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는 회복을 낳고_4화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위해 여러 번 면접을 봤다. 그중 기억에 남는 곳은 SNS 마케팅 회사였다. 회사 입구에는 밤새 야근하며 시켜 먹은 듯 배달 음식의 빈 그릇들이 놓여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직원들은 따닥따닥 붙어 있는 책상에서 말없이 기계처럼 일하고 있었다. 회의장에서 회사 대표와 몇몇 임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면접을 시작했다. 질문 내용은 다소 강하고 공격적이었다. 말 그대로 압박 면접이었다. “본인은 얼마나 독하다고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을 받았다. 아마도 이 회사에서 살아남고 싶으면 독하게 일해야 한다는 뜻 같았다. 그 한 가지 질문에 이 회사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난 “면접 기회를 주신 것은 감사합니다.”라는 말로 면접을 마무리했다. 더 이상 나는 독한 사람도 아니고 독하게 살고 싶지도 않았다. 이미 학창시절 독하게 살아봤기 때문에 그 고통을 잘 안다. 특히나 하나님 없이 독하게 사는 인생은 참 불행한 것임을 겪어 보았다.

 

독하게 살기로 마음먹었던 건 중2 생활이 막바지로 향했을 때다. 날 왕따시킨 강희에게 맞선 사건이 계기였다. 자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몹시 화가 나 강희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기죽은 채 자리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곧 반의 모든 아이들이 나와 강희를 둘러쌓다. 멀리 있는 아이들은 책상 위까지 올라가 지켜볼 정도였다. 그리고 아이들은 외쳤다.

 

“야! 그렇게 당하고도 분하지도 않냐?”

“이게, 니가 왕따에서 벗어날 마지막 기회야!”

 

모두가 내게 싸우라고 외쳤다. 강희는 그 외침 속에 위축되었다. 하지만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면 모르겠는데 왠지 강희는 두려웠다. 그동안 내게 모욕적인 말과 행동으로 겁을 주었다. 이미 심리적으로 나를 발아래 놓은 것이다. 누군가 나의 손을 잡고 강희의 머리를 향해 밀어쳤다. 순간 강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의 한쪽 팔을 잡았다. 그리곤 내 몸을 등에 밀착시켜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는 유도를 배웠던 터라 엎어치기 기술을 쓴 것이다. 머리가 먼저 시멘트 바닥에 닿았다. 난 정신을 잃다시피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반 아이들은 실망한 채 자리로 돌아갔다. 결국, 난 손 한번 쓰지 못하고 진 것이다.

 

 

사진_픽사베이

 

바닥에 쓰러진 채 생각했다. 어차피 싸움은 쓰레기들이 하는 것, 권투를 배우건 태권도를 배우건 인생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겠지. 날 괴롭힌 쓰레기 같은 인간들은 지금처럼 계속 놀고 싸움이나 하다가 대학도 못가겠지. 머리를 노랗게 물들이고 주유소 알바나 하다 술집여자나 만나겠지. 지금은 바닥에 내동댕이쳐있지만 나중엔 너희들의 인생이 영원히 내동댕이쳐질 거라고! 밑바닥을 헤매는 너희들을 높은 곳에서 바라보며 실컷 비웃어 주겠다고!

 

하지만 지금의 나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해 막노동이나 하는 아버지 밑에서 얼마나 다른 인생을 살 수 있을까? 반에서 중간도 못 드는 성적으로 대학이나 갈 수 있을까? 문뜩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습관적으로 해 온 말이 떠올랐다.

 

“너는 그렇게 살면, 나중에 리어카에 쓰레기나 싣고 다닐 거야!”

 

일요일도 없이 새벽에 나가 뼈 빠지게 일하는 아버지. 자신보다 어린 사람에게 ‘이 씨!’ ‘이 씨!’ 소리나 들으며 무시당하는 삶을 살지 않겠다고! 공부는커녕 운전면허증도 못 따서 20킬로 넘는 기계를 등에 지고 지하철과 버스를 타는 인생. 공사장에서 온 먼지를 마셔가며 일하다 떨어져 다리나 부러지는 인생.

