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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마음을 읽다] 나의 마음이 나를 위해 움직이도록 - 단지 세상의 끝, 2016
권순재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 승인 2019.06.29 03:51

[정신의학신문 : 권순재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당신의 마음은 어디에 있나요? 현대 의학의 상식을 가지고 있는 우리는 당연히 ‘머리’, 또는 ‘뇌’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에게 이러한 지식이 주어지지 않았다면, 우리는 마음의 존재를 어떻게 알고 느낄 수 있게 되나요? 우리는 심장의 존재를 가슴의 박동으로 느낍니다. 상한 음식을 먹고 배탈이 났을 때 우리는 위장관의 존재를 느끼게 되죠. 그러나 해부학과 뇌영상 기술이 발달하기 전에는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위대한 철학자조차도 영혼과 마음은 심장에 존재한다고 믿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을 마음으로 느끼지만 이 말이 우리가 늘 마음의 존재를 의식하며 살아감을 의미하는 건 아닙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통제할 수 없는 화를 느낄 때, 우리는 ‘아! 나의 마음이 화가 났구나!’라고 느끼지는 않습니다. 대신 우리를 화나게 만든 대상에 대하여 강렬한 분노를 쏟아부을 뿐이죠. 오히려 우리가 스스로의 마음에 대하여 남들과 차분히 이야기해보거나, 마음에 관한 글을 읽거나, 정신을 안정시키고 스스로의 마음을 들여다보거나 할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즉, 마음의 존재를 느낀다는 건 ‘현상’보다는 ‘행위’에 가깝습니다.

자신의 감정을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자신의 마음을 느끼는 행위 중에서도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언어화를 통해 순간적인 자극이나 불꽃에 불과한 나의 정신활동들을 정리하고, 입으로 소리를 내는 선언과정을 통해 나 자신의 감정을 꺼내어 확인하고, 더 나아가 나의 마음을 타인도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번역하여 전달하고, 공감받습니다. 그러나 모든 이의 감정이 언어화의 축복을 입는 것은 아닙니다. 어떠한 문화권에서는 자신의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것이 웃어른에 대한 불경으로 취급받습니다. 어떠한 가정에서는 아이의 가치관이 단지 부모의 가르침이나 취향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아이가 학대를 당하기도 합니다. 어떠한 나라에서는 특정 사상을 없애기 위해서 책을 없애버리고, 그 사상에 대하여 입에 담는 사람을 감옥에 가두기도 했죠.

 

“어린아이한테 마음 그딴 건 없어! 있다고 하더라도 필요하지 않아!
선생이 뭔데 내 아이가 내 뜻을 거스르고 자기 생각을 말하게 만든단 말이오!”

- 환자의 아버지에게 실제로 들은 항의

 

결국 마음의 존재는 부정당합니다. 아이를 지금 압박하고, 생채기를 내고, 공포에 떨게 만드는 감정의 소용돌이들이 사실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그러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마치 대단한 죄나 있어서는 안 되는 일처럼 취급받습니다. 아이에게는 신이나 다른 없는 무자비한 양육자가 아이의 감정에 전혀 엉뚱한 이름을 입힙니다. 지금 힘든 것은 내가 모자란 사람인 탓, 지금 흘리는 눈물은 칠칠치 못한 수치스러운 행위, 내 마음속에 피어오르는 의문은 내가 나쁜 사람인 증거가 됩니다. 가장 여리고 부서지기 쉬운 시기의 아이의 영혼을 대가 삼아 아주 짧고, 불안정하고, 유치한 가정의 평온을 손에 넣습니다. 그리고 이 악순환적인 정신역동은 가족의 습관으로 굳어집니다. 아이의 감정은 가족의 평화를 위한 제물이 되어버리죠. 타인의 행복한 웃음 속에서 누군가의 마음은 죽어버립니다.

 

마음을 빼앗긴 사람은 어떻게 되나요? 영화 ‘단지 세상의 끝’은 마음을 빼앗긴 한 남자와 마음을 강요하는 한 가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마음을 표현할 언어를 박탈당한 한 인간의 고독한 결말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12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가족들과 연락을 끊고 타지에서 살아가던 프랑스의 유명 작가 루이는 어느 날 갑자기 시한부 선고를 받습니다.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길지 않음을 깨달은 그는 자신의 죽음을 알리기 위해 다시 가족에게로 향합니다. 이 영화는 죽음을 앞두고 12년 만에 가족들을 다시 찾아간 루이가 그들과 보낸 마지막 3시간을 그립니다.

