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부탁

2017년, 제법 가을바람이 쌀쌀한 퇴근길에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어느 모임에서 알게된 상담 전공 교수님의 전화였다. 의정부 청소년 이동 쉼터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 하나를 맡아 달라는 것이다. 작가의 관점에서 길거리 아이들의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 책으로 만드는 프로그램이었다. 주저 없이 승낙했다. 어릴 적 부모에게 받은 상처와 왕따 경험이 아이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 될 것 같았다. 언론학, 출판학을 전공하고 기자로 일한 경험도 있는데다가 사회복지사 자격도 있으니 내 일이라 생각했다. 나의 짧은 길거리 생활마저도 오늘을 위해 쓰임에 감사했다.

 

잘못된 다짐

나의 길거리 생활은 고3 여름방학 때 시작되었다. 성적이 떨어지고 기숙학원도 좌절되었다. 아직 대학에 대한 꿈과 성공에 대한 집착을 버릴 수 없었다. 정신을 다잡고자 삭발한 머리 스타일을 유지했다. 오전 학교 방학 보충 수업이 끝나면 바로 학교 앞 독서실로 갔다. 하루 종일 공부하다 독서실이 문을 닫는 밤 12시면 근처에 있는 종로 미 대사관 앞 작은 공원에 갔다. 새벽이 되면 인적이 뜸했다. 다만 2~3명의 노숙자가 벤치 위에서 잠을 자곤 했다. 미 대사관 앞이다 보니 의경들이 밤새 지켜보고 있어서 위험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독서실이 끝나고 공원에 가는 이유는 밤새 잠을 자지 않고 가로등 밑에서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그 다짐은 텔레비전 방송을 보며 생겨났다. 휴먼드라마 같은 프로그램에서 매일 잠을 자지 않고도 지장 없이 일상생활을 하는 대학생이 소개되었다. 그 대학생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공부와 아르바이트를 병행했다. 새벽이 되면 운동을 하거나 한강 유원지를 달렸다. 그리고 아침이 밝아오면 다시 학교에 가서 공부했다. 물론 그 사람은 생리적으로나 신경학적으로 보통 사람들과 달랐다. 병원 진단 결과 눈을 깜빡일 때마다 수면효과가 나타나서 굳이 잠을 자지 않아도 되는 신체 조건이었다. 방송을 보며 그 대학생 형을 따라 하고 싶었다. 몸 건강은 생각도 않은 채 강한 정신력과 의지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생각했다. 떨어진 성적과 가까워지는 수능 날로 초조하고 불안했다. 이성적 판단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오전에는 학교, 오후에서 밤까지는 독서실, 새벽에는 공원에서 공부하기로 했다. 수능일까지 잠을 자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사진_픽사베이

 

120시간의 불면 기록

방학 첫째 날 월요일, 공원에서 밤을 새우며 새벽은 아주 긴 시간이라고 깨달았다. 공원 주변에 지나가는 차도 사람도 거의 없었다. 모든 상점과 건물들은 문을 닫았다. 그나마 24시간 편의점은 늘 열려 있었다.

방학 둘째 날 화요일, 잠을 자지 않기 위해 4개의 캔 커피를 마셨다. 속이 너무 쓰리고 커피를 생각만 해도 토할 지경이었다. 그래서일까? 하루 종일 밥을 먹지 않아도 배고프지 않았다. 이후로 허기지면 커피를 더 마셔서 배를 채울 뿐, 졸릴까봐 음식을 먹지 않았다.

방학 셋째 날 수요일,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졸렸다. 공원에 앉아 있기보다 몸을 움직이는 게 낫다고 생각해 가로등 아래서 공부하다 졸리면 동네 한 바퀴를 돌았다. 다시 돌아와 공부하다가 또 졸음이 쏟아졌다. 이번엔 한 시간 정도 차도를 따라 걸었다. 그리곤 다시 공원으로 돌아와 공부했다. 걸을 때마다 신나는 음악을 들으니 제법 버틸 수 있었다.

방학 넷째 날 목요일, 몇 시간이고 새벽 공기를 마시며 서울 시내를 돌아다녔다. 학교가 있는 종로를 벗어나 남산을 넘어 한강 대교에 도착했다. 대교를 건넜다가 다시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남산을 지나고 종로에 있는 학교 정문에 도착했을 때 새벽 4시 반이었다. 정문은 아직 열리지 않았었다. 정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 기다리다 보니 6시가 되어 경비 아저씨가 정문을 열어 주셨다.

방학 다섯째 날 금요일, 이 날도 학교와 독서실 공부를 마치고 새벽동안 서울 시내를 돌아다녔다. 다시 학교에 도착하여 정문 앞에 쭈그려 앉아 있었다. 경비 아저씨는 문을 여시며 부지런한 학생이라고 칭찬해주셨다. 복도 끝 화장실에서 대충 세수를 하고 양말을 벗어 발을 씻은 뒤 다시 보충수업을 들었다.

