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이호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무기력증인지는 모르겠는데 정말 지하철 타러 가는 게 너무 힘들고, 준비하는 시간도 힘들고, 그냥 사라지고 싶어요. 엄마랑은 원래도 자주 싸웠어요. 사실 제 잘못이 많은 것 같아요. 어릴 때는 엄마랑도 사이가 좋았던 것 같은데 원래 저는 아무리 싸워도 엄마 옆에 꼭 붙어서 잤었거든요. 초등학교 2학년 때 엄마한테 많이 혼나고 많이 맞고서 갑자기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난 아직 어린아이고 이렇게 많이 맞을 만큼 잘못하지 않은 것 같은데, 이런 거는 말로 천천히 설명해 줘도 내가 잘 이해할 수 있는데 엄마는 왜 이렇게 하지? 내가 엄마라면 내 아이한테는 이렇게 설명해 줘야지.’  

그래서 그날 이후로 엄마랑 같이 안 잤어요. 이후로 사이는 점점 안 좋아졌고, ‘엄마가 나한테 미안하다고 한마디만 하면 될 걸 사과는 왜 안 하시지?’ 그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엄마한테 혼나거나 엄마가 이해 안 되는 행동을 하시고 그럴 때마다 ‘내가 나중에 커서 엄마가 되면 이런 상황에서는 절대 엄마처럼 안 하고 이렇게 해 줘야지.’ 이런 생각을 진짜 습관처럼 했어요.

저는 제가 좀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진짜 훌륭한 애들도 많고, 저는 열심히 하지 않으니까요. 엄마가 원래 저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는 건 알고 있어요.

몇 달 전에 갑자기 엄마한테 전화가 온 거에요. 학원이어서 전화를 못 받았는데 선생님께 전화를 하신 거예요. 언니가 시킨 택배를 보고 저더러 시켰느냐면서 화를 내셔서 이게 선생님한테까지 전화할 일인가 싶어서 저도 엄청 화가 났죠. 그래서 엄마한테 “이런 전화 계속할 거면 차단한다. 집에 가면 얘기를 하던가 학원에서 그림 그리고 있는데 그걸 못 참아서 원장 선생님한테 전화하느냐. 자고 있는 언니를 깨워서 물어보든가 왜 굳이 멀리 있는 나한테 전화하는 거야?” 이렇게 보냈어요. 

제가 너무 버릇이 없었죠. 근데 답장으로 엄마가 저한테 처음으로 사과를 하신 거예요. 이렇게 사소한 거에 원래는 아예 미안하다는 얘기를 하신 적이 없는데…. 사과를 해서 좋아해야 하는데, 저는 이 문자를 받고 너무 우울했어요. 솔직히 당황스럽고 마음이 좀 착잡했어요. 그리고 뭔가 돌덩이 같은 게 더 깊은 곳으로 가라앉은 것 같았어요. 동시에 ‘엄마한테 너무 심했나?’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부모님 두 분 다 좋으신 분이고, 저랑 언니도 좋은 사람 축에 속하는 것 같아요. 

부모님을 제가 선택하는 게 아니듯이 부모님도 저를 선택한 게 아니시잖아요? 그래서 밖에선 다들 좋은 사람이어도 집에서는 아닐 수 있다는 것 이해해요. 그리고 오늘도 아침에 엄마가 제가 학원에 지각하는 것에 대해서 엄청 화를 내고 가셨거든요. 근데 제가 오늘따라 마음이 울적했는지 아침부터 지금까지 계속 울고만 있어요. 원래 눈물이 엄청 없는 편인데 말이죠. 근데 메시지를 보니까 “엄마가 아침부터 소리 질러서 미안하다.”라고 하시는 거예요.

왜 사과하시는 건지 이해가 안 가요. 물론 사과하시는 게 어려웠겠지만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는데 왜 저한테 두 번만 하신 걸까요? 원망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저도 이런 제 마음을 잘 모르겠어요. 알려 주세요.