 

그런 아버지를 생각하며 다짐했다. 아비가 천하면 자식도 천한 법이라지만, 난 보란 듯이 성공하겠다고! 누구한테도 무시 받지 않을 것이며, 누구한테도 당하지 않는 인생을 살겠다고!

 

중3이 되어 왕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중3 첫 시험 성적은 여전히 평균 63점대였다. 진로 문제로 만난 담임선생님은 내게 실업계 고등학교로 진학하는 것을 권유했다. 이대로 실업계 고등학교에 가면 또 그 쓰레기 같은 인간들을 만날 것이 뻔했다. 나중엔 아버지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인생을 살아갈 거라 생각했다.

 

공부를 잘하고 싶었다. 먼저 동기부여가 필요했다. 친구들을 사람이 아닌 적으로 봐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지금은 친구라는 말로 포장되어 함께 밥도 먹고 집에도 같이 가지만, 본질적으로 경쟁상대일 뿐이다. 학교를 졸업하면 계급사회로 넘어간다. 변호사, 의사 같은 최상위 계층이 있고 회사원 같은 중간 계급, 가장 밑바닥에는 아버지처럼 노동자나 청소부들의 하위 계급이 있다고 생각했다. 오직 지금만이 공부를 통해 신분을 뒤집을 기회라 생각했다.

 

 

사진_픽사베이

 

먼저 교실 뒷벽에 붙어 있는 성적표를 확인했다. 그리고 내 위 등수에 누가 있는지 확인했다. 그들이 나의 표적이다. 한 친구에게 다가가 장난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이번 시험에선, 니가 내 위네? 다음에 내가 널 꺾어주지.. 이제부터 넌 내 라이벌인거야!”

 

나는 그 아이를 마주칠 때마다 ‘어이! 라이벌!“하고 불렀다.

그 친구도 장난스레 “어! 왜? 라이벌!”하고 맞받아쳤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다음 시험에서 무려 14점이나 오른 평균 77점의 성적을 받은 것이다. 그 친구는 내게 더 이상 라이벌이라 부를 수 없었다. 난 이 방법을 계속 이용했다. 다음 시험에선 나보다 5등 수 위에 있는 친구를 라이벌 삼아 이겼고, 다음 시험에선 더 높은 등수의 친구를 라이벌 삼았다. 그렇게 시험 때마다 라이벌이었던 친구들을 발밑의 존재로 만들었다. 그 기쁨과 희열로 학교생활을 해 나갔다.

 

이후 2학기 중간고사에서 평균 82점을 받았고, 마지막 2학기 기말고사에서 85점을 받았다. 반 40여명의 아이들 중 정확히 10등으로 졸업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영어 과목 선생님이 영어 점수 상위권 5명에게만 졸업 선물로 영문 소설책을 나눠주었다. 선생님께 책을 받고 박수를 받으며 자리로 돌아오는 아이들을 증오했다. 더 높은 성적과 등수에 올라야 함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시험 기간이면 11시가 넘어서야 학원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는 인적이 뜸한 어둡고 으스스한 언덕이 있다. 우리 동네는 일제 강점기 때 공동묘지를 재개발하여 만든 곳이다. 이 언덕도 과거 누군가의 묘지가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이 언덕만 지나가면 무언가의 기운을 받아 내면이 강해짐을 느꼈다. 마치 언덕 아래 묻혀 있을 어떤 악마로부터 영혼의 기운을 받는 것 같았다. 몸과 마음이 지칠 때면 일부러 이 언덕을 지나가며 재충전을 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나서는 공무 못하고 인성까지 나쁜 아이들을 ‘쓰레기’라 칭했다. 그들이 날 부르면 내 이름이 더럽혀지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빴다. 공부 못하는 쓰레기들, 서로 물고 뜯으려는 쓰레기들.. 애써 상대하거나 쳐다볼 필요도 없었다. 쓰레기들이 나에 대해 분노할수록 그들에 대한 혐오도 커졌다. 다시는 저런 쓰레기들에게 당하지도, 상대하지도 않으리란 생각에 더 열심히 공부했다. 나의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이 그들에게 더욱 열등감과 좌절감을 심어 주도록 말이다. 특히 선생님들에게 칭찬받고 인정받을 때면 반대로 야단맞고 체벌 당하는 그들에게서 우월감을 느낀다.

