식으로 미쳐있을까..?”라는 생각을 그들의 눈빛을 통해 읽을 수 있었다.

앞서 기다리던 한 여자는 혼자서 계속 욕을 해댔다. 의사 앞에서든, 간호사 앞에서든, 심지어 혼자 있을 때도 계속 욕했다. 불만에 가득 차 있는 표정으로 말이다. 그 여자를 바라보며 나도 같은 환자로 여기 있다고 생각하니 신세가 비참했다.

차례가 되어 의사와의 상담이 시작되었다. 그동안 있었던 일들, 머릿속에서 괴롭히는 생각들, 지금 현재 나의 생활 모두를 꾸밈없이 말했다. 상담을 마치고 몇 주 뒤 다시 병원을 찾았다. 의사에게서 진단서를 건네받았다. 진단서 증상 항목에는 불안. 우울. 경도의 관계관념. 망상이라는 단어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밑에는 최종적으로 정신분열형 장애라는 단어가 보였다. 의사는 조심스레 어머니에게 병원에 입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일단 통원치료부터 받아 보자고 권유했다. 의사도 내가 대학교 합격을 기다리는 중이란 걸 알았다. 병원에 입원 한다면 대학을 다니는 건 불가능했다. 불행 중 다행이었지만 내 인생이 딱하게 느껴졌다. 반에서 왕따 당하던 예비 실업고생이 갖은 노력과 고생을 하며 전교 상위 등수에 드는 신화를 써 내려가고 있었는데.. 이제야 인생 성공의 서막을 열고 있었는데.. 결국 노숙자와 재수 생활을 거쳐 정신병자가 되고 만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 자신도 인지할 만큼 증상이 심해졌을 때 치료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행복과 건강보다 대학을 최우선시했기에 치료 시기를 놓쳤다. 제때 치료를 받았다면 평생 병에 시달리며 약을 먹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직도 나와 같은 잘못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병원 기록이 남아 사회적 불이익을 걱정하며 치료를 마다하는 사람들, 강한 정신력으로 버틸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 오직 신앙에만 의지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까지도 생각을 바꿔야 한다. 그 사람들에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자신의 행복과 건강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 정신의학신문에서 독자기고 칼럼을 게재합니다. 많은 분들의 관심과 참여 바랍니다.
(정신의학신문 홈페이지 - 게시판 - 우리가 하고 싶은 이야기)

 

 

옥탑방 글쟁이  info.psynews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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