 

사진_ freepik
사진_ freepik

답변)  안녕하세요, 사연자님께서 올려주신 사연글 잘 읽어 보았습니다. 사연자님의 글에서는 정확한 나이를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학원을 다닌다고 하시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학생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사연자님께서는 최근 어머니와 있었던 일 그리고 그동안 성장하면서 어머니와 맺어 왔던 관계 방식이나 몇 가지 주요한 일들이 떠오르면서 다소 우울감과 혼란스러움을 느끼시는 듯합니다.

사연자님께서는 평소에 어머니와 자주 부딪치시는 편 같은데요, 이로 인해 죄책감이 든다거나 자신이 부족하다는 생각으로 귀결되는 모습도 엿보이는 듯하여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가족이란 우리에게 가장 친밀하고도 사랑하는 존재이지만,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경험과 상호작용을 하다 보니 때로는 갈등이 발생하기도 하고, 상처를 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사연자님께서는 아마도 초등학교 2학년 때, 본인은 그다지 큰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자신의 행위로 인해 어머니로부터 과도한 훈육과 체벌이 있은 후로 어머님에 대한 서운함과 속상함이 마음의 상처로 남으신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당시에 어머니로부터 진심 어린 사과의 말을 듣고 싶으셨던 것 같아요. 그러나 어머니는 그 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으셨기에, 그때의 일이 사연자님께서 어머니와 감정적 거리를 두시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다시 한 번 어머님께 화나는 일이 있으셨고요. 어머니께서 언니가 시킨 택배를 언니에게는 확인도 하지 않고, 학원에 있는 사연자님께 전화해서 다짜고짜 성을 내셨네요. 아마도 이 상황에서 사연자님께서는 억울한 마음이 드셨을 것 같아요. 택배를 시킨 사람이 누군지 확인도 하지 않고, 그것을 사연자님이 시킨 거라고 단정하고, 크게 중요하거나 급한 일도 아닌데 학원에 있는 사연자님께 전화까지 해서 확인하는 어머님의 모습에 당황스러움과 함께 억울한 마음이 드셨던 거지요.

사연자님께서는 그런 어머니의 행동이 너무 과할뿐더러 자신에게 몹시 부당한 처사라는 생각이 들어 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어머님께 정확히 표현하셨어요. 그런데 뜻밖에도 어머님께서 지금껏 하지 않던 사과 표현을 하자, ‘내가 엄마한테 너무 심했나?’ 하는 자책감이 들기도 했고요. 그러나 사연자님께서 이 부분에 대해 자책하지 않으셔도 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어머님께서도 자신의 행동이 옳지 않았다고 반성하는 마음이 있으셨기에 사연자님께 사과를 하신 겁니다. 

 

사진_ freepik
사진_ freepik

어쩌면 과거에도 지금처럼 어머님의 사과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순간이 있었듯이 정말로 어머님께서 사연자님께 사과하셔야 했던 일들도 있을 겁니다. 사연자님께서 지금보다 더 어린 아이였을 적에는 뭔가 부모님께 억울하고 화가 나는 일이 있어도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몰라서 꾹 참고 그냥 넘긴 일이 대부분이었을 거예요. 그러나 이제는 그가 비록 부모님이더라도 자신에게 부당한 대우를 하는 사람에게 항변할 수 있을 만큼 내면이 성장한 것이라고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건강한 자기표현의 한 형태이고, 어머님께서도 그런 사연자님의 표현을 통해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고 인정하셨던 거죠.

사연자님께서 문자를 통해 어머니께 자기 의사를 잘 전달하셨지만, 한 가지 덧붙이자면 “이런 전화 계속할 거면 전화를 차단한다.”는 내용은 사연자님의 진심도 아닐 테고, 어머님께서 받아들이시기에 좀 거친 표현일 수도 있으니 적당한 정도로 조절해서 의사를 표현하신다면 좋겠습니다. 또 이때 사실 관계에 기반해 의견을 밝히는 것과 더불어 사연자님께서 느끼시는 감정도 함께 표현해 주실 것을 추천 드립니다. 가족과 같이 가까운 사이일수록 서로의 생각은 물론 솔직한 감정을 표현하고 공감함으로써 ‘진짜 소통’의 길이 열릴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엄마가 이런 일로 확인도 하지 않고 나에게 화만 내니 너무 속상하고 억울해요. 앞으로는 저를 좀 더 믿어 주셨으면 좋겠어요.”라고 사연자님의 솔직한 마음과 바람을 전하시는 거죠.  

