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이규홍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저는 서울에서 지내다가 남편의 일 때문에 지방에 와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아무런 연고가 없는 지역이고, 처음에는 일 년 정도 지낼 거라 해서 아기를 출산하자마자 따라 내려왔으나 일이 장기화되어 3년이 다 되어 갑니다. 이제 연말이면 지방 생활이 마무리될 예정이지만, 다시 서울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남편이 해외 파견을 가게 되어 함께 해외에 가게 되었습니다. 

서울이 고향은 아니지만, 그래도 10년 이상 생활한 곳이라 학교 친구, 지인, 다니던 성당, 자주 가던 식당등에서 마음의 위안을 얻곤 했는데, 타지에 와서 친구도, 아는 곳도 없이 지내니 생활이 점점 피폐해집니다. 특히 육아와 코로나로 인해 집안에 머무는 시간이 많았고, 지방에서 알게 된 사람들은 그저 서로 '길게 보지 않을 인연'으로 생각하니 정을 붙이기가 어렵습니다. 게다가, 살아온 환경이 다르니 공감대도 거의 없고요. 

아이를 낳기 전 직장생활을 하다가 대학원에 진학하였고, 출산 후 다시금 복학하여 학위를 따서, 현재는 살고 있는 곳에서 취직하여 회사를 다니고 있습니다. 일을 하니 조금 숨통이 트인다 싶다가도, 남편이 먼저 출국하고 혼자서 애를 키우며 타지에서 회사 생활을 하니 일상 자체도 버겁고, 하루에도 몇 번씩 일렁이는 제 감정 또한 혼자서 감당하기가 힘듭니다. 전쟁처럼 출근 준비를 하며 아이를 등원시키고, 퇴근하면 아이를 데리러가고 씻기고 먹이고 재우다 보면 겨우 하루가 마무리되고, 다음 날 또 전쟁이 반복됩니다. 

며칠 전부턴 아이가 떼를 쓰거나 하면 갑자기 숨이 막힌다거나 너무 갑갑한 마음이 들기도 하고, 출근해서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는 순간들이 생깁니다.  여러 가지 감정들이 마음에서 불쑥불쑥 일렁이고 눈물을 자아냅니다. 서울에 있었다면, 현재 직장보다 더 좋은 곳에 취직했을 텐데… 더 많은 기회가 있었을 텐데… 친구들과 함께 집을 오가며 육아했다면 이렇게까지 외롭지 않았을 텐데… 이런 생각의 끝에는 남편에 대한 원망만이 남습니다.

남편 또한 이런 상황을 의도한 바는 아니니 원망하기 싫어 남편과의 대화가 점점 줄어듭니다. 서울에 가서 친구들은 만나 특별한 것을 하지 않고 그저 밥을 먹으며 일상을 이야기하고 제 마음을 터놓으면 그 순간 ‘아, 살겠다!’ 하는 해소의 감정이 듭니다. 그런 일상들이 지금은 어쩌다 한 번, 겨우 가질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하니 더욱더 외롭고, 박탈감마저 느껴집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제가 남편 없이 서울에서 아이랑 둘만 지냈다 하더라도 마냥 행복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가족이 온전히 같이 있지 못하니까요. 그렇지만 지금 이 상황으로 인해 가지게 되는 심적 어려움 또한 감내하기가 참 힘듭니다.

마음가짐을 어떻게 가져야 지금의 어려운 고비를 잘 넘길 수 있을까요? 전문가 분의 조언을 얻고 싶습니다.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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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안녕하세요, 사연자님께서 올려주신 사연글 잘 읽어 보았습니다.

사연자님께서는 서울에서 오랫동안 지내시다가 남편 분의 일 때문에 지방으로 이사를 오게 되고, 현재 낯선 지역에서 육아와 직장 일을 병행하면서 힘든 시간을 보내고 계신 것 같습니다. 익숙한 곳을 벗어나서 낯선 곳에서 적응하게 되는 상황만도 쉽지 않은데, 그곳에서 아직 어린 자녀를 양육하고 또 직장 일도 하게 되면서 몸과 마음이 많이 버거워진 상황 같습니다.

누구라도 이러한 상황에서 마음을 다잡고 긍정적으로만 생활하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낯선 지역에서 적응하는 일도, 또 어린 자녀를 육아하는 일도, 새로운 직장에 적응해서 업무를 해 나가는 것까지 무엇 하나 만만한 일이 아니며, 이 모든 일들을 한꺼번에 해 나가시는 지금 상황이 힘들게 느껴지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감정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연자님께서는 출산 후 다시 복학해서 학위를 따고, 새로운 직장에 취직해서 일과 육아를 병행할 만큼 충분히 능력이 있고, 겉으로 불거지는 적응상의 큰 문제도 없으신 것으로 보아 평소에는 일상적인 기능을 잘 유지하는 데 특별한 어려움이 없으신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익숙한 사람이나 장소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고, 남편 분께서 먼저 타국에 나가게 되면서 어린 자녀까지 홀로 책임지시다 보니 외로움과 고단함이 한꺼번에 몰려오면서 많이 지치신 듯 보입니다.

