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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마음을 읽다] 이젠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거니? - 봄날은 간다, 2001
권순재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 승인 2019.04.11 10:17

[정신의학신문 : 권순재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순박한 청년 상우가 은수를 만난 것은 겨우내 내린 눈이 아직 채 녹지 않은 이른 봄, 강릉 터미널 대합실에서였다. 녹음기사와 지방 방송국 PD로 만난 둘은 이내 가까워진다. 세상 다산 듯 허무한 표정을 하고 저만큼 멀리서 비척거리다가도 어느새 요염한 표정으로 어깨를 부비는 고양이 같은 은수에게 상우는 점점 빠져들게 되고, 둘은 은수의 아파트에서 밤을 같이 보낸다. 따사로운 봄 햇볕 아래에서 포옹하는 두 사람. 완벽한 봄날, 완벽한 사랑이었다. 그 순간만큼은.

김치 담는 이야기를 꺼내며 넌지시 둘이 함께 하는 미래를 그리는 상우. 이혼의 아픔이 있는 은수는 그런 상우가 부담스럽다. 명확한 이유도 사건도 없이 둘 사이의 관계는 균열이 가기 시작하고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우는 혼란스러워한다. 항상 상우가 차로 데려다주던 은수는 어느새 자신이 직접 운전을 하고 그녀의 새 차 옆에는 모르는 남자가 자신의 자리를 채우고 있다. 상우는 화난 듯 체념한 듯 말한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영화 <봄날은 간다> 中


우리는 변하지 않는 어떤 절대적인 것에 대하여 가치를 부여합니다. 오래전부터 이루어진 논제인 ‘소유’냐 ‘존재’냐의 질문에서도 인간은 언제나 ‘존재’의 손을 들어줍니다. 남녀 간의 사랑은 대표적인 존재의 불변성과 절대성의 상징입니다. 그래서인지 많은 영화들이 사랑에 대해 다루면서 ‘순간의 영원성’에 집중합니다. 설령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 이야기라 하더라도 영화는 결국 그 사랑의 순간이 남기고 간 변함없는 추억에 대해서 다루는 경우가 많습니다. 1997년작 영화 ‘타이타닉’은 그 대표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수십 년 전 침몰한 배의 잔해에서 다이아몬드를 찾던 사람들이 다이아몬드 대신 두 남녀의 영원한 사랑 이야기를 발견하는 내용이죠.

반면 영화 <봄날은 간다>는 사랑의 상대성과 가변성에 대하여 다루는 영화입니다. 영화는 전반부의 봄볕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따스하고 열정적인 사랑의 순간들만큼이나 사랑이 변해버리는 순간에 집중합니다. 영화의 제목이 암시하듯이 이 영화는 봄날의 따스함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싸늘함에 대해 말합니다. 대단한 서사적 위기도, 사건도 존재하지 않는 덧없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사랑은 그저 손 틈새를 적시고 빠져나가버립니다.

영화에서 사랑을 나타내는 중요한 장치는 바로 ‘대비’입니다. 남자 주인공인 상우와 여자 주인공인 은수는 모든 면에서 대비되는 인물입니다. 상우는 서울에 살고 은수는 강릉에 삽니다. 상우는 가족과 친구, 직장 동료 등 많은 관계들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은수는 아무도 없는 아파트에서 혼자 라면을 먹습니다. 녹음 전문가인 상우의 일은 순간의 아름다움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고 방송국 PD인 은수의 직업은 기록된 아름다움을 세상으로 흩어 보내는 일입니다.

 

일전에 뇌경색으로 우측 두정엽에 손상을 입은 환자분을 진찰한 적이 있었습니다. 좌측 시력과 시야가 정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좌측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을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식판에 밥을 먹을 때에도 왼쪽에 있는 밥은 전혀 먹으려고 하지 않았죠. 그분은 자신의 왼쪽 팔과 다리 또한 자신의 것으로 인식하지 못하였습니다. 몸을 씻을 때도 그 부분은 씻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인상 깊었던 점은 그분이 그것을 그다지 불편해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뇌경색은 그분의 신체에 대한 개념을 바꾸어버렸던 것입니다.

