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권순재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인간은 언제 어른이 되는 걸까요?

여전히 나는 아이같이 세상을 두려워하건만, 세상은 나를 어른으로 규정하고 나 또한 스스로를 어른으로 여기며 하루를 살아갑니다. 단지 청춘이라 불리는, 규정할 수도 없는 추상적인 시기가 지나간 것뿐인데, 우리는 그것만으로도 용기를 잃고 의기소침해집니다.

날지 못하게 된 새처럼, 노쇠한 인간의 몸에 갇힌 신처럼 우리는 젊음의 시기를 동경하고 그리워합니다. 꿈은 지금 여기에 우리와 함께 하는 게 아니라 과거 저 멀리 어딘가에 멈춰버린 채로 있는 듯합니다. 미처 보내지 못한 미련과 나이 든 육체만이 남은 우리에게 잃어버린 청춘의 기억은 시린 빗물이 되어 내립니다.

 

패밀리 레스토랑의 점장을 맡고 있는 45세의 중년 남자 콘도는 어느 날 가게의 아르바이트생인 여고생 타치바나에게 좋아한다는 고백을 받습니다. 거의 아버지와 딸뻘의 나이 차이가 나는 여고생의 구애만큼이나 그를 당황스럽게 만든 것은 그녀의 앞뒤 가리지 않는 젊음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젊었을 적 소설가의 꿈을 꿨지만 결국 이루지 못하였고, 그의 부인은 그를 떠나버렸죠. 남은 것은 부하직원들에게도 무시당하는 냄새나는 아저씨라는 꼬리표와 무력한 일상뿐이었습니다. 잃어버린 꿈과 젊음에 대한 미련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던 그에게 꿈과 젊음을 그대로 간직한 소녀의 수줍은 고백은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되돌아보게 되는 설레지만 아픈 과정이 됩니다.
 

영화 <사랑은 비가 갠 뒤처럼> 中


영화는 두 사람의 나이차와 성별의 차이로 인한 불편함을 못 본 척하지 않습니다. 타치바나의 고백을 받은 뒤 그녀를 의식하는 콘도는 자신이 미성년자를 성적으로 탐하는 파렴치한으로 오해받을까 봐 노심초사합니다. 타치바나의 친구는 사십 대 아저씨를 마음에 두고 있는 타치바나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경악합니다.

둘의 로맨스를 예쁘게 꾸며 불편하지 않게 만들어 줄 비현실적인 장치 또한 없습니다. 콘도는 다른 영화의 남자 주인공처럼 멋지게 나이 든 중년의 모습이 아니라 무기력하고 후줄근한 보통 아저씨로 묘사되고, 타치바나 또한 그 나이에 맞게 자기중심적이고 미성숙한 십 대로 묘사됩니다.

 

한 때 고등학교 육상부의 유망주였던 여고생 타치바나는 아킬레스건 파열로 선수를 그만둡니다. 부상의 충격이 너무나 컸던 그녀는 재활을 시작할 엄두조차 내지 못합니다. 자신의 모든 것이었던 육상을 잃어버린 그녀는 방황합니다.

어느 날 비를 피하러 잠깐 들어간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우연히 보인 점장 콘도의 호의는 그녀를 지탱할 모든 것이 되고 그녀는 앞뒤 가리지 않고 콘도에게 돌진합니다. 그 감정이 이성에 대한 사랑인지, 부족한 부성애에 대한 욕구인지, 아니면 단지 현실에서 도망가고자 하는 바람인지 명확히 알지도 못한 채로요.
 

영화 <사랑은 비가 갠 뒤처럼> 中


콘도는 자신이 젊음에게 버림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소설가의 꿈을 좇던 그는 꿈으로 인해 너무나 많은 것을 잃었고 자신과 다르게 성공한 소설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친구를 질투하며 괴로워합니다. 그가 극 중에서 타치바나와 거리를 두려고 할 때 말하는 ‘나는 껍데기뿐인 남자’는 그가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젊음은 나이 든 이에게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동경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젊음에는 무서울 정도로 폭력적인 면 또한 존재합니다. 지나가버린 젊은 시절은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인생이 불행한 이유이자 너무나 시리게 아픈 상처이기도 합니다.

 

꿈이 주는 시련에 상처 받은 젊은이의 저돌적인 구애에 꿈을 잃은 중년은 답변을 강요받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에게 아픈 과정입니다. 그는 젊음에게 버림받은 남자니까요. 젊음을 잃은 이에게 타인의 젊음은 강한 상실감을 주니까요.

혹자는 타인의 젊음을 이상화하고 이에 대비되는 자신의 현재를 평가절하하며 좌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되기도 합니다. 반대로 자신의 좌절감을 방어하기 위해 요즘 젊은이는 어리석거나 나약해 빠졌다는 식으로 젊음을 평가절하하거나 증오하기도 하지요. 심한 경우는 타인의 젊음을 성적으로 다루거나 또는 물질적으로 착취하는 미성숙하고 이기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결핍을 메우려고 하기도 합니다.
 

영화 <사랑은 비가 갠 뒤처럼> 中


45세의 이혼한 중년 아저씨와 17세 여고생의 로맨스라는 민감한 소재를 다루면서도 천박함이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영화가 인간을 묘사하는 방식 때문이리라 생각됩니다.