공유하지 못한 세월이 만들어낸 거리와 어색함은 불과 수분만에 사라지고, 가족들은 자신도 주체하지 못하는 자신의 감정들을 루이에게 쏟아냅니다. 여동생 쉬잔은 오빠에 대한 동경과 서운함 어딘가에서 헤매고, 열등감이 심한 형 앙트완은 가족을 떠난 루이에 대한 반감과 혈육으로서의 동질감 사이에서 폭주합니다. 어머니의 짙은 화장과 호들갑은 공허함과 단절감을 더욱 두드러지게 합니다. 오직 처음 만난 형수 카트린만이 차분하게 루이와 가족들 사이를 중재합니다. 이 가운데에서 루이는 조용히 기다립니다. 자신의 죽음을 알릴 적절한 시기를요.

 

영화 <단지 세상의 끝> 중에서

 

이 영화는 매우 불친절한 영화입니다. 루이가 가족들과 결별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루이가 동성애자인 것이 가족관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형인 앙투안이 왜 루이에게 열등감을 품고 있는지 그 어떠한 것도 정확히 설명해주지 않습니다. 다만 한 화면에 꽉 찬 배우의 얼굴이 쉴 새 없이 화면을 향해 말을 쏟아내는 모습이 숨 막힐 뿐입니다. 마치 영화 속 인물들이 나를 향해 투덜거리고, 강요하고, 불만족을 표현하는 그런 불쾌한 경험이죠.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는 루이가 가족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서 조금씩 짐작하게 됩니다.

조금만 살펴보면 가족들은 루이가 연락을 끊고 떠나간 이유가 무엇인지, 어떻게 살았는지, 그리고 이제 다시 돌아온 이유가 무엇인지 조금도 궁금해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신 이들은 루이의 감정에 끊임없이 자신의 감정을 덮어 씌웁니다. 죽음을 눈 앞에 둔 사람에게 감정적인 세금을 징수합니다. 보수적인 집안의 장남이 휘둘렀던 무자비한 권력의 피해자였던 차남에게 장남의 책임 또한 지라고 강요하죠. 흔적으로라도 느끼고 싶어 했던 젊은 시절 첫사랑은 마치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가 잘못된 것처럼 부정되고 비난받습니다. 그의 감정은 12년 전처럼 완벽하게 없는 것으로 취급됩니다.

 

“난 널 이해하지 못하겠어. 하지만 널 사랑해.”

 

언어를 잃은 슬픔은 결코 형태를 얻어 밖으로 꺼내어지지 못합니다. 마음은 스스로에게조차도 공감받지도 위로받지도 못합니다. 방향을 잃은 슬픔은 조각으로 나뉘어 원시적인 형태로 마음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다가 삶의 버거움에 지쳐 비틀거리는 순간마다 튀어나와 아프도록 몸을 찔러댑니다. 꺼내어보지도 못한 이 아픔은 정신의 것인지 육체의 것인지조차도 구분할 수 없고, 이 아픔은 대개 병으로 인정조차 받지 못합니다. 결국 가쁜 숨과 무력해진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주저앉게 되죠.

아픔은 결코 통역되어 타인에게 전해지지 못하고, 나와 같이 아픔과 상실을 느끼고 있을 동료일 터인 타인의 감정 또한 결코 나에게 번역되어 전해지지 못합니다. 나의 아픔을 타인과 견주어보지 못하고 타인이 느끼는 절망 또한 가늠해볼 수 없게 됩니다. 결국,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 어느 거리에서 헤매는 이방인이 됩니다. 주변에 사람이 많을수록 사무치는 고독을 느끼게 됩니다. 혼자가 더 낫지요. 어차피 외로운 거 상처라도 덜 받고 싶으니까요.

길고 긴 프랑스식 식사의 막바지, 루이의 무거운 입이 열립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자신의 감정이 아니었습니다. 대신 그는 오늘 하루 가족들에게 받은 감정적 요구들을 기계적으로 쏟아냅니다. 그의 말은 자신의 감정에 언어를 입히는 표현 과정이 아니라 강요받은 감정의 되뇜이자, 일종의 체념이었죠.

 

“또 올게요. 더 자주. 그리고 편지할게요. 더 자주. 두 세 단어 이상으로.
쉬잔, 시간 나면 한번 들려. 주말이든 주중이든 편히 있다가 가.
형, 내가 다시 오거나 형이 놀러 오면… 와도 돼. 형은 그럴 ‘권리’가 있어.”

