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는 회복을 낳고_2화

사진_픽사베이

 

두 번째 이야기. 

 

주름진 가냘픈 얼굴, 작은 키에 조금 굽은 허리.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겨진 현재 내 아버지의 모습이다. 아버지는 충청북도 어느 시골 마을에서 5남 1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내 할아버지는 옛 선비와 같았다고 한다. 말하자면 다 기울어져 가는 초가집에 부인이 텅 빈 쌀 항아리를 표주박으로 긁는 동안 책만 읽으시는 그런 분이셨던 것 같다. 젊은 시절 글공부를 한 덕인지 공무원 생활도 하셨다는데, 이후 공무원 생활을 접으시고 80세에 돌아가시기까지 계속 책만 읽으셨다.

 

하지만 정작 당신의 자녀들에게는 교육의 기회를 주지 못했다. 할머니는 어린 자녀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농사를 짓다가 쓰러져 돌아가셨다고 한다. 당시 우리 아버지의 나이 다섯 살. 할머니의 사랑도, 할머니의 얼굴도 모른채 자라날 수밖에 없었다. 청년이 된 아버지는 가난과 농사일이 싫어서 무작정 서울로 상경하셨다. 내세울 학력이 없는 아버지는 인쇄소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인쇄 중 결과물에 실수가 발생할 때마다 사장으로부터 맞아가면서도 8년 동안을 버티셨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옷 장사를 시작했는데 낯가림과 소극적인 성격에 몇 달 만에 모두 날리셨다. 결국,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하셨는데 점차 기술이 쌓이고 기계도 이용하다 보니 나름대로 공사에 일가견이 있는 기술노동자가 되셨다.

 

그리고 나이 서른이 넘어 같은 지역 고향 사람인 여자를 소개받아 결혼하셨다. 그분이 바로 내 어머니인데, 어머니 역시 9남매가 살아가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셨다. 9남매 중 가장 집안일을 많이 맡으셨다고 한다. 두 분은 서울 변두리의 100만원 월세방에 신혼집을 차리셨다. 비나 눈이 오는 날을 제외하고 일요일도 없이 매일 새벽 4시면 집을 나서는 아버지와 아끼고 모으며 집안 살림을 해 나가셨던 어머니는 잘 맞았던 것 같다. 아버지의 일이 힘들고 위험해서 수당이 많기도 했지만 어머니의 알뜰함 덕에 지금은 건물도 소유할 정도로 잘 살 수 있었다.

 

당시 많은 시골 청년들이 아버지처럼 꿈을 안고 서울로 상경했다. 아버지의 두 남동생도 그들에 속했다. 내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우리 집에서 얹혀 사셨는데, 불행하게도 서울에 오자마자 1년 차이로 두 분 다 돌아가셨다. 한 분은 자전거를 타고 가다 뺑소니 사고로, 다른 한 분은 공장에서 숙식하며 일하다 연탄가스 누출로 인해서였다. 엄마의 말에 따르면 작은 삼촌은 할머니가 그리워 밤마다 하늘을 보며 우셨다고 한다. 아버지보다도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더 크셨던 것 같다. 아버지는 두 형제가 살아 있을 때, 자신이 먹던 밥도 덜어 줄 정도로 잘 챙기셨다고 한다. 그런데 왜 유독 나한테는 그리 매정하게 대하셨나 싶었다.

 

할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해서일까? 배우지 못해서? 아니면 하늘로 떠나보낸 두 동생 때문에 냉정해지신 걸까? 어쩌면 흙먼지 날리는 거친 공사장의 영향일지도 모르겠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내게 많은 상처를 주었다.

 

유치원 때 밥상에서 투정 부리면 아버지는 장난감을 던졌다. 날아드는 장난감을 피해 어머니 등 뒤에 숨었다. 또 밥을 먹다가 소리를 낸다고 혼냈고, 도중에 텔레비전을 켜거나 화장실도 갈 수 없었다. 식탁에 컵을 놓을 때도 바닥에 닿는 소리를 내면 혼났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부릅뜬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때릴 듯이 한 손을 들고 입으로 ‘콰악!’이라고 소리 냈다. 난 무서워서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온몸을 움츠릴 수밖에 없었다. 가끔 주먹으로 머리를 때리거나 머리채를 잡고 끌어내기도 했다. 맞는 것보다 이런 식으로 겁주는 게 더 싫었던 것 같다.

