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와 눈이 마주치면 날 비웃는 것 같았다. 어떤 소리가 들리면 나를 욕하는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재수

 

철저히 나만을 위해 살아온 학창시절에는 주위에 친구가 생겨날 수 없었다. 늘 혼자 밥을 먹고 늘 혼자 집에 가는 시간이 많았다. 원망과 분노로 날카롭게 살았기에 누구도 다가올 수 없었다. 그런 나를 처음으로 이해해주고 포용해 준 건 멀리 부산의 친구들이었다. 말투도 다르고 문화도 다른 나를 그들은 친구로 받아 줬다. 늘 암울하게만 느껴졌던 나의 인생에 부산에서의 추억은 따뜻하게 남아 있다.

 

수능을 마치고 대학 원서접수를 위한 담임선생님과의 상담이 이어졌다. 내 차례도 다가왔다. 원망을 가득 안고 교무실에 갔다. 선생님은 2003 수능 대학배치표의 뒷면을 펼쳤다. 앞면은 서울과 수도권 대학, 뒷면은 지방대와 전문대 지원용이었다. 뒷면을 살펴보던 선생님께 혹시 재수를 하면 어떨지 물었다. 당연히 성적이 터무니없이 낮았기에 선생님도 응원해주실 줄 알았다. 그러나 선생님의 대답은 단호했다.

 

“너는 재수를 하다가 더 박살날 수도 있어.”

 

선생님이 그렇게 말할 줄은 몰랐다. 이렇게 된 게 선생님과 부모님 때문이라 생각하니 화가 났다. 선생님은 마음속 깊은 불을 끄라는 말과 함께 돌려보냈다. 하지만 선생님의 말씀이 맞았다. 그 분의 표현대로 난 이미 몸과 마음이 박살난 상태였다. 공부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란 걸 나도 알고 있었다. 지방대 몇 군데에 원서를 넣었지만 모두 떨어졌다. 과거에는 이름도 몰랐던 대학들이다. 이후 더욱 심한 좌절감에 빠졌다. 서울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대학을 목표로 했는데 이제는 지방대도 들어갈 수 없었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그나마 친했던 학교 친구들과 모든 연락을 끊었다. 당시 내겐 핸드폰도 없었고 집 전화도 받지 않았다. 고등학교 졸업식에도 가지 않았다. 철저히 집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모든 대학에서 떨어지고 난 뒤 할 수 있는 일은 원하건 원치 않건 재수밖에 없었다.

 

사진_픽셀

 

부산에서의 재수 생활

 

그러다 예전에 가고자 했던 부산의 스파르타 기숙학원이 떠올랐다. 새로운 마음과 기분으로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어머니도 이번엔 반대하지 않았다. 그동안 기숙학원을 반대했던 어머니를 원망하고 있었다. 어머니도 선생님 뜻에 따라 학원에 보내지 않은 걸 후회하고 계셨다. 그렇게 부산행 기차를 탔다. 서울에 아무런 미련이 없었다. 첫 타지 생활에 대한 약간의 설렘도 있었다. 재수한 것에 대한 실망이 컸지만 다시 성적이 오를 수 있다는 기대도 있었다. 그렇게 기차 안에서 만감이 교차했다.

 