공간을 지각하는 부위인 우측 두정엽은 우리 몸의 경계를 결정합니다. 이 부분이 손상되면 우리는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나’인지 판단하지 못하게 되죠. 종이에 베인 손이 아픈 이유는 내 손이 베였기 때문이고 연인이 아플 때 나도 괴로운 것은 그녀가 바로 내 연인이었기 때문이죠. ‘나의 무엇’은 단순히 내가 가진 무엇이 아니라 나 자체였습니다. 달라져 버린 뇌가 자신의 몸에 대하여 서로 다른 인식을 보이는 것처럼 상우와 은수는 자신의 사랑에 대하여 상반된 인식을 보입니다.

상우의 사랑은 공간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사랑은 누군가의 무엇이 되어 하나의 테두리로 묶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랑이 변화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은수의 사랑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녀에게 있어서 사랑이란 지금 두 사람이 함께 하는 순간을 말하는 거지 누구의 무엇이 되는 것이 아니었죠. 상우와의 관계를 묻는 누군가의 질문에 은수는 ‘그냥 아는 동생’이라고 답합니다. 그리고 사랑에 대한 두 사람의 개념의 차이가 두 사람의 사랑의 운명을 결정지었죠.

 

영화 <봄날은 간다> 中

 

사랑이 끝난 후 남겨진 두 사람의 모습은 사랑의 형태를 보여주는 또 다른 장치입니다. 상우는 좌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직장도 그만둬버립니다. 하염없이 은수를 기다리던 자판기 옆에는 버려진 녹음테이프들이 즐비합니다. 녹음테이프는 고정된 시간을 상징하는 도구이죠. 반면에 은수는 새 차를 사고 금방 또 자유롭게 다른 남자와 함께 여행을 갑니다. 그러다가도 훌쩍 다시 상우를 찾아와 보고 싶었다며 화분을 건네줍니다. 그녀의 사랑에서 상대와의 거리는 의미가 없죠. 두 사람은 사실 완전히 다른 사랑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랑이 지나간 흔적이 두 사람의 사랑의 형태를 알려줍니다.

사랑의 순간에 대해서 묘사하던 영화는 나머지 반절을 시간에 따라 식어가는 사랑에 저항하는 상우의 몸부림으로 채웁니다. 상우는 은수를 하염없이 기다리다가 한밤중에 전화했다가 무안을 당하기도 하고 술을 마시고 앞으로 더 잘하겠다고 빌기도 합니다. 새로운 남자를 만나고 있는 은수의 뒤를 밟다가 유치하게도 은수의 차를 키로 긁어놓는 것으로 자신의 흔적이라도 남기려고 합니다. 상우의 사랑은 시간의 흐름에 저항하려 합니다. 반면 은수의 방에서 발견된 은수의 옛 결혼사진은 그녀가 과거에 누군가와 가까워지고 묶이는 것에 상처 받은 적이 있음을 암시합니다.

변해버린 사랑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상우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치매에 걸린 상우의 할머니는 다른 여자와 바람이 나 자신을 떠난 상우의 할아버지를 역에서 하염없이 기다립니다. 매일같이 지금은 이미 돌아가시고 없는 할아버지를 기다리는 할머니를 집으로 모셔오는 게 상우의 일과이죠. 젊었을 때 처를 잃은 상우의 아버지는 다시 결혼하지 않고 혼자 지냅니다. 이들은 닮은꼴의 가족이자 순간에 박제되어 시간에 저항하고 있는 이들입니다.

