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병은 내게 많은 교훈을 주었다. 특히 인생에서 무엇을 추구하며 어떤 가치관으로 살아야 하는지 알려줬다. 조현병 환자만의 축복이다. 물론 나의 생각은 망상으로 시달렸다. 초조함과 불안감에 감정을 다스리기 힘들었다. 심지어 약 없이는 밤에 잠자는 것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증상들은 가치관을 변화시켰다. 나는 더 이상 성공과 돈, 명예에 집착할 수 없었다. 대신 긍정적인 생각과 편한 마음, 건강한 육체와 밤마다 스르르 잠드는 것만을 바랄 뿐이다. 

 

어쩌면 사소하지만 이를 이룬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저마다 성공을 위해 자기계발서를 읽고 처세술을 익히며 무한 경쟁 사회를 살아간다. 언제 직장에서 해고될지 몰라서, 사업 실패의 두려움에 잠 못 이루는 사람들이 많다. 미래에 대한 걱정에 안정적이고 남에게 인정받는 길을 가려 한다. 그러나 세상에 안정적이고 확실한 길은 없다. 어렵게 이룬 성공도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다. 이런 생각을 고3 때 몸과 마음이 무너지기 시작하며 갖게 되었다.

 

우연일까? 아니면, 운명일까? 고 3이 되어 나를 괴롭혔던 강희와 다시 같은 반이 되었다. 같은 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같은 반이 되리라곤 상상도 못 했다. 처음엔 당황했다. 하지만 어쩌면 잘된 일이라 여겼다. 나의 성공을 통해 강희를 철저히 짓밟을 기회였다. 아니, 그냥 무시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강희는 반에서 꼴찌를 벗어나기 힘든 쓰레기 인생이다. 성공을 향해 달려야 하기에 녀석까지 신경쓸 틈이 없었다. 고3 내내 우리는 대화 한마디 나누지 않았다. 서로 투명인간 취급했다. 강희는 1년 내내 맨 구석 자리에 앉아 존재감 없이 지냈다. 반 분위기를 주도하던 모습도 찾을 수 없었다. 그저 있는 듯 없는 듯, 공부는 못하는 그런 학생이었다.

 

어느 날, 쉬는 시간에 강희가 노트에 뭔가 열심히 적고 있는 것을 보았다. 뭘 적나? 옆에서 슬쩍 훔쳐봤다. 내 이름 석 자를 한 페이지에 반복해서 적고 있었다. 그리고 한자로 참을 인(忍)자를 또 반복해서 적었다. 처음엔 나를 해치고 싶은 마음을 참는다는 뜻인 줄 알았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 한자는 칼도(刀)에 마음심(心)자의 조합이었다. 내 마음을 칼로 찌르는 주술 같았다. 하지만 쓰레기들의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당장 눈앞에 시험이 우선이다.

 

사진_픽셀

 

고3이 되어서도 성적은 계속 올랐다. 1학기 수능 모의고사에서 반 50명 중 3등까지 할 수 있었다. 아이들은 내 성적을 보며 부러워했고, 담임선생님도 열심히 하는 아이라며 칭찬해주셨다. 하지만 다음 시험부터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언어영역 과목에서 시간에 쫓겨 뒷부분 10문제를 아예 풀지도 못했다. 처음으로 시험을 망쳤고 큰 절망감에 빠졌다. 하지만 한 번의 실수라 여기고 다음 시험을 준비했다. 그때부터 초조함이 생겨났다.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에 마음이 답답하고 조급해졌다.

 

결국 3.3.3 작전을 세웠다. 고3으로서 새벽 3시에 3시간만 자고 일어나 공부하는 전략이다. 이 작전을 실행하는 동안 몸이 무척이나 피곤해 수업시간에 집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도 성적상승을 기대하며 버텼다. 그러나 모의고사를 다시 망치고 말았다. 내신 기말고사도 성적이 오르지 않았다. 실망한 마음에 체력까지 바닥났다.

 

게다가 담임선생님과의 마찰이 시작되었다. 내 책가방은 늘 무거웠다. 교과서와 학원 교재, 문제집을 합치면 평균 15권의 책을 넣고 다녔다. 그래서 교과서는 학교 책상 서랍에 놓고 학원 교재만 가방에 챙겼다. 어느 날, 선생님은 교실 미관상 좋지 않다며 책상 서랍에 책을 놓고 다니지 말라는 방침을 내리셨다. 담임선생님은 영어를 가르치는 할아버지 선생님이셨는데, 원리 원칙을 중시하는 고집 센 분이셨다. 하지만 방침을 따를 수 없었다. 그날도 10여 권의 교과서를 서랍 안에 둔 채 학원을 갔다.

