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는 회복을 낳고_3화

 

지금 가장 괴로운 증상은 날마다 반복해서 떠오르는 망상이다. 밥을 먹을 때, 걸을 때, 샤워할 때, 계속해서 떠오른다. 어릴 적 아버지에게 받은 학대, 학창 시절 왕따 경험, 회사 상사의 폭언, 친구들에게 받은 상처 등등... 귀에 MP3를 꽂고 반복재생을 당하는 것처럼, 눈앞 스크린에 장면들이 펼쳐지듯 생생하게 떠오른다. 너무 괴로워서 밥을 먹다 식탁을 주먹으로 치고, 씻다가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야외에선 그것들을 머릿속에서 털어 내려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댄다. 그중 가장 괴로운 망상은 날 왕따 시켰던 강희(가명)에 대한 복수다.

 

사진_픽사베이

 

나는 중2 시절로 돌아간다. 어머니가 의뢰한 조폭들과 함께 강희를 납치한다. 조폭들을 병풍 삼아 녀석을 무릎 꿇린다. 옷을 벗기고 알몸에 발길질한다. 머리 위에 오줌을 싸고 그것을 마시게 한다. 그리고 사진을 찍어 학교 곳곳에 뿌린다.

 

이토록 통쾌하고 시원한 복수를 상상하면 기분이 나아져야 하는데... 그 뒤로 찾아오는 증오와 허탈감이 나를 삼켰다. 불씨가 화마가 되어 심장을 태우듯 분노가 솟구친다. 그리고 실제로 일어날 수 없음에 우울해한다. 그렇게 20여 년 전, 중학교 2학년 때의 기억은 나를 괴롭히고 있다.

 

처음 중 2학년에 반 배정이 되었을 때, 유난히 친한 친구가 없었다. 키 순서에 따라 자리 배정을 받았다. 내 옆에는 강희라는 이름의 짝궁이 앉았다. 키는 나와 비슷했으나 빼빼 마른 나와 달리 덩치가 조금 있었다. 그는 유난히 선생님들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고 심지어 욕도 했다. 나로서는 선생님들을 욕하는 모습이 다소 당황스러웠다.

 

그런 강희와 처음에는 어느 정도 친하게 지냈다. 가끔 서로 붙잡고 도망가는 놀이를 했다. 처음에는 단순한 장난이라 모두가 웃을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도망가는 사람은 나 하나였고, 붙잡는 아이들의 숫자는 늘어갔다. 내가 복도를 지나가면 아무 이유 없이 “쟤 잡아라!”하고 쫓아왔다. 붙잡힌 나는 강희 앞으로 끌려갔다. 붙잡힌 벌을 받아야 한다며 강희와 아이들은 내 팔목을 한 대씩 때렸다. 팔을 놔달라고 애원할 뿐, 반항할 수 없었다. 아이들의 모습에 아버지가 생각나서 겁이 났다. 그저 몸을 움츠리면 한 대라도 약하게 맞을 뿐이었다.

 

강희는 야한 농담도 좋아했다. 내게도 성과 관련된 수치스런 별명을 붙였다. 내 실수, 웃기는 행동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그에 맞는 별명을 지어 줬다. 그때마다 반 아이들은 박장대소를 하며 비웃었다. 심지어 별명으로만 불리다보니 내 이름을 모르는 아이들도 많았다. 괴롭히는 방법도 지능적이었다. 복도를 걷고 있는데 주변 아이들이 모두 나를 쳐다봤다. 이상하게 여기던 중 기둥 뒤에서 갑자기 강희가 나타났다. 분필 가루가 쌓인 종이 위로 내 얼굴을 향해 입바람을 내뱉었고 내 얼굴은 가루로 하얗게 뒤덮였다. 도시락을 싸 오는 날에는 반찬이 모두 없어지기도 했고 급식을 시작한 뒤로는 내 국그릇에 쓰레기를 집어넣기도 했다.

 

반 아이들도 강희를 따라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고, 선생님들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수업시간에 숙제검사를 위해 반 아이들과 줄을 섰다. 맨 앞 아이부터 ‘하나!’ ‘둘!’ ‘셋!’이라고 외쳤다. 네 번째 아이는 내 귀에 입을 가까이 대고 ‘넷!’이라고 목청껏 외쳤다. 고막이 터질 듯 아팠다. 한 손으로 귀를 움켜쥐고 있었다. 반 아이들은 그런 모습이 웃기다며 박장대소했다. 마음이 가장 아팠던 건, 날 바라보던 선생님의 표정이다. 내게 “얘들이 너 괴롭히냐? 응?”라고 물으며 능글맞은 웃음을 지었다. 지금도 그 표정이 잊혀지지 않는다.

 

폭력보다 상처가 된 건 그들의 모욕적인 말이다.

“야! 바닥에 고인 걸레 물 좀 핥아서 마셔 보지?!”

“너는 앞으로 창자다. 창녀의 아들이란 뜻이야, 알아!?.”

“니 여동생 맛있겠다!”라며

입맛을 다시는 퍼포먼스를 보인 아이도 있었다.