 

사진_픽사베이

 

어릴 적 아버지와 식사하는 시간이 어찌나 괴롭던지.. 그래서 지금도 나는 집에 있을 때 혼자 밥 먹기를 좋아한다. 그래야 마음 편하게 음식이 넘어갔다. 그것도 그나마 나아진 것이다. 중고등학교 때는 어머니가 차려주신 밥상을 갖고 방에 들어간 뒤 문을 잠가야 맘 편히 식사 할 수 있었다. 식사시간 외에도 텔레비전을 보다 소리가 너무 크다고 혼났다. 그래서 방문을 닫고 이어폰을 텔레비전에 꽂아도 방문 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빛 때문에 잠을 잘 수 없다며 혼냈다. 아버지는 새벽 4시에 일어나 일터에 나가시지만 그만큼 빨리 잠자리에 드셔야 했다. 나와 동생에게 최소한 밤 10시 전에는 잠에 들기를 강요했다.

 

그래서 밤 10시가 넘으면 이불로 텔레비전의 빛을 가렸다. 다시 이어폰을 꽂고 좋아하는 프로그램을 봤다. ‘봉숭아 학당’, ‘네로 24시’, ‘동작그만’ 같은 코미디도 좋아했지만, 밤 10시에 시작하는 ‘왕초’, ‘허준’ ‘야인시대’ 같은 드라마들도 챙겨 봐야만 했다. 그 외에도 ‘가요톱10’, ‘경찰청 사람들’, ‘테마게임’은 내가 놓칠 수 없는 프로그램들이였다. 초등학교 수업을 마치고 오면 하루 6시간은 텔레비전에만 매달렸다.

 

학교에서 아이들의 괴롭힘을 당하고 와도 텔레비전만 보면 아픔이 씻겨 내리는 듯했고, 웃을 일이 없다가도 웃을 수 있었다. 날마다 요일별로 좋아하는 프로그램이 방송하는 시간만을 기다리며 지냈다. 아버지는 그런 내 모습에 치를 떨었던 것 같다. 내 방에 있는 텔레비전을 버리겠다며 수시로 윽박 했다. 텔레비전을 들고 나가려는 아버지를 붙잡고 울면 엄마가 나타나 적당히 보게 할 테니 한번 봐주라고 애원했다. 나중엔 아버지가 텔레비전의 전기선을 가위로 자르면 어머니가 새 전기선을 연결하여 고쳐주시기도 했다.

 

어느 날, 화가 난 아버지가 나를 때리다가 자기 분을 이기지 못하여 벽을 발로 차고 방을 나가셨다. 그리고 몇 시간 지나 잠을 자고 있는데 술에 취한 아버지가 발에 깁스를 한 채 내 방에 들어왔다. “자니?” 아버지의 소리에 잠에서 깬 나는 “아니요”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어른이 말씀하시는 데 누워있어?”라며 일으킨 뒤 한 시간 가까이 혼내기도 했다.

 

아버지를 무서워하고 싫어했던 건 때리거나 혼나서만은 아닐 것이다. 아버지와 함께했던 소중한 추억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돈을 벌기 위해 일에 매달렸고 자녀와 시간을 보내는 방법도 모르셨다. 다만 학교 운동장에서 함께 만든 행글라이더를 날렸던 기억, 그리고 한밤중 자신이 직접 껍질을 벗기던 귤을 보이며 “너도, 귤 먹을래?”라고 물어본 것 정도였다. 물론 다른 아버지와 아들들처럼 함께 목욕탕에 가기도 했지만 집에 돌아 올 때 아버지는 늘 열 걸음 앞에서 먼저 가셨다. 그런 게 너무 서운했다. 다른 아버지들처럼 손이라도 맞잡고 걸어가셨으면 좋았을 텐데..