 

사연자님께서는 친구 분들을 만나 식사하고 일상을 이야기하며 마음을 터놓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트이는 듯한 해소의 감정을 느끼셨다고 하셨는데요, 현실적으로 이런 시간을 자주 가지는 것이 어렵다면 틈틈이 친구 분들과 전화 통화나 메신저를 통해 소통하는 시간을 좀 더 늘려 가신다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사연자님의 현재 상황이 다소 고립되고 어려운 측면이 있다 보니, 아무래도 남편 분에 대한 서운함과 원망하는 마음이 생길 수도 있을 텐데요, 그러나 사연자님께서도 잘 아시다시피 남편 분께서 지금의 상황을 의도한 것이 아닌 만큼 원망의 마음이나 화살의 방향을 남편 분께 돌리는 것은 서로의 관계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연자님께서 현재 겪고 있는 어려움이나 심적으로 힘든 점들에 대해 남편 분께 전혀 표현하지 않는다면, 지금처럼 두 분 사이에 솔직한 대화를 하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어 소통을 회피하는 방식으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상대를 비난하거나 원망하는 태도보다는 ‘나-메시지’를 통해 사연자님께서 느끼시는 감정과 생각 등을 솔직하게 표현하면서 소통할 수 있습니다. 이어서 사연자님께서 남편 분에게 바라는 것이나 지지받고, 위로받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 등을 자연스럽게 전달하는 것이죠.

예를 들면, “당신 때문에 이곳까지 따라왔는데, 나 혼자만 아등바등하는 것 같아 당신이 원망스러워.”, “익숙한 서울에서 떠나와 낯선 곳에서 생활하기가 너무 외로워. 이건 모두 당신 탓이야.”라는 유언이나 무언의 메시지를 전하기보다는, “요즘 들어 일하고 육아 하느라 내가 좀 많이 지친 것 같아. 나에게 좀 더 신경 써 주면 힘이 날 것 같은데.”, “낯선 곳에서 고군분투하려니 좀 외롭네. 내가 요즘 힘들다 보니 당신한테 자꾸만 서운한 마음도 드는 것 같아. 당신이 이런 내 마음을 좀 헤아려 주면 좋겠어.”라고 상대를 비난하지 않고, 나의 생각과 감정을 전달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표현할 때 남편 분은 자신이 비난받지 않으면서도 사연자님의 솔직한 마음을 더 잘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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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사연자님께서 남편 분과 좀 더 잘 소통하는 것만으로 지금의 어려움들이 모두 해결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사연자님께서는 현재 심적이나 신체적으로도 굉장히 소진되어 있으신 상태이고, 또 자신을 지지해 줄 수 있고,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외부의 대상들과의 연결감도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장 일과 육아를 담당하고 있는 현실에서는 개인적인 시간을 가지기 힘든 물리적인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은 어느 정도의 선택과 포기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혼자서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감당하려고 하시니 벅찰 수밖에 없는데요, 일주일에 단 한 번 혹은 몇 번이라도 육아도우미나 가사도우미 등의 도움을 받아서 그 시간만큼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거나 즐거운 일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오롯이 사연자님께 집중하는 시간을 만드실 것을 권유 드립니다. 또 가벼운 산책이나 명상을 통해 마음을 다스리는 시간을 가지시는 것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비록 사연자님께서 익숙한 곳을 떠나와서 타지에서 생활하면서 친구나 오랜 지인 분들, 익숙한 곳에 대한 향수로 힘드신 점들도 있겠지만, 어쩌면 우리의 인생이란 것이 원래 한곳에 오래도록 머물 수는 없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어린아이가 청소년이 되고, 또 성인이 되고 아내가 되고 엄마가 되는 것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역할이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자연스럽게 변화하듯 말입니다.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처럼 흘러가는 것이지요. 주거지가 변화하는 데 따르는 어려움도 있겠지만, 분명 새로운 곳에서 새롭게 경험할 수 있는 일들이나 느끼는 점들도 있을 것입니다. 사람과의 관계도 반드시 오랜 세월을 사귄 사람만이 귀한 것은 아닙니다. 잠깐의 인연이어도 평생 마음에 간직될 소중한 인연을 만날 수도 있겠지요. 따라서 짧은 만남일지라도 진심을 다한다면 어디서든 충분히 좋은 인연들을 만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가짐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외로움과 우울감이 지속된다면, 가까운 정신건강의학과나 상담소에 방문하시어 도움을 받으시거나 여건이 안 되신다면, 온라인 상담이라도 꼭 받아 보시기를 추천 드립니다. 흘러가는 구름처럼, 사연자님의 외로움과 지친 마음도 흘러가기를 바라겠습니다.

 

강남푸른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이규홍 원장

이규홍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강남푸른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의과전문대학원 졸업
명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수료
METTAA CBT / Schema Therapy Expe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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