 

나의 사랑에 대해 이해한다는 것은 뇌를 연구하는 의사의 방식과도 유사합니다. 의사는 정상적인 부분보다는 손상된 부분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좌측 전두엽의 특정 부위가 손상되면 인간은 말을 더듬거나 단어를 말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의사는 그 잃어버린 부분을 통해 평소 이 부분이 어떤 역할을 해왔는지를 유추하게 됩니다. 기억에 대한 연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한 사람에게 남아있는 기억의 형태를 통해 기억이 어떤 방식으로 소실되었는지를 짐작합니다. 그리고 본래 있었어야 하는 기억의 형태를 짐작하는 과정을 통해 기억의 방식을 이해합니다.

뇌를 아무리 해부해 보아도 우리는 우리의 정신이 어떠한 방식으로 작동하는지 결코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잘게 잘린 뇌는 그냥 조각난 조직의 덩어리들이죠. 누군가를 만나는 뇌가 보이는 반응, 상처 받은 뇌에 남아있는 것을 통해 우리는 뇌가 무엇이고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 알게 됩니다. 어둡고 조용한 방 안에 앉아 나의 정신을 아무리 미세하고 정교하게 헤집어보아도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 어떠한 새로운 것도 알 수 없습니다. 현실과 사람에 기반하지 않은 우리의 사유는 세상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연기가 되어 흩어집니다.

누군가를 만나서 빛나게 되고, 누군가와 헤어지면서 아파하게 되고 사랑이 미움으로 바뀌고 미움이 자책과 뒤섞여 성찰로 변하면서 흘러가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점점 정신의 개념이 확장되게 됩니다. 단순히 점 하나에 불과했던 나의 정신이 누군가를 만나고 헤어지며 가로가 생기고 세로가 생기고 그렇게 공간이 생기고 종국에는 시간의 흐름까지 발생합니다. 순간이었던 사랑은 이제는 여로가 됩니다.

 

봄날은 가고 여름과 가을을 거쳐 겨울이 갑니다. 떠나버린 버스와 여자는 잡는 것이 아니라던 상우의 할머니는 곱게 한복을 차려입고 할아버지를 만나러 떠납니다. 상우의 사랑은 시간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여 확장됩니다. 예전 상우에게 있어서 사랑이 풍경이었다면 1년이 지난 상우의 사랑은 여러 개의 풍경이 겹쳐있는 길과 같습니다. 예전의 상우에게 사랑이란 누군가와 가까워져 그 사람과 하나로 묶이는 ‘현상’이었다면 지금 그의 사랑은 그 만남과 설렘, 헤어짐과 아픔의 길을 걸어가는 ‘행위’가 됩니다. 멀리 보이는 희미한 빛에 끌려 만난 두 사람이 사랑하고 포옹하고 아파하며 비명을 지르고 미련 섞인 한숨을 쉬는 그 모든 연결된 시공간이 사랑이라는 것을 그는 알게 됩니다.

시간은 아주 조금이지만 은수의 사랑도 바꾸어놓습니다. 어느 날 종이에 베인 은수는 무심결에 손을 심장보다 높이 들어 올립니다. 상우에게 얻은 습관이었죠. 거리가 존재하지 않는 은수의 인지의 벽을 넘어 상우는 그녀에게 아주 조금의 흔적을 남겼던 것입니다. 어느 봄날 두 사람은 다시 만납니다. 은수는 상우의 품으로 파고들며 말합니다.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고. 할머니는 건강하시냐고. 그녀는 지금 다시 0에서 1로의 사랑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그야말로 은수다운 방식이었죠.

그러나 상우는 그토록 원했던 은수를 밀어냅니다. 시간이라는 두께를 얻은 상우의 사랑은 풍경에서 길로 바뀌었고 상우는 지금 그 길의 끝으로 천천히 내려가는 중이었기 때문이죠. 시간과 공간의 방식으로 엇갈렸던 두 사람의 사랑은 이제 점과 길이 되어 다시금 엇갈립니다. 상우의 마음을 깨달은 은수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악수를 청하고 다시 멀어져 갑니다. 자신이 이별을 고하고도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상우에게 은수의 모습이 점점 희미해져 갑니다. 이미 지나간 줄 알았던 봄날은 모든 계절을 한 바퀴 돌고 나서야 비로소 떠나가기 시작합니다.

