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우경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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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가”라는 말을 들어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고려 시기인 1198년 5월 사노비 만적을 중심으로 최초로 노비들이 천민 해방을 위해 난을 일으켰습니다. 이때 만적은 중국 진 말기 진승·오광의 농민반란을 일으킨 진승의 말을 인용해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가”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진승과 오광의 난이 기원전 209년 무렵이고 만적의 난이 지금으로부터 거의 천 년 전이었으니, 이렇게 오래전부터 신분제도와 이에 따른 차별적 시선에 대한 저항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오래전에도 반대가 극심했던 출신 성분에 따른 차별이 21세기인 오늘날 다시금 문제가 되는 사건이 얼마 전 발생했습니다. 이른바 ‘왕의 DNA’ 사건으로 불리는 한 학부모의 교사에 대한 무리한 요구와 관련된 일입니다. 최근 서이초 교사 사망 사건을 시작으로 교권 침해와 학부모 갑질 논란이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지목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 사건이 더욱 주목받은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학부모가 일반 직장인이나 다른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이 아닌 교육부 5급 사무관이라는 점, 이전 담임교사를 아동학대 혐의로 신고해 직위해제 시켰다는 점입니다. 교육부 사무관으로서의 직업적 위치나 권력을 남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과 함께 이전 담임교사에 대한 신고 조치는 이번 사건이 처음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더해 이번 사건에서 눈여겨봐야 할 또 다른 부분은 바로 ‘왕의 DNA’와 ‘극우뇌’ 같은 표현이 학부모의 교사에 대한 요구 사항이 기재된 편지에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이 용어가 약물치료 없이 상담만으로 자폐와 ADHD, 틱장애를 치료한다고 알려진 한 연구소에서 사용하는 용어임이 알려지면서 파문이 일고 있습니다. 이 연구소의 온라인 카페에는 약 5,400명의 회원이 있으며, 이러한 치료법을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는 이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치료법은 일반적인 자폐증, ADHD, 틱장애 치료법과 맞지 않으며, 공인된 전문가가 아닌 비의료인에 의해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큰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ADHD, 자폐증, 틱장애 등에서 약물치료가 갖는 효과는 결코 무시할 수 없습니다.

증상 및 행동 조절의 측면에서 약물은 중요성을 가지며, 비약물적 치료법과의 병행을 통해 긍정적인 예후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환자 보호 및 적절한 치료적 개입을 위해 반드시 공인된 전문가에 의해 치료가 이뤄져야 합니다. 또, 특정 치료법을 통해 해당 증상이 완전히 고쳐질 수 있다는 식의 접근은 주의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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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사건은 우리 사회에서 정신건강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비전문가에 의한 잘못된 치료가 어떤 문제를 가져올 수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에 해당합니다. 또한 왕의 전문가, 극우뇌와 같은 극단적인 주장과 과학적, 임상적 근거가 결여된 잘못된 치료가 얼마나 성행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게끔 합니다. 아이들을 잘 이해하고 효과적으로 육아하기를 원하는 학부모들의 마음, 자녀가 겪는 어려움에 잘 대처하고 증상이 완화되어 사회적으로 잘 적응하기를 바라는 소망을 악용하여 잘못된 지식과 치료법으로 더 큰 문제를 가져올 수 있는 위험한 방식을 택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제대로 된 전문지식과 수련 과정, 임상적 경험 없이 잘못된 정보와 치료법으로 많은 사람을 위험에 빠트리는 일이야말로 선무당이 사람 잡는 형국에 해당합니다. 눈앞의 이익을 위해 잘못된 치료법을 효과적이라고 주장하거나 이를 홍보하지 못하도록 강력한 규제가 요구되는 까닭입니다.

또한 학부모님들은 아이들의 기질과 성격, 육아 방식, 정신장애 치료 등을 위한 도움을 받으실 때 해당 전문가의 약력과 전문 분야 등을 잘 살펴보시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증된 기관에서 학위를 받고 수련 과정을 거쳤는지, 국가 또는 해당 분야의 학회로부터 인증된 전문가 자격증을 취득했는지를 면밀히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민간 사설 기관이나 공신력을 갖추지 못한 곳에서 취득한 자격증만 가진 경우라면 전문가로서의 역량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물론 이런 전문가로서의 역량을 일반 학부모님들이 모두 파악하고 평가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은 일입니다. 그렇기에 국가로부터의 강력한 관리 감독과 함께 정신건강 분야 전문가들이 힘을 합쳐 이런 상황들이 하루빨리 개선될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또, 전문가를 통한 양육 방식과 치료법을 이해하고 아이에게 적용하는 것은 좋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학생을 가르치고 보살피는 교사들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도록 적정선을 지킬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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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라는 말이 자주 쓰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학생들의 인권이 존중되고, 교사들의 체벌이나 폭행을 금지하는 것으로 교육 관점이 바뀌면서 이 말은 이제 구시대의 유물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교사들의 권위가 지금보다 셌던 시절, 일부 교사들은 그 권력을 남용해 학생들에게 폭언이나 폭행을 가하기도 했고, 교육자이자 스승으로서 보여서는 안 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 반대급부로 학생 인권이 강조되면서 요즘에는 오히려 학생이 아닌 교사의 인권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교사와 학생, 스승과 제자의 힘의 관계가 역전된 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누가 강자고, 누가 약자이든 씁쓸함을 감출 수 없습니다. 나이나 지위, 역할에 관계없이 서로 신뢰하며 존중하고 배려할 수 있다면, 그래서 갑을 관계가 아닌 상호적 관계가 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신뢰와 존중, 배려가 없어진 빈틈을 불신과 갑질, 무리한 요구가 대신 채우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에 비전문가에 의한 잘못된 치료법으로 인한 폐해, 내 아이가 교실에서 온전히 관심받고 케어받기를 바라는 소망이 일그러진 방식으로 표출되어 이번 사건이 발생한 것 아닐까요.

정신건강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전문가에 의한 치료, 내 아이가 사랑받고 존중받기를 바라는 만큼, 타인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요구되는 때입니다.

 

강남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우경수 원장

우경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강남숲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대구가톨릭대병원 의과대학 학사 , 석사
대구가톨릭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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