 

다음날 불호령이 떨어졌다. 선생님은 날 교무실로 불러 바구니에 담긴 책을 가리키며 꾸중하셨다. 어쩔 수 없이 다시 무거운 책가방을 메고 다녔다. 등에 땀이 차도록 메고 다니다 무게를 견디지 못한 가방끈이 끊어지기도 했다. 몇 번은 선생님 몰래 책을 서랍에 놓고 다녔다. 한 번은 청소 당번이던 강희가 내 서랍 속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선생님은 날마다 검사를 하지 않고도 내 행동을 아셨다. 더 이상 책을 놓고 다닐 수 없었다. 그래서 생각한 방법이 아무도 오지 않는 학교 쓰레기장 구석에다 모든 책과 노트를 숨겨 놓는 것이었다. 등교할 때마다 쓰레기장에 들러 책과 노트를 챙겼다. 또 수업이 끝나면 다시 쓰레기장에 놓고 학원에 갔다. 며칠은 그렇게 편히 지냈다.

 

그러나 그 방법에는 큰 함정이 있었다. 여름이라 장마철이 시작된 것이다. 전날부터 밤새 비가 내리던 날, 일어나자마자 서둘러 학교 쓰레기장에 달려갔다. 하지만 역시나.. 교과서와 문제집, 노트까지 모두 젖어 버렸다. 심지어 책에 곰팡이까지 폈다. 시험에 나올만한 내용을 필기한 노트까지 잉크가 번져 있었다. 글씨를 알아볼 수 없었다. 너무 비참했다. 군인에게 총이 중요하듯 매우 소중했던 책과 노트들이다. 책에 밑줄도 긋고 중요한 내용을 필기했는데, 모두 날아가 버렸다. 그나마 덜 젖은 책과 노트를 햇볕에 말리고, 나머지는 교실 쓰레기통에 버릴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선생님이 다시 교무실로 불렀다. 쓰레기통에 왜 너의 책들이 있냐며 호통치셨다. 나는 사실대로 말했다. 그러자 선생님은 책 표지에 적힌 내 이름을 가리켰다. ‘너의 이름이 적힌 책들을 버려서 너의 이름까지 더럽혀졌다!’며 더욱 호통치셨다. 사물함 설치를 건의했으나 ‘차라리 전학을 가라’며 더욱 야단맞았다. 더 이상 머릿속에 대책이 없었다.

 

사진_픽셀

 

곰팡이 피고 쭈글쭈글해진 책과 노트를 보면 공부할 마음이 나지 않았다. 이미 무리한 생활로 체력도 바닥났다. 1학기 마지막 모의고사도 성적이 떨어졌다. 이대로 맞이하는 여름방학은 망할 것 같았다. 담임선생님은 이번 여름방학에 반 아이들 모두 보충수업을 들어야 한다고 통보했다. 학교 수업 분위기는 여전히 ‘떠들지 말라’는 선생님의 잔소리와 아이들의 매 맞는 모습으로 가득했다. 이곳에서는 공부가 안될 것 같았다. 그래서 방학 동안 기숙학원에 들어가기로 다짐했다. 이왕이면 아무도 나를 모르는 먼 곳으로 떠나고 싶었다.

 

부모님께 부산에 있는 스파르타 기숙학원에 가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러나 어머니는 강력히 반대했다. 하필이면 내가 고2 때, 예지 학원이라는 광주의 기숙학원에서 화재로 10여 명의 학생들이 사망했었다. 아직 1999년에 발생한 청소년 수련원 화성 씨랜드 참사의 여파가 가시지도 않았을 때였다. 유난히 걱정 많은 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한 번 사고가 났다고 다른 모든 학원에서 화재가 발생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선생님 역시 보충수업의 방침을 들며 허락하지 않으셨다. 평생을 결정지을 고3 여름방학을 이대로 망칠 수 없었다. 우편으로 받은 부산 기숙학원의 팜플릿과 입학 설명서를 들고 담임선생님을 찾아갔다. 하지만 선생님은 그 팜플릿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가라고 손짓만 할 뿐이었다. 나는 너무 억울하고 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내게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니가 이 학교에 다니고, 나를 담임으로 만난 건 니 운명이야. 니가 변호사 아들로 태어나지 못한 것도, 의사 아들로 태어나지 못한 것도, 모두 니 운명이야.“

 

그때 내 머리를 스치는 기억 하나가 있었다. 학기 초 선생님이 나를 불러 학적부를 보여줬다. 그리고 아버지 직업란에 적혀 있는 ‘건축업’을 손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아버지가 건축 회사를 운영하고 계시니?”

“아니요, 그냥 건축 쪽으로 노동하세요.”

그 순간 난 선생님의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분명 실망하고 계셨다.

 

가혹한 운명이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기숙학원은 포기했다. 방학이 시작되어 보충수업에도 참여했다. 수업시간에 곰팡이 핀 교과서를 펼치면 마음이 슬펐다. 그리고 화도 났다. 물론 수업 공부에 집중 할 수 없었다. 그저 곰팡이 핀 책을 한 장, 한 장씩 찢어 댔다. 갖고 다니던 칼과 컴퍼스로 이유 없이 허벅지를 찔러댔다. 머리카락을 쥐어 뽑기도 하고 갑자기 울기도 했다. 반 아이들은 그런 나를 이상하게 보았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은 자신의 공부에 집중할 뿐이었다. 아무도 내게 위로의 말을 건네주지 않았다.