 

영화 <봄날은 간다> 中

 

우리는 아파하며 외칩니다. 이젠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거냐고 말이죠. 사랑이 영원하지 않음에 슬퍼합니다. 하지만 영원할 것만 같은 사랑의 순간은 우리가 경험하는 사랑의 아주 작은 한 조각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본질은 그 순간 너머의 여백에 있을지도 모르지요. 누군가에게 사랑은 한데 묶여서 가족이 되는 것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 사랑은 헤어지고 아파하는 그 모든 시간까지를 포함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경험했던 사랑의 순간은 서로 다른 두 사람이 하는 두 가지 사랑의 접점과도 같은 것이기에 사랑이 영원하지 않음을 너무 슬퍼할 필요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사랑받을만한 존재이냐 아니냐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이죠.

처음부터 막연히 이해하고는 있었죠. 내 사랑이 영원하지는 않을 거라는 것을. 하지만 이해와 수용은 얼마나 다르던지요. 수많은 매체에서 패러디되고 소비되어 온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는 대사 하나를 진정으로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랑을 흘려보내며 그 덧없음에 아파했나요. 하지만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우리의 사랑의 방식을 이해하게 되고 사람마다 다른 사랑의 방식의 차이를 구분하게 됩니다. 동화 속에서만 존재하던 어린아이의 사랑은 아프고 씁쓸한 과정을 통해 어른의 사랑이 되어 영원히 나이를 먹지 않는 동화 속 세상을 벗어나 현실에 굳건히 뿌리내리게 됩니다.

 

「집을 정리하던 상우는 우연히 일전에 녹음해둔 은수의 콧노래를 발견한다. 흘러가는 사랑을 잡아두기 위한 그것이 사랑의 빈자리를 더욱 선명하게 한다는 것은 얄궂은 일이었다. 오랜만에 다시 소리를 담으러 떠난 상우. 한창 무르익은 5월의 보리밭 한가운데에 녹음장비를 들고 서 있다. 수천 개의 보릿대가 바람에 우석거리며 하나의 풍경을 만들어가는 가운데 상우 또한 그 눈부신 풍경의 일부로 녹아들어간다. 소리와 자신을 함께 담기 시작한다. 상우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지금 이 순간, 비로소 그는 그녀를 떠나보낸다.」

 

영화 <봄날은 간다> 中

 

권순재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info.psy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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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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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yellow 2019-04-12 10:43:20

    '어둡고 조용한 방 안에 앉아 나의 정신을 아무리 헤집어보아도 나 자신에 대해 어떠한 새로운 것도 알 수 없습니다. 현실과 사람에 기반하지 않은 우리의 사유는 세상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연기가 되어 흩어집니다. 누군가를 만나서 빛나게 되고, 누군가와 헤어지면서 아파하게 되고 사랑이 미움으로 바뀌고 미움과 자책과 뒤섞여 성찰로 변하면서 흘러가고, 이런 과정을 통해 정신의 개념이 확장되게 됩니다.'

    나는 다른 존재라고 생각하며 혼자 있으려하고 사귄다해도 마음을 통제하기도 했는데.. 짧은 오전 시간에 선생님 글이 너무 깊게 다가옵니다.   삭제

    • Bliss 2019-04-11 22:50:56

      멋진 분석!
      우리가 경험했던 사랑의 순간은 서로 다른 두 사람이 하는 두 가지 사랑의 접점과도 같은 것이기에 사랑이 영원하지 않음을 너무 슬퍼할 필요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사랑받을만한 존재이냐 아니냐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이죠.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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