부산 중심가에 위치한 기숙학원에 도착했다. 사감 형과 누나들이 짐을 맡아 줬다. 입학생들은 쉴 틈도 없이 바로 교실에 들어갔다. 첫날이니 오리엔테이션이나 입학 행사를 할 줄 알았다. 그러나 우리가 도착하자마자 한 일은 공부였다. 다들 멀리서 오느라 피곤하고 긴장되었을 텐데.. 우리 모두 군말 없이 교실에서 공부했다. 물론 제대로 집중할 수는 없었다. 수능에 실패하고 낯선 환경에 들어왔으니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밤 12시가 되어서야 숙소에 갈 수 있었다. 큰 방 하나에 2층 침대들이 따닥따닥 붙어 있었다. 그 방에 30여 명의 재수생들이 잠을 잤다. 그리고 아침 7시에 교실로 향했다. 그 전에 공용 화장실이나 대형 욕실에서 씻고 가방을 챙겨야 했다. 조금이라도 숙소에서 늦게 나오면 “일어나! 이 게으름뱅이들아~!”라는 경비 아저씨의 호통을 들어야 했다. 그리곤 숙소의 문은 잠겨 졌다. 숙소는 잠만 자는 곳일 뿐 온 종일 교실에 있어야 했다. 사감 형, 누나들은 24시간 우리를 보살피고 통제할 의무가 있었다. 나이는 5살 정도 더 많은 대학 휴학생들이었다. 그들도 이곳 기숙학원 출신으로 모두가 서울대 혹은 의예 학과에 합격한 전설들이었다. 밤마다 사감 형들의 공부 비법과 생활 태도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잠들었다.

 

학원 재수생 모두가 부산과 통영, 남해, 울산 등 경상도 출신이었다. 서울에서 온 건 내가 유일했다. 그래서 다들 내게 호기심을 갖고 관심을 주었다. 당시 KTX가 활성화되지 않았고 우리 나이가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스무 살이었다. 나도 부산에 처음 왔지만, 그들도 서울 사람을 처음 본 것이다. 많은 친구들이 서울을 동경하고 있었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가서 서울에 정착하는 것이 인생의 꿈이었다. 자연스레 나는 많은 관심을 받게 되었다. 내게 서울에 대해 묻기도 하고 서울말을 알려 달라는 친구도 많았다.

 

사진_픽셀

 

따뜻한 부산 아이들

 

기숙학원 생활은 힘들었다. 수능 실패 뒤 학원 건물에 갇혀 지내는 것은 누구에게나 스트레스였다. 학원 건물 앞마당까지만이 우리에게 허용된 활동구역이다. 정문을 열고 나가거나 울타리를 넘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창밖을 바라보며 길거리를 자유롭게 걸어 다니는 사람들을 부러워했다. 이성 문제도 간과할 수 없었다. 스무 살의 남녀들이 하루 종일 교실에서 함께 지내다보니 누가 누구를 좋아하는 일은 다반사였다. 하지만 몰래 연애하다 걸리면 학원에서 쫓겨났다. 다들 자유와 감정을 억누르고 공부만 해야 했다.

 

그나마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은 운동이었다. 하지만 난 먹는 거로 스트레스를 풀었다. 당시 키 178에 몸무게 60킬로의 빼빼 마른 내가 재수를 하며 정상체중이 되었던 이유다. 한 달에 1박 2일, 혹은 두 달에 2박 3일로 잠시 집에 다녀올 수 있는 단체 휴가가 주어졌다. 서울에서 온 나는 휴가 기간이 길면 집에 다녀왔지만 1박 2일처럼 짧으면 부산 안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사감 형들에게는 이모가 부산에 살고 있다고 거짓말을 하고 안심시켰다. 그리고 홀로 부산의 해운대나 광안리, 서면 번화가를 돌아다녔다. 그러다 치킨이나 간식을 사 들고 혼자 모텔에 가서 잠을 자고 다음 날 학원으로 복귀했다.

 

그래도 스트레스는 계속 쌓였다. 여러 마음을 억누르다 보니 학원 생활이 점점 힘들어졌다. 이를 해소할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과거 상처를 줬던 아이들과 선생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후 공부할 때마다 왼손으로 머리카락을 쥐어 뽑는 습관이 생겼다. 다른 친구들은 머리를 뽑지 말라며 걱정 해줬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어느 순간 계속 머리를 쥐어 뽑고 있었다. 가끔은 밤마다 악몽으로 소리를 지르며 깨어나기도 했다. 같은 방 아이들이 자다가 놀랄 정도였다. 증상이 심해져 공부를 하다 이유 없이 눈물 흘릴 때도 있었다. 다행히 부산의 아이들은 나를 이상하게 여기거나 따돌리지 않고 위로해 주었다. 그들도 나와 같은 환경에 있었지만 따뜻하게 받아줬다.