가족이라는 이유로 우리는 말하지 않아도 서로 ‘이해하겠지, 진짜 내 마음은 그게 아니니까.’라며 서로에게 정말 필요한 이야기나 감정은 표현하지 않고 마음속에만 담아 두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서로에 대한 오해만 깊어지고, 진짜 마음은 다른 것들에 가려져 잘 볼 수 없게 되기도 하죠. 

어린아이의 시점에서는, ‘어른이면 또 부모라면 저러면 안 되는 거잖아.’라고 생각할 수 있어요. 특히 부모님께서 양육 태도에 일관성이 없다거나 감정적으로 미성숙하게 자녀를 대하는 경우가 빈번하다면 자녀가 느끼는 불안감이나 억울함도 커질 수 있습니다. 다만, 사연자님께서도 좀 더 자라신다면 부모님도 완벽하지 않은 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날이 오실 거예요. 그러니 어머님께서 사연자님을 사랑하시는 마음과는 별개로 때로는 마음과 다르게 행동해 사연자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기도 하고, 실수도 하시는 것이죠. 우리는 누구나 실수를 합니다. 그건 사연자님도 저도 마찬가지일 거고요.



아마도 사연자님께서는 원체 심성이 착하고, 여린 분이 아닐까 짐작됩니다. 그래서 어머님께서 사과하셨을 때 괜히 미안해지고 죄책감도 느끼셨던 것 같아요. 그리고 어머님과 부딪쳐 속상할 때마다 어머님께 화를 내거나 원망하기보다 사연자님께서 커서 엄마가 되면 ‘내 자녀에게만큼은 엄마처럼 하지 말아야지.’ 하는 마음이 깊게 자리 잡으신 듯합니다. 한편으로는 참 대견하시고, 또 한편으로는 안타깝습니다. 

그런데 누군가와, 특히나 가까운 사람들과 제대로 소통하는 것도 어느 날 갑자기 잘하기는 힘듭니다. 자꾸만 연습이 필요합니다. 물론 사연자님께는 얼마든지 기회가 많으니 앞으로는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기분 나빴던 일들은 기분 나빴다, 속상한 일은 속상했다, 고맙다, 즐겁다, 슬프다, 이렇게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연습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머님께서 그동안 한 적 없던 사과를 사연자님께 하셨던 것은 어머님께서도 충분히 사연자님과 솔직한 마음을 나누고 소통할 준비가 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연자님께서 원래 눈물이 없는 편인데 오늘따라 하루 종일 눈물이 흘렀다는 것은, 아마도 사연자님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어머님께 수용받는 경험을 하시면서 그동안 억눌러 왔던 사연자님의 감정이 표출되신 것이 아닐까 짐작됩니다. 그러니 어머니께서 사과해 주신 그 마음 그대로 잘 받아 주시고, 과거에 어머니로부터 상처받았던 일도 적당한 기회에 차분히 이야기를 꺼내 보면서 어머니와의 묵은 감정과 서운한 마음은 흘려보내시고, 다시 좋은 모녀 관계를 만들어 가시기를  응원하겠습니다.

 

서대문봄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이호선 원장

 

이호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서대문봄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학사, 석사
한양대병원 외래교수, 한양대구리병원 임상강사
(전)성안드레아병원 진료과장, 구리시 치매안심센터 자문의, 저서 <가족의 심리학> 출간
전문의 홈 가기
  • 애독자 응원 한 마디
  • "매번 감사합니다. 정말 공감되는 글입니다. "
    "너무 좋은 글이라는 걸 느끼고 담아갑니다. "
    "이런 글이 더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 듭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정신의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