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김인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엄마를 미워하면서도 불쌍한 감정이듭니다. 고생을 많이하셨고 저를 힘들게 키우셨어요. 그런데 제가 아이를 키워 보니 엄마가 저를 방치하고 한 번도 제가 원하는 걸 해주지 않았다는 게 한편으론 화가 나요. 

살기 힘들어도 자식이 원하는 인생을 응원해주는 부모도 있잖아요. 경제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한 번도 있는 그대로의 제 자신을 받아 준 적이 없습니다. 힘들다고 해도 이깟게 힘드냐, 뭘 하고 싶다고 해도 돈 때문에 안 된다... 저는 제 욕구를 억누르고 살다 보니 이젠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 않네요.

지금은 돈이 있어도 뭐 하나 제 자신을 위해 시작하는 게 자신이 없어요.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늘 상대방에게만 맞추고 할 말도 못하고 살다 보니 너무 지쳐서 나가 떨어지게 됩니다. 제 감정에도, 사람들과의 관계에도 솔직한 제 자신을 보여주면 저를 싫어할까 봐 늘 가면을 쓰고 삽니다.

이런 제 자신이 싫고 답답해서 언젠가부터 사람도 거의 만나지 않고 혼자만 지내고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부모님이 저에게 미안해하고 인정하면 제 상처가 조금 아물 텐데 오히려 저를 탓하는 모습을 볼 때 너무 화가 납니다. 

형편이 어려웠다고 제가 모든걸 이해해야 하나요? 올 추석 때 가족들도 만나기 싫습니다. 겉으로는 웃으면서 속으로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거짓 인생을 살고 싶지 않아요. 저는 더 이상 제 감정을 속이면서 살고 싶지 않아요.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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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안녕하세요 사연자님, 남겨 주신 글 잘 읽어 보았습니다. 사연 마지막에 ‘더 이상 감정을 속이면서 살고 싶지 않다.’고 말씀하셨는데요. 다르지만 보다 정확한 표현으로 바꾸면 ‘내 감정을 존중하며 살고 싶다’는 마음이 아닐까 합니다. 사연자님이 한 번쯤은 거울 앞에서 자신을 보면서, 두 문장을 직접 말로 해 보셨으면 합니다. ‘내 감정을 속이면서 살기 싫어.’ 이 말을 하고 나면 기분이 어떤가요? 아마 따라오는 감정은 슬픔, 괴로움, 환멸감, 우울함 등 주로 부정적인 감정일 겁니다. 

우리 마음에서 이러한 부정적인 감정이 느껴질 때는 더 나아가, 그래서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로 초점을 다시 맞추어야 합니다. 그래야 부정적인 감정에 매몰되어 시야가 좁아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원하는 것, 즉 자신의 욕구를 알아차리고 인정할 때, 내 일상이 나아갈 방향이 어디인지 명확히 보이게 됩니다. 그 방향으로 조금씩 걸어가면서 이전과는 다른 변화가 시작됩니다. 

거울 속 자신을 보거나, 아니면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고 눈을 감은 채 두 번째 문장을 한번 말해 보세요. ‘이제 나는 내 감정을 존중하면서 살고 싶어.’ 어떤 감정이 드나요? 저라면 마음이 애잔하고 뭉클하고, 한편 스스로가 기특한 마음도 듭니다. 그리고 이 감정들이 자기 존중과 진정한 자기 사랑의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사연자님께서 가야 할 방향이라고 보고요. 

 사연자님께서 거짓 인생을 살고 싶지 않다는 지금의 괴로운 상태는 사실 정말 반갑고 환영할 만한 변화입니다. 그동안 사연자님께서 이리저리 가족과 타인에게 치이며 온 에너지를 다 쏟아내고서야 나온, 아주 솔직한 사연자님의 진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겉과 속이 다른 괴리감 있는 거짓된 삶을 연기하기 지긋지긋하고, 더는 에너지를 쓸 수 없다는 것을 뼈져리게 느끼신 것이죠.

 

 상대방에게 늘 맞추지 않고, 내가 원하는 대로 사는 삶. 사연자님도 이제는 살 수 있습니다. 기꺼이 살아도 됩니다. 정말 그렇게 사셨으면 합니다. 물론 그동안 익숙한 패턴을 내려놓는 것은 시간이 걸리는 일입니다. 하지만 지금 기존 생활 방식으로 돌아갈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은 이미 멀리 와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맨날 한여름에 두꺼운 롱 패딩과 긴 바지를 입고 다니다가 벗어던진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제는 계절에 맞는, 즉 내 마음이 원하는 옷을 입어야 하는 시점에 온 겁니다. 그러니 이제 옷을 고를 일만 남았습니다. 이제까지 한 번도 입어 본 적이 없는 새로운 스타일의 옷을 입으려면 마음이 어떻습니까. 용기가 필요하지요. 덜컥 두려움이 자극되고 살 떨리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멈출 수 없습니다. 예전과 같이 못 살겠다는 그 느낌이 이미 ‘변화’의 과정 중에 서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미 기존에 걸어가던 길을 벗어나 새로운 길 한 가운데에 서 있습니다. 이제 원하는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시면 됩니다.