 

사진_픽셀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하지만 재수학원에 온 지 5개월이 지나 내 머릿속은 더 황폐해졌다. 재수하는 내 모습에 자존감이 낮아졌다.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면 날 비웃는 것 같았다. 어떤 소리가 들리면 나를 욕하는 것 같았다. 심지어 학원 아이들이 나를 왕따 시킨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학원 아이들 누구하고도 말을 섞지 않았다. 그저 공부만 하려 했다. 아이들은 걱정하며 내게 말을 걸었지만 난 대답하지 않았다.

 

어느 날, 저녁 자율 학습 시간이었다. 내 뒤쪽에서 누군가 수군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나에 대한 험담으로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손바닥으로 책상을 강하게 내려쳤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교실에는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이내 반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내 행동에 대한 비웃음으로 느꼈다. 더욱 화가 나서 책상을 손바닥으로 마구 내려쳤다. 그제야 반에 적막이 흘렀다. 반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형이 나를 데리고 교실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학원 교무실로 가서 우리 반 담당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게 했다. 선생님과 형은 내게 “많이 힘들었나 보구나?”라는 한마디 말을 던졌다. 순간 눈물이 쏟아졌다. 이제는 부산을 떠나야 함을 느꼈다. 이대로라면 스트레스가 계속 쌓여 미쳐갈 것 같았다. 이런 나로 인해 다른 친구들에게까지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날 서울의 집으로 보내달라고 울며 애원했다. 선생님과 형은 나를 위로하고 달랬다. 하지만 나는 당장 서울로 보내달라고 사정했다. 선생님은 걱정하며 말했다.

“집에 보내주더라도 지금은 너무 늦었는데 어떻게 가겠다는 거니?”라며 걱정돼서 지금은 보내 줄 수 없다고 말했다.

 

결국 그날 밤은 혼자 일찍 숙소 방으로 돌아왔다. 시간이 흘러 자율학습을 마친 아이들이 방에 돌아왔다. 아이들은 하나같이 내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괜찮은 거니?” “무슨 일이 있었느냐?” “혹시 내가 잘못한 게 있느냐?”며 걱정하고 위로해줬다. 나는 울면서 “너희들이 나를 싫어하지 않았느냐!”라고 말했다. 그러자 아이들은 아무도 너를 싫어하지 않는다며 달래 주었다. 그 말을 듣자 더욱 눈물이 쏟아졌다. 그리고 내가 이곳에 있으면서 더 이상 피해를 주면 안 되겠다고 판단했다.

 

다음 날 아침, 한 친구에게 내 대신 짐을 모두 싸서 서울로 보내달라고 은밀히 부탁했다. 그 친구는 흔쾌히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난 교실에서 공부하는 아이들 뒤로 작별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 황급히 서울행 기차를 탔다. 아이들은 내가 휴가를 얻어 서울에서 잠시 쉬다 오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난 사실대로 말하고 작별인사를 나눌 면목이 없었다. 그들을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이곳을 떠나야 했다. 부산 기숙학원에서 나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부산의 친구들에게 참 미안하고 고맙다. 우리 모두가 똑같이 힘든 상황에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서로 의지하고 격려하며 재수 생활을 버텼다. 그러나 난 그 친구들을 오해하고 때로는 원망했다. 특히 매우 이기적이고 기이한 행동을 보였던 나를 수용하고 걱정해 준 친구들이었다. 만약 그 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아이들을 서울로 초대하여 경복궁과 남산타워, 롯데월드를 구경시켜주고 싶다. 학원에 있을 때 휴가 기간 충분히 할 수 있었던 일이라 더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서 더욱 미안하고 고마울 뿐이다.

 

 

* 정신의학신문에서 독자기고 칼럼을 게재합니다. 많은 분들의 관심과 참여 바랍니다.
(정신의학신문 홈페이지 - 게시판 - 우리가 하고 싶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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