월요일부터 잠을 한숨도 안자고 방학 여섯째 날인 토요일 새벽이 되었다. 이날도 서울 시내를 걷다가 이른 아침에 종로에 도착했다. 학교를 향해 걷는 데 평소보다 두 배의 시간이 걸렸다. 걷다가 졸면서 멈춰 서고, 또다시 걷다가 졸면서 멈춰 서기를 반복했다. 몽롱한 정신으로 겨우 학교에 도착했다. 이날은 수업 대신 CA 동아리 활동이 있었다. 나는 영화 감상 반이었다. 교실에서 출석 체크를 하고 동아리 반 아이들은 모두 광화문에 있는 영화관에 갔다. 그날 본 영화가 2002년 8월에 개봉한 인썸니아(불면증)라는 영화였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에 알파치노와 로빈 윌리엄스가 나오는 영화였다. 다행히 영화를 보면서 졸지는 않았다. 이대로 영화관에서 잠들면 스스로와의 약속을 깨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가 끝나고 밖에 나와서 갈 곳이 없었다. 아직 해가 창창한 낮이었다. 하지만 토요일은 독서실이 문을 닫는 날이었다. 무슨 생각에서인지 집에 들러 씻은 뒤 옷도 갈아입고 다시 나와야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월요일 집을 떠난 지 5박 6일 만에 다시 집으로 돌아 온 것이다. 집에 아무도 없었다. 안방으로 들어가 교복도 벗지 못하고 그대로 누워 잠들어 버렸다. 잠을 한숨도 안 자고 버틴 지 120시간 정도 지나서였다. 그리고 잠든 지 17시간 만에 깨어났다. 깨어남과 동시에 후회와 허탈감, 좌절감에 빠졌다. 결국, 나는 잠을 이기지 못했다. 모두 실패로 끝났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사진_픽사베이

 

나는 낭만 고양이

그래도 공부를 포기할 수 없었다. 다시 학교와 독서실에서 공부하다가 밤 12시가 되면 공원에 갔다. 그래도 나름 타협을 해서 무조건 밤을 새우지는 않았다. 너무 졸리면 새벽 3~4시쯤에 벤치 위에 누워 신문지를 덮고 잠들었다. 삭발한 채 교복을 입고 잠자는 나를 누구도 건들지 않았다. 다만 공원 안의 몇 노숙인들이 나를 보며 이상한 웃음만 지었다. 어느 날 비가 와서 어쩔 수 없이 공원 화장실에 들어갔다. 화장실 문을 열었는데 이미 다른 노숙인이 그 안에서 자고 있었다. 다행히 옆 칸은 비어 있었다. 안에 들어가 변기 뚜껑을 덮고 그 위에 엎드려 잤다. 허리가 아파서 잠든지 2시간 만에 깨어났다. 화장실을 나와 서울 시내를 돌아 다녔다. 걷다 보면 지하철이나 다른 공원에서 다양한 노숙자들을 볼 수 있었다. 그 중엔 여자도 있었고 머리를 노랗게 염색한 노숙자도 있었다. 당시 귀하던 휴대폰으로 통화를 하는 노숙자도 있었다. 난 그들을 혐오했다. 나는 이렇게 밤을 새면서 죽어라 하고 공부하는데, 그들은 게을러서 공짜 밥이나 먹고 길거리에서 잠자는 나약한 쓰레기들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여름방학 한 달 내내 공원에서 지냈다. 여름이라 춥지 않아서 가능했다. 그래도 새벽 4~5시가 되면 추운 바람에 햇살이 눈부셔서 저절로 눈이 떠졌다. 공원을 가로질러 출근하는 사람들의 구두소리를 듣고 창피해서라도 벤치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마음은 집보다 공원이 편했다. 나와 갈등을 빚는 아버지도 싫었고, 외할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우울해하는 어머니도 보기 싫었다. 끼니는 24시간 편의점 도시락으로 해결했다. 가끔 공중전화로 어머니에게 만나자고 연락했다. 혹시나 나를 찾아올까 공원이 아닌 곳에 약속장소를 잡았다. 그러면 난 돈만 받고 다시 어딘가로 사라졌다. 어머니는 집으로 돌아와 달라고 애원했다. 하지만 난 단호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어머니는 새벽 4~5시마다 학교 정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셨다고 한다. 그래서 어머니는 학교 경비아저씨들로부터 미친 여자로 오해를 받았다.