 단, 지금은 신뢰할 만한 전문가와의 소통이 필요합니다. 목적지로 가는 길을 잘 아는 사람과 동행하는 것이 당장은 급합니다. 아니면 계속해서 익숙했던 길로 미련을 갖고 돌아가거나, 도중에 주저앉아 아무것도 못하게 됩니다. 지금 사연자님처럼요. 현재 혼자만 지내는 시간이 더 길어져서 좋을 일은 없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사연자님의 진심을 표현할 수 있는 전문가를 만나야 합니다. 자신과 타인에게도 거짓 없이, 진실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내 마음을 알아차리고 타인에게 표현하는 연습을 많이 하시면 됩니다.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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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사연자님은 솔직한 나를 그대로 표현해 본 경험이 드물거나 없었고, 누군가에게 수용될 거라는 기대조차 마음껏 가져 본 적이 없으셨던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원가족인 어머니에 대해 해결 안 된 많은 욕구가 있습니다. 지금의 사연자님에게 어린 시절부터 큰 영향력을 끼친 대상이 어머니시고,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가 많이 있습니다. 이 상처와 직접적인 관련 있는 어머니가 책임을 지고, 보상한다면 아마 조금이나마 치유되는 부분이 있었을 겁니다. 그렇지만 오히려 사연자님을 탓하시니, 화가 치밀어오는 게 당연합니다. 어머니께 진심 어린 사과와 이해를 바라는 사연자님의 욕구가 좌절되었으니까요.  

사연자님은 여전히 어머니에게 건강하고 다정한 부모 역할을 갈망하고 있지만, 이러한 강렬한 소망은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오랜 세월 좌절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그 소망을 이룰 능력이 부족한 대상에게 계속 기대하는 일은 계속 좌절을 가져다줄 수밖에 없습니다. ‘상대방이 예전과 다르게 이렇게 저렇게 하면 내 마음이 변할 텐데..’ 라는 말씀을 하셨는데요. 이 문장이 전제하고 있는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상황을 변화시키는 힘이 나보다는 상대방에게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나의 행복과 좌절을 좌지우지하는 힘을 상대방에게 더 실어 주면, 상대방의 반응에 일희일비, 전전긍긍하는 ‘의존적인 삶’을 살도록 만듭니다. 

사연자님께 현실적인 이야기를 드리자면, 현재 원가족에 대한 감정을 원가족으로부터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닙니다. 정말로 안타깝지만 삼켜내야 하는 현실입니다. 그동안 표현되지 못하고 억압된 감정과 욕구들은 어머니가 해결하지 못합니다. 해결할 능력이 사실 없으십니다. 어머니는 사연자님의 욕구를 섬세하게 읽을 능력이 부족한 분이고, 사연자님이 무엇인가 바라는 마음, 사람으로서 가지는 욕구들을 자연스럽게 수용하기보다는 억압하고 희생하라는 메시지를 계속 던졌습니다. 아마 어머니 자신이 살아온 방식 그대로 자녀에게 대물림한 것들이 참 많을 겁니다. 

사연자님이 어머니에게 받은 심리적인 유산 중에는 좋은 것, 안 좋은 것 모두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제는 사연자님의 삶에 해로운 것들은 정리하고, 이로운 것들만 남기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어머니가 아니라 신뢰할 수 있는 전문가를 만나 솔직하게 자기를 표현하면서 원하는 삶을 논의하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타인으로부터 자유로운 솔직한 삶을 살고 싶기를 원하신다면, 타인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의지하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내 목소리를 존중하는 역할을 타인에게 맡기지 않고 내가 이제부터 해 나가면 됩니다. 사연자님이 받은 상처들의 많은 책임이 타인에게 있다 해도 그와 별개로 사연자님 역시 자기 상처를 보듬어줄 수 있는 주체라는 사실을 기억하셨으면 합니다.

 

사연자님께서 어머니라는 타인으로부터 인정과 공감을 힘들게 얻는 길을 굳이 가지 않고도, 자신에게서 인정, 존중, 사랑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제는 성인이기 때문에 무언가를 기대하는 대상은 1순위로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을 의지하고 신뢰할 수 있으려면 내 생각과 감정이 명료해야 합니다. 즉, 명확한 자기 인식이 자신감의 기초가 됩니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튼튼한 인식이 쌓일 때, 타인과 나 사이에 건강한 경계선이 세워집니다. 그리고 타인이 공격하거나 지나치게 침범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관계에서 너무 지쳐서 나가떨어지는 일 없이, 적당히 에너지를 쓰면서 사연자님의 마음을 자신 있게 표현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실 겁니다. 

지금 변화가 시작되었으니 많이 혼란스럽겠지만, 진정 자기다운 삶을 살기로 한 자신의 결정을 아낌없이 지지해주셨으면 합니다. 곁에서 함께 동행할 전문가를 만나셔서 그동안 받지 못한 인정, 존중, 응원과 지지를 듬뿍 받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사연자님의 새로운 삶을 진심으로 지지하고 응원하겠습니다. 

김인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당신의숲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서울아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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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때 선생님 글을 만났더라면 좀더 빨리 우울감에서 헤어나올 수 있지 않았을까?"
    "글 내용이 너무 좋아 응원합니다. 사소한 관계의 행복이 회복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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