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최강록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저희 어머니는 평생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한 채 살아오셨습니다. 외조부모님과 외가 가족들은 어머니에게 엄격하셨고, 학업에 두각을 나타냈던 어머니가 대학교에 진학하고자 했을 때도 학비를 지원해 주지 않아서 꿈을 포기하고 취직을 하셨습니다.

그러다 아버지를 만나서 결혼하셨지만, 아버지와도 그렇게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십니다. 아버지는 가족들을 통제하려는 성향과 욱하는 성격으로 집안 분위기가 냉랭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나 동생도 아버지와 거리가 있는 편이고, 아버지 주변에 가까운 친구나 지인들도 많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본인의 스트레스나 감정들을 어머니께 더 푸는 것 같고, 어머니와의 관계에 더 집착하시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버지께 제대로 대응하거나 본인의 감정을 이야기하지도 못하고 그냥 삭일 때가 대부분입니다.

이런 상황을 계속 보다 보니 어머니가 안쓰럽고 불쌍하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이제 저도 성인이 되었으니 좋은 곳도 많이 모시고 가고, 함께 시간을 보내야겠다는 의무감도 듭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저와 생각이나 가치관도 다르고, 저에게 너무 의지하시는 것 같아서 부담스럽고 지치기도 합니다. 본인의 기준에 저를 맞추려고 하시기도 하고요.

그래도 시간이 날 때마다 어머니와 바람도 쐬러 다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어머니는 제가 더 많은 시간을 어머니와 보내고 즐겁게 해 주기를 원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럴 때마다 안타깝기도 하면서 숨이 막히는 것 같은 답답함이 밀려옵니다. 내가 그걸 다 채워 줘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어서요.

그리고 저에게 아버지나 다른 사람들이 본인에게 서운하게 했던 것들을 자꾸 이야기하면서 “힘들다, 사람들이 자꾸 상처를 준다, 너라도 엄마 마음을 알아줘야 하지 않냐.”라고 하시는데 그럴 때마다 너무 부담스럽습니다. 엄마가 저에게 지나치게 의지하지 않고 본인의 삶을 사셨으면 좋겠는데, 과연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어머니를 책임져야 할 것 같은 부담감과 함께 다른 한편으로는 어머니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생각에 죄책감이 듭니다.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족들로부터 떨어져 독립하면 좀 나아질까요?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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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안녕하세요, 사연자님. 보내 주신 고민 잘 읽어 보았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공감, 안쓰러움과 함께 부담감, 죄책감 같은 상반된 감정들이 올라와 어려움을 겪고 계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관계적 어려움을 경험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어려운 것이 바로 가족 안에서 경험하는 갈등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타인이라면 관계를 단절할 수 있지만, 가족은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사연자님이 현재 느끼시는 혼란스럽고 상반된 감정은 ‘양가감정(ambivalent feeling)’이라는 용어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양가감정이란, 어떤 대상에 대하여 긍정적 감정과 부정적 감정같이 상충되고 공존할 수 없는 감정을 함께 느끼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양가감정을 경험할 때 우리는 심리적으로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게 됩니다. 어떤 대상이 명확하게 좋다거나 나쁘다는 식으로 단순화하여 일관된 평가를 하기 어렵기 때문이죠. 나를 힘들고 괴롭게 하는 사람이 동시에 나에게 사랑을 주고 지지해 주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우리 마음은 혼란을 느낍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어떻게 대할지 어려워지는 것이지요.

사연자님의 경우 어머니께 이런 양가감정을 느끼고 계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마음을 터놓고 의지할 사람이 없는 어머니가 사연자님께 정서적으로 많이 의지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또, 사연자님 역시 어머니의 외로웠던 삶과 공허함에 깊이 공감하면서 자녀된 도리로서 효도하려는 마음과 함께 어머니의 결핍을 채워 주고자 노력하고 계시는 모습이 보입니다. 이런 사연자님의 마음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노력이 지나쳐 사연자님 스스로를 힘들게 하는 면이 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어머니께 해드릴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부분에 대한 구분과 경계를 짓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자녀가 성장하면서 어느 순간 부모님의 보호자 역할을 하는 관계의 역전, 재정의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부모님이 연세가 들고 쇠약해지시면서 자녀들이 부모님을 모시고 병원에 가는 등 보호자 역할을 하는 것이 대표적이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서 역전되지 않는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현재 사연자님과 어머니의 관계에서는 어머니가 사연자님에게 “네가 내 마음을 알아줘야 한다. 네가 내 마음의 공허함을 채워 줘야 한다.”라는 메시지를 직간접적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연자님은 이에 반응하면서 어머니의 정서적 욕구를 모두 채워 주려고 노력하는 동안 심적 소진을 느끼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억할 것은 사연자님이 어머니께서 외조부모님, 남편, 주변의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충족받지 못한 모든 욕구를 다 채워 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또, 사연자님이 장성한 자녀로서 어머니께 일정 부분 보호자 같은 역할을 할 수는 있지만 모든 것을 다 해 드려야 한다는 비현실적인 기대를 갖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비현실적 기대를 내려놓고 현실적인 한계를 인정하는 것은 사연자님께도, 어머니께도 모두 필요한 작업입니다.

이를 위해 지금처럼 어머니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마음을 나눠 드리되, 사연자님이 스스로 지치지 않을 만큼의 경계를 설정해 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예를 들어 일주일에 한 번, 세 시간 어머니와 시간을 보내겠다고 계획하고 이를 어머니께도 공유해 드려서 어머니가 막연하게 더 많은 시간을 보낼 것이라고 기대하시지 않도록 하는 것이지요.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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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어머니가 지나치게 정서적으로 의지하실 때는 부담스러움을 표현해 보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어머니는 사연자님이 혼자 힘들어하는 것을 모르고 계실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무리 가까운 가족이라도 표현하지 않으면 알기 어려운 부분이 많습니다. 사연자님 역시 때로는 어머니로부터 지지받고 싶고, 어머니의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듣기만 하면 지친다는 것을 어머니께서 알 수 있도록 해 주세요. 처음에는 본인의 감정이나 상황에 몰입해서 사연자님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반복적으로 이런 메시지를 전달하다 보면 어머니께서도 조금씩 경계를 인식하시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현재 사연자님이 느끼는 양가감정이 잘못되거나 이상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인지하시고, 스스로의 감정을 인정해 주세요. 어머니를 부담스러워하고 거리를 두고 싶은 마음은 자연스러운 감정입니다. 이런 감정을 억누르고 없는 것처럼 모른 척하기보다는 ‘그럴 수 있다.’라고 인정해 주면서 건강한 방식으로 어머니와 소통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 사연자님께 더 도움이 될 것입니다.

독립하면 도움이 될지 고민하고 있다고 하셨는데, 물리적으로 가족들과 거리를 두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물리적인 분리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바로 심리적으로 분리되고, 독립된 인격체로서 서로를 인정하고 건강한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이 과정을 심리학적으로는 ‘분리 개별화’라고 합니다.

어머니는 사연자님이 이 세상에 존재하도록 해 준 분이며, 사연자님의 세계를 구성하는 중요한 한 축입니다. 이 관계가 공고히 유지되면서도 어머니로만 국한되었던 세계가 점차 더 많은 사람, 환경과 연결되면서 성장하고 발달해 가는 것입니다. 사연자님이 어머니와 건강하고 균형 잡힌 관계를 유지하면서 보다 넓은 세계로 나아갈 수 있기를 응원합니다.

 

사당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최강록 원장

최강록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당숲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한양대 의과대학 학사, 석사
(전)의료법인 삼정의료재단 삼정병원 대표원장
한양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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