방학 내내 새벽마다 서울 시내를 돌아다녔다. 이제는 멈출 수 없었다. 수능일은 다가오고 초조함과 실패의식, 좌절감은 커져만 갔다. 그럴수록 온 몸을 혹사시켜가며 거리를 걸어야 머릿속에 잡념이 사라졌다. 다리가 아프고 몸이 피곤해도 마음은 편했다. 세상이 모두 어두워지면 별 빛과 가로등 빛 사이로 혼자 걸어 다녔다. 나의 보물이던 MP3로 음악에 취해 웃기도 하고 울기도 했다. 걸어 다니며 자주 듣던 체리필터의 낭만고양이 노랫말처럼 나는 그렇게 낭만을 즐기고 있었다.

“내 두 눈 밤이면 별이 되지~ 나의 집은 뒷골목~ 달과 별이 뜨지요~”

 

 

사진_픽사베이

 

또래보다 성숙한 아이들

이런 나의 이야기를 의정부 아이들에게도 나누었다. 그러자 아이들도 자신의 삶을 솔직히 이야기해줬다. 그들이 겪어야 했던 아픔과 상처는 생각보다 컸다. 부모의 학대와 학교 폭력은 물론 경제적 문제와 건강의 문제까지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일들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눈물을 흘리거나 어두운 표정을 짓지 않았다. 오히려 웃으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서로 비슷하게 겪었던 아픔과 상처를 나누고 공감했다.

그중에서도 승화(가명)라는 한 아이가 기억에 남는다. 첫 인상부터 매우 어둡고 우울해 보였다. 과거 많은 상처와 아픔이 느껴졌다. 어릴 적 승화의 아버님은 가족들에게 폭행을 가할 때가 많았다. 어머님은 승화가 어릴 적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었고, 가정에 소홀했다고 한다. 그래서 승화와 누나는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울 때가 많았다. 경제적으로도 파산하여 사채업자들이 집에 찾아 왔다. 누나는 방황의 시기를 보냈고 어머니는 승화를 잠시 쉼터로 보내기도 했다. 승화는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던 중 17살 때 학교를 자퇴했고 병원에서 대인기피증을 동반한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그리고 현재는 조현병까지 앓고 있었다.

하지만 승화와 대화를 나누며 내면만큼은 강하고 밝은 아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누구라도 원망할 수밖에 없는 부모님을 용서하고 심지어 사랑하고 있었다. 승화의 아버님도 어릴 적 당신의 아버지를 여의고 자라났다. 어머님도 밖에서 돈을 버느라 가정에 소홀했다. 승화는 그런 부모님을 이해하고 가족들과 따뜻한 대화를 나누려 노력 중이다.

“나는 누나가 잘 되었으면 좋겠어", “아빠, 내가 실수했어, 미안해”라는 말을 자주 한다고 했다.

승화는 경제적 부족함을 메우기 위해 여러 가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실수와 부족함이 많지만 계속 일자리를 구해 왔다. 지금은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며 작은 일에도 감사하고 성실히 임하는 자세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희성(가명)이라는 아이를 만났다. 유난히 밝고 내면이 성숙해 보이는 아이였다. 희성이는 만두 공장에서 일하며 목회자의 꿈을 갖고 있었다. 자신처럼 어려운 시기를 보내는 청소년들을 돕고 싶어 했다. 열심히 공부하고 눈물로 기도해왔다. 그러나 나와 만나는 날 안타깝게도 신학대학교 면접에서 불합격했다는 통보를 들었다.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날 만나러 왔을 법 한데, 희성이의 얼굴은 언제나 밝았다. 그리고 내게 확신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아요.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두 가지 길을 주세요. 목적지를 향해 직진하는 길과 멀리 돌아서 가는 길을 주시죠. 하나님은 제게 감당할 수 있는 길을 걷게 하실 겁니다.”

희성이는 자신의 상처와 아픔보다 꿈과 비전 그리고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 어쩌면 지금 사회는 희성이처럼 어려움을 직접 겪어 본 목회자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너무 어린 나이에 성숙해진 아이들을 보며 마음이 짠했다. 그리고 정말 기특하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의 손길이 아이들을 성장시키고 있었다. 아이들의 아픔과 상처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다만 성숙한 시선과 자세로 극복하며 사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너희는 다른 아이들처럼 따뜻한 부모 품에서 사랑을 받지 못했지만, 스스로 훌륭하게 성장하고 있구나.. 잘 성장하고 있어..”

 

 

* 정신의학신문은 특정 종교와 무관한 언론사입니다. 옥탑방 글쟁이님의 글을 통해 조현병에 대해 잘못된 인식이 바뀌기를 기대합니다.

* 정신의학신문에서 독자기고 칼럼을 게재합니다. 많은 분들의 관심과 참여 바랍니다.
(정신의학신문 홈페이지 - 게시판 - 우리가 하고 싶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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