 

또한 매우 조직적이기도 했다. 쉬는 시간에 반 아이에게 맞다가 교실 창문에 머리를 부딪쳐 창문이 깨졌다. 선생님이 들어오자 아이들은 “혼자 장난치다가 창문에 부딪혀서 깨졌어요!”라고 입을 모아 주장했다. 중학교를 졸업 할 때는 내 중2 때 출석기록이 30일이나 결석처리 된 사실을 알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반에 누군가가 30일을 결석했던 강희의 기록을 내 앞으로 표시했던 것이다.

 

그렇게 중2 생활을 이름 없는 왕따로 지냈다. 강희는 나를 통해 웃음과 재미를 주는 수퍼스타였다. 반 아이들도 모두 그 흐름에 동참하며 나를 놀리거나 때렸다. 그나마 학년 초기, 나와 친했던 아이들은 강희의 눈치를 보며 나를 피하거나 아예 적으로 돌아섰다. 어느 날, 강희에게 이젠 그만 좀 괴롭혀 달라고 사정했다. “그럼, 싸대기 200대만 맞자!”며 사실상 거부했다. 강희는 나를 통해 반에서 자기 위치를 높일 수 있었다. 나는 그에게 학교에 오는 즐거움이자 이유가 되는 이름 없는 왕따였다.

 

수업이 끝나고 집에 가는 길은 너무 힘들었다. 괴롭힘에서 잠시 벗어났다는 해방감도 있었다. 하지만 늘 혼자 걷는 길이 외로웠다. 버스를 타고 집에 오는 길이 멀게 느껴졌다. 차 안에서 울음을 참는 것이 힘들었기 때문이다. 발걸음을 재촉하며 겨우 집에 닿으면 내 방으로 달려가 문을 걸어 잠갔다. 침대에 쓰러져 베개에 얼굴을 묻고 소리 내 엉엉 울었다. 밖에서는 어머니의 걱정스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두드리며 ‘또,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문 좀 열어봐, 제발!’이라는 외침을 뒤로 한 채 계속 울고 나면 조금은 살 수가 있었다.

 

어머니도 그런 자식의 모습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처음에는 반 아이들을 집에 불러서 맛있는 걸 해먹이자고 했다. 그런다고 나를 봐줄 아이들이 아니기에 거절했다. 나중에는 돈을 주고 조폭들을 시켜서라도 손을 봐주자고 하셨다. 이번에도 나는 거절했다. 어리석었던 건지, 착했던 건지.. 나는 거절하고 말았다.

 

그때의 선택에 대한 후회와 회상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대표적인 망상이다. 그 생각을 떨쳐내기 위해 찬양을 듣는다. 씻을 때나 걸을 때나 차 탈 때, 늘 귀에 이어폰을 꽂고 찬양을 듣는다. 찬양 곡조에 따라 가사를 곱씹으면 생각들이 잠잠해지기 때문이다.

 

사진_픽사베이

 

물론 근본적인 해결 방법은 강희를 용서하는 것이다. 인간적인 마음으로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신앙에 의지한다. 마태복음 5장에 “원수를 용서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적혀 있다. 그들을 위해 기도까지는 못했지만 용서하려 노력하고 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강희를 이해하려고도 노력했다. 강희 역시도 중 1때 반에서 왕따를 당하던 아이다. 그래서인지 중2가 되어 악착같이 사냥감을 찾아 괴롭혔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 마음을 생각하면 안타까우면서도 이해가 간다. 물론 용서가 한 번에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계속해서 노력하고 다짐하다 보면 용서의 마음이 조금씩 커지는 것을 알 수 있다.

 

가끔 나도 모르게 페이스북으로 강희의 근황을 살펴본다. 지금은 미국에서 생체학 공부를 하며 가정도 꾸렸다. 사진 속 그는 늘 웃고 있다. 아직도 과거의 트라우마로 인해 약을 먹는 내가 용서할 처지가 아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면 선은 흥하고 악은 망해야 한다. 그래서 그의 망하는 모습을 확인하기 위해 페이스북을 확인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의 모습은 너무 행복해 보인다. 그럼에도 나는 노력해야 한다. 그를 용서하고 나아가 위해서 기도할 수 있도록..

 

페이스북으로 그의 사진을 본 날이면 꿈에 강희가 나타난다. 어느 날은 꿈에서 강희가 비웃음을 띄우며 나를 찾아왔다. 나를 괴롭히려고 온 것이다. 그런 강희에게 나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제 너를 용서했어. 더 이상 너를 미워하지 않아. 그리고 너도 하나님을 믿었으면 좋겠어. 너를 위해서 기도할게.”

 

그 말을 하고 나서 꿈에서 깨어났다. 깨고 나니 온몸과 마음이 가뿐하고 상쾌했다. 기쁨에 눈물이 날 뻔했다. 꿈이었지만, 내 잠재의식 속에 강희를 용서하는 마음이 있다는 사실에 기뻤다. 이것은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기적이다. 저절로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다.

 

지금도 내 안에는 미움과 용서의 마음이 공존한다. 내 머리와 가슴에는 선과 악의 보이지 않는 싸움이 벌어진다. 아직도 악과 미움의 감정에 패배하는 날이 많다. 하지만 일시적인 전투에서 질 수는 있어도 전체적인 전쟁은 이미 승리했다고 믿는다. 아마도 이 싸움은 평생 나를 따라올 것이다. 힘들고 지칠 때가 많지만 기쁘고 감사하게 받아들이며 살 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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