 

그는 결국 자신의 죽음조차 전하지 못합니다. 곁에 있을수록 외로워지는 압도적인 고독함. 곁에 있으면서도 결코 닿지 않는 마음의 거리. 한 많은 인생의 마무리를 앞두고 지금까지 몸부림치며 살아온 의미를 찾기 위해 돌아왔지만, 죽음마저 애도받지 못한 그의 가족과의 마지막 순간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 단지 세상의 끝이었죠.

 

영화 <단지 세상의 끝> 중에서

 

오늘 당신의 하루는 어땠나요? 좋은 날이었나요?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그건 무엇 때문이었고 얼마만큼 힘들었나요? 그건 오랜만에 새 옷을 입고 간 날 운 없게도 길바닥에 넘어져 옷을 망쳐버린 것과 같은 힘듦이었나요,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이 멀리 떠나는 것과 같은 힘듦이었나요? 당신의 의식에 이는 파도에 당신이 아는 단어로 이름을 붙인다면 그건 짜증이 되나요, 분노가 되나요, 슬픔이 되나요, 체념이 되나요? 그리고 그 화살표와 같은 단어들의 방향은 어디를 향하고 있나요? 무엇이 당신을 슬프게 하고, 무엇이 당신을 분노하게 하고, 무엇이 당신을 수치스럽게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당신을 기대하게 만드나요?

똑같이 ‘사랑’으로 이름 붙여진 감정이라 하더라도 사실은 사람마다 전부 다른 감정을 이야기하고 있죠. 누군가에게 사랑은 상대방을 복종시키고 소유하려는 쇠사슬 같은 정복욕이고, 누군가에게 사랑은 잃어버린 한 순간을 평생 바라만 보고 있는 그리움이죠. 누군가에게는 한없이 굶주리는 어린 이에게 나의 몸을 뜯어서 먹이는 자애였고, 누군가에게 사랑은 한여름날 둘이 바라보던 수천 광년 떨어진 밤하늘의 별빛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방에게 언어를 허락하고, 상대방의 언어를 이해하기 위하여 기다리는 것은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의 사랑의 행위 중 하나가 됩니다.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결코 사랑할 수 없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당신의 마음이 지금까지 그 존재조차 인정받지 못하였다면, 이제 와서 갑자기 마음을 언어로 표현해 보는 일은 당신에게 무척 어렵고 곤란한 일이 될 것입니다. 처음부터 잘 되진 않을 거예요. 때로는 말 대신 비명이 먼저 나오기도 하죠. 하지만 여러 번의 착오와 연습을 통해 당신의 말은 점차 당신의 마음과 그 간격을 좁혀 나가기 시작할 것입니다. 마음이 말과 글을 통해 형태를 이루며 선명해지고, 당신은 당신의 마음이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고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내 안의 괴로움과 세상 바깥으로부터의 위협을 구분합니다. 비로소 세상은 나를 벌 주기 위한 어두컴컴한 형벌장에서 내가 살아내야만 하는 여행길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여러 갈래의 길이 있고, 얼마든지 선택할 수도 있는. 그리고 나의 괴로움은 전생의 업이나 하늘로부터 내려진 벌에서 벗어나 하나의 보편적 경험으로 바뀌어 세상 속에 녹아듭니다.

나와는 다른, 자신들의 감정의 표현에 거침없는 타인에게 상처 받고 잠 못 이루던 그날 밤에도 당신의 마음은 있었습니다. 당신에게 어떠한 언어도 허락되지 않았던 시절, 무엇에 아파하는지도 모르고, 단지 조용히 웅크리고 견딜 수밖에 없었던 그 시절에도 마음은 그곳에 있었습니다. 스스로조차 인지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마음은 당신과 함께 태어나서 이미 그곳에 존재했습니다. 그리고 뒤늦게 되찾은 당신만의 언어를 통해 마음은 그 형태를 이루고, 남들이 준 옷을 입고 타인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일하던 당신의 마음이 생애 처음으로 당신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감정은 결코 없앨 수 없어요.
없어지는 대신 어딘가 모르는 곳에서 헤매고 있지요.
마치 내 앞으로 보낸 누군가의 편지가
수십 년이 흐르고 나서야 도착한 것처럼.
이것이 진짜 슬픔이고… 이것이 진짜 행복이었습니다.”  

- 우라사와 나오키, ‘몬스터’ 中에서

 

권순재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info.psy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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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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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 2019-07-05 06:31:09

    정말 좋은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삭제

    • 마음 2019-06-29 17:39:58

      곁에 있어도 닿지 않았던 서로의 평행선은
      이제 다른 선과 만나 연결되는
      그 어떤 존재와 함께 입체적인 형태를
      이루길 바래본다~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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