 

그래서 아버지에 대한 애틋한 감정을 가지기 힘들었다. 내가 성장하며 키가 커질수록 아버지는 일하며 등이 굽어져 갔다. 그래서인지 중학교 때 아버지와 서로 등을 맞대고 키를 쟀는데 내가 살짝 더 컸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싫은 내색 없이 오히려 웃으며 좋아하셨다. 그런 아버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만 어쩌면 내가 아버지보다 힘이 강해져 더 이상 혼나거나 맞지 않아도 되겠구나! 희망을 가질 뿐이었다. 그 희망은 갑작스레 현실이 되었다. 공사장에서 일하던 아버지가 추락사고로 병원에 입원했다. 입원 6개월 동안 집에서 진정한 자유를 경험했다. 어쩌면 걱정보다도 기쁨이 앞섰다. 6개월간 병문안도 단 한 번만 갔었다. 굳이 아버지를 찾아가고 싶지 않았다.

 

많은 시간이 흘러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날, 집에 왔는데 아버지가 여동생이 말다툼하고 있었다. 나도 화가 나서 “그만 좀 하라고!”라며 아버지에게 소리를 질렀다. 아버지는 놀라셨는지 온몸이 위축된 채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그럴수록 나는 더 매섭게 노려보았다. 나로도 모자라 동생에게까지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게 화가 났다. 등이 굽어 내 어깨에도 미치지 못하는 키와 추락사고 후유증으로 한쪽 다리마저 저는 아버지는 더 이상 두려움의 존재가 아니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버지는 또다시 입원하셨다. 갑자기 배가 아파 입원했는데 검사를 해보니 허파에 물혹이 생기고 담석이 발견된 것이다. 수술을 통해 물혹을 제거하고 돌덩이를 떼어냈다. 그러나 여전히 작은 돌들이 몸 안에 남아 있었다. 이때도 난 병원에 가지 않았다. 자식으로서의 애정이 전혀 없었다. 단지 원망만이 남아 있었다. 나는 하나님께도 원망을 토로했다.

 

“왜 이런 아버지를 내게 주셨냐고? 왜 괴로움과 상처만 남기는 아버지를 주셨냐고? 아버지의 학벌, 직업, 외모는 바라지도 않는다고. 그저 감싸주고 안아주고 따뜻한 말 한마디 할 줄 아는 아버지를 주시지 않았냐고?”

 

사진_픽사베이

 

그때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 있었다.

“다섯 살 때부터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라난 사람. 기억 속에 얼굴조차 있지 않은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사람. 그리고 아끼던 두 동생을 먼저 하늘로 보낸 사람. 무작정 서울로 올라와 할 줄 아는 건 막노동뿐이지만 가족을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일해 온 사람. 그러나 그런 가족에게조차 외면당하는 사람. 네가 그 사람이 가장 믿고 신뢰할 수 있는 아들로 태어나 못다 한 사랑을 베풀어 달라고..”

 

그리고 그날, 아버지의 병실로 찾아갔다. 마취가 덜 풀렸는지 졸린 눈으로 날 바라보던 아버지는 “아들을 보니 이제 몸이 다 나은 것 같다”고 말했다. 아버지와 난 살면서 몇 번 없었던 긴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아버지는 어린 시절 상처를 줘서 미안하다고 했다. 나 역시 이제는 아버지를 미워하지 않는다고, 진심으로 존경한다고 얘기했다. 다시 잠에 든 아버지의 오른손을 두 손으로 잡고 기도했다. 비록 마음 한켠에 아직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있지만 이제는 아버지를 사랑할 수 있게 해달라고.. 어서 아버지의 몸이 나을 수 있게 해달라고.. 오랜 시간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다.

 

얼마 지나 몸속에 남은 돌들을 제거하는 2차 수술 날이 되었다. 나도 오전에 볼일을 마치고 병원에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 어머니로부터 문자가 한 통 왔다. 수술 전 엑스레이를 찍었는데 돌덩어리들이 몸에서 빠져나갔는지 사라졌다는 것이다. 수술은 취소되었으니 병원에 오지 않아도 된다는 문자였다. 다만, 혹시 모르니 나중에 다시 검사를 받기로 하고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오셨다. 난 또다시 아버지의 몸에 남은 담석이 발견되지 않을 거라 믿었다. 계속해서 아버지를 위해 기도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건강할 수 있도록.. 그리고 아버지를 계속 사랑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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