 

수업이 끝나면 친구들에게 노래방을 가자고 졸라댔다. 그렇게 노래를 하면 기분이 나아졌다. 그러나 잠시뿐, 이내 우울함과 좌절감이 심해졌다. 이후 본 모의고사에서는 단 한 문제도 풀 수 없었다. 시험시간 내내 머리카락을 쥐어 뽑을 뿐이었다. 문제를 풀고 나서 성적을 받는 것이 두려웠다. 차라리 풀지 않고 내 성적을 숨기는 게 나았다. 문제를 보지도 않고 답안지에 대충 마킹 한 뒤 시험이 끝나도록 엎드려 있었다. 왠지 말도 안 되는 내 성적표를 보며 아이들이 비웃을 거 같았다. 스스로도 나는 이젠 끝났다고 생각했다.

 

여름방학을 지나 고3 2학기가 되어서는 아예 손에서 책을 놓았다. 그리고 무력감과 패배주의에 빠지기 시작했다. 간혹 다시 공부하려 펜을 들었지만 얼마 못 가 관두기를 반복했다. 시간이 흘러 중간고사, 모의고사를 모두 망쳤고, 수능 전 마지막 모의고사를 보았다. 늘 그랬듯이 시험에 집중할 수 없어 몇 문제만 골라서 풀었다. 시험이 후 모든 반 아이들의 성적표가 교실 벽면에 붙여졌다. 내 점수는 400점 만점에 120점으로 반에서 꼴찌다. 다른 아이들도 저마다 자신의 성적을 확인했다. 그러나 나의 점수에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다만 강희만이 웃으며 내 성적표를 보고 있었다. 민망했던 나는 자리에 앉아 책을 펴고 공부하는 척했다. 이내 강희는 다른 반에 있던 자신의 친구를 데려왔다. 그리고 벽면에 붙인 성적표에서 내 성적을 향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리고 그 손가락 끝은 다시 앉아 있던 나를 향했다. 내 성적을 보던 강희의 친구도 손을 따라 나를 쳐다본 뒤 ‘병신~’ 한마디 내뱉고 비웃음을 지었다.

 

이후, 수능일은 점점 다가왔지만 난 시험을 치르고 싶지 않았다. 보나 마나 망할 게 뻔했고 더 비참해질 것 같았다. 그러나 어머니는 성적이 못 나와도 좋으니 시험장에 들어만 가달라고 요청했다. 할 수 없이 억지로 수능 시험을 봤다. 역시나 결과는 좋지 않았다. 과거 2등급이던 성적이 전국 평균인 4~5등급으로 떨어졌고 수시를 넣었던 지방대마저 모두 떨어졌다. 고3 때 나와 강희는 말 한마디 섞지 않았다. 그러나 서로 지켜보며 의식하고 있었던 건 사실이다. 보이지 않는 싸움에서 내가 이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좋은 성적에 일류 대학에 가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는데.. 결국은 내가 진 것이다.

 

사진_픽셀

 

그렇게 학창시절 강하고 튼튼해 보였던 나의 탑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어쩌면 무너지는 것이 당연하다. 그 바닥 기초는 불타는 증오와 복수의 받침돌이었다. 기둥을 이루는 돌들도 하나 같이 남들에게 뽐내기 위한 화려하고 예쁜 장식품에 불과했다. 게다가 남의 등을 밟고 올라서야만 더 높이 쌓을 수 있었다. 탑의 가장 꼭대기에는 내가 앉아 있었다. 워낙 높은 탑을 쌓으려 해서일까? 탑이 무너질 때 꼭대기가 높을수록 내가 받는 충격은 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충격은 지금까지 병으로 이어져 온 듯하다.

 

하지만 원망하지 않는다. 오히려 감사하다. 조현병을 통해 새로운 탑을 쌓을 수 있었다. 이 글을 쓰는 것도 그 과정 중 하나다. 살면서 겪은 아픔과 눈물이 지반을 만드는 밑거름이 되었다. 그리고 내 옆에는 소중하고 고마운 사람들이 함께 해줘서 외롭지 않다. 기본이 되는 받침돌은 반석이다. 기도와 말씀으로 기둥을 세우고 꼭대기에 하나님이 계신다. 탑이 높을 수도 낮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내게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다만 지금 탑을 쌓고 있는 이 순간이 행복할 뿐이다.

 

 

* 정신의학신문은 특정 종교와 무관한 언론사입니다. 옥탑방 글쟁이님의 글을 통해 조현병에 대해 잘못된 인식이 바뀌기를 기대합니다.

 

* 정신의학신문에서 독자기고 칼럼을 게재합니다. 많은 분들의 관심과 참여 바랍니다.
(정신의학신문 홈페이지 - 게시판 - 우리가 하고 싶은 이야기)

 

* 청와대 국민청원 및 제안에서 정신건강의학과 진단 시 보험가입 불이익에 대한 청원이 진행중입니다. 정신의학신문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 드립니다.

청원 참여하기 : https://www1.president.go.kr/petitions/1116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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