 

내게 공부 못하는 것들은 다 쓰레기였다. 학교 반 아이들 뿐 아니라 때릴 줄밖에 몰랐던 아버지도, 심지어 중학생이던 내 여동생도 반에서 중간 등수에도 들지 못하는 쓰레기였다. 난 동생을 볼 때마다 야단쳤다.

 

“아빠나 엄마는 돈이 없어서 공부를 못했다 쳐! 너는 왜 공부를 못하는 건데?”

동생만 볼 때면 답답하고 분이 났다.

 

“그럴 거면 미용 고등학교나 가서 기술을 배워!”

난 동생을 쓰레기라 부르며 온갖 폭언과 저주를 퍼부었다.

 

어려서는 싸울 일 없이 친하게 지내던 사이였다. 하지만 중학교에 올라와 동생의 성적표가 나오며 불행이 시작되었다. 아버지가 보여준 폭력을 여동생에게 물려줬다. 머리를 향해 주먹을 날리고 발로 복부를 찼다. 배를 감싸 안으며 숨쉬기 힘들어하는 동생에게 “너도 쓰레기야! 맞기 싫으면 공부를 하면 되잖아!”라고 소리쳤다. 이런 나의 행동이 나올 때마다 어머니는 나를 온몸으로 막아섰다. 마치 날 때리던 아버지를 말리듯이, 이젠 여동생을 때리는 나를 막아야 했다. 어머니는 “넌, 니 아빠보다 더 하고 있어!”라며 소리쳤다. 나를 바라보는 동생의 시선에는 늘 겁이 가득했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는 동생을 쓰레기로 만들 수 없다는 생각만 가득 찼다. 늘 당하던 내가 독하게 공부를 하게 되었듯, 동생도 독하게 마음먹기를 바랐던 것이다.

 

사진_픽사베이

 

학교에서도 늘 살기 어린 눈빛에 머리를 삭발한 채로 다녔다. 날 쉽게 생각하는 아이들은 없었다. 게다가 주머니 안에는 커터 칼이나 뾰족한 컴퍼스를 넣고 다녔다. 공부를 하다가 졸릴 때 허벅지를 찌르기 위함이었다. 아니면 이빨로 손 등을 깨물며 졸음을 쫓아냈다. 손등이 이빨 자국에 멍들 정도로 공부했다. 점수는 계속 올라 고2 때 모의고사에서 전교 6등까지 할 수 있었다. 내 주위엔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모르는 문제를 알려주기도 하고 동영상 강의를 공유했다. 선생님들에게 공부 잘하는 아이로 인정받았고 날 무시할 수 있는 아이들도 없었다. 이제는 과거처럼 왕따 당하거나 맞는 일도 없었다. 아무도 싸움이나 시비를 걸어오지 않았다. 나 역시 쓰레기들을 상대하거나 말도 섞지 않았기에 부딪힐 일도 없었다. 아예 인간 취급을 하지 않은 것이다.

 

당시 내 인생의 주인은 하나님이 아닌 나 자신이었다. 성공을 위해서라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았을 것이다. 만일 성공의 길을 계속 걸었다면? 더 좋은 대학에 가고 더 좋은 직장에서 더 높은 위치에 올랐다면? 난 하나님을 믿을 이유가 없었다. 더욱 독하게 인생을 헤쳐 나가며 성공의 꿈을 이루었을 것이다. 그 길에 급제동을 거신 분이 하나님이다. 조현병이라는 병을 통해 실패와 좌절을 겪게 하셨다. 그리고 내 인생을 내가 살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게 하셨다. 이제 내 인생의 주인은 하나님이다. 그래서 조현병은 내게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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