이 영화는 젊음을 여성의 육체나 아름다움 등으로 성적 대상화한 후 탐욕스럽게 소모시켜 버리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나이차 나는 두 사람의 불편한 로맨스로 시작했던 이야기는 두 사람의 삶과 좌절을 묘사하며 인간의 이야기로 확대됩니다.

콘도는 나이 먹고 냄새나는 아저씨에서 한 때 젊음과 꿈을 가졌고 지금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미련을 안고 사는 아픈 어른이 되고, 타치바나는 젊고 미성숙하고 아름답기만 한 여고생에서 꿈을 잃고 상처 받은 청춘으로 거듭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는 세대와 성별이 전혀 다른 두 사람의 비현실적인 만남과 접점만큼이나 두 사람의 각자의 현실적인 생활과 인간관계에 많은 장면을 할애합니다. 나이와 성이라는 인물을 묘사하는 가장 손쉽고 자극적인 소재에서 벗어나 삶이라는 그 나머지를 묘사합니다.

그럼으로써 영화 속 인물은 생명력을 얻고 그 생명력을 통해 영화는 좌절된 꿈에 아파하는 다른 세대의 두 사람이 비로 상징되는 인생의 고난을 함께 피해 가는 이야기로 변화합니다. 분열된 인간의 속성이 한 데 모이고, 모순적인 젊음의 특성이 조합되어 남녀의 이야기가 아닌 인간의 이야기가 완성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깊이 이해하고자 할 때 반드시 취하는 방식들이죠.
 

영화 <사랑은 비가 갠 뒤처럼> 中


헝가리의 소아과 의사이자 심리분석가인 마가렛 말러는 아이가 물리적으로 심리적으로 하나였던 엄마에게서 분리되어 하나의 독립적 심리적 개체로 탄생하는 과정인 분리-개별화(separation-individuation process) 과정에 대하여 기술합니다.

이 과정을 통해 아이는  모든 것을 제공해주고 언제라도 나를 지켜주는 존재인 줄 알았던 엄마가 사실 나와는 분리된 존재이며, 자신이 원할 때 엄마가 항상 곁에 있어줄 수만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여러 번의 좌절, 세상이 없어지는 것만 같은 두려움, 독립과 화해의 과정을 통해 아이는 대상-항상성(object constancy)을 확립합니다. 엄마가 자신을 만족시키든 만족시키지 못하든 엄마에 대해 고정된 이미지를 유지할 수 있게 되는 거죠.

 

우리가 청춘과 작별을 고하고 점차 젊음을 잃게 되는 과정도 이와 비슷한 측면이 있습니다. 항상 곁에 있을 것이라 믿었고 영원하리라 믿었던 젊음에서 서서히 분리되면서 우리는 젊음 없이 살아가는 법을 연습하게 됩니다. 멈춰있는 줄로만 알았던 시간은 사실 무섭게 흐르고 있었고 결코 내게 오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인생의 노년기가 저 멀리서 보이기 시작하죠.

시간은 우리를 강하고 성숙해지게만 하는 줄로 알았는데 이제 시간의 흐름은 우리에게 주름이 지고 군살이 붙게 하는 노쇠의 증거가 됩니다. 청춘이 지나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더 이상 젊지 않다고 느끼는 자신에 대하여 두렵고 비참한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이 과정에서 느껴지는 생의 유한함에 대한 불안과 방황은 마치 영원할 것 같았던 엄마에게서 독립하여 세상으로 나아가는 아이의 불안과도 닮아있습니다.
 

영화 <사랑은 비가 갠 뒤처럼> 中


그렇기 때문에 콘도는 보게 됩니다. 자신이 동경하는 청춘의 화신이 아니라 무섭도록 폭력적인 젊음의 속성에 아파하는 인간으로서의 타치바나를요.

콘도가 소설로 상징되는 청춘을 잃어버리고 계속해서 미련을 가지며, 이 모든 것을 가졌던 행복했던 시기를 아이처럼 그리워했던 것처럼, 타치바나 또한 육상이라는 목표를 잃고 처음 맞는 좌절에 아파하며 자신보다 강하고 따뜻한 존재를 끊임없이 그리워하고 찾아왔음을.

젊음을 가진 자와 젊음을 보내버린 자가 가지는 인생의 아픔은 다르지 않았기에 함께 비를 피하던 둘은 서로의 거울이 되어 상대방을 비춥니다.

 

인생의 모든 시기에 우리들은 누구나 아이처럼 방황하게 되기에 인간은 때로는 서로에 대하여 강렬한 동질감을 느끼게 됩니다. 이는 나이와 성별과 상황을 뛰어넘는 공감의 기반이 되어주죠. 이 사실은 우리가 서로로부터 위로받을 수 있도록 하고 동시에 우리를 좌절에 지지 않게 해 줍니다.

우리는 타인의 인생사를 보며 깨닫기도 합니다. 나이듦은 젊음을 박탈당한 상태가 아니라 젊음에서 이어져온 상태였고, 삶이란 끊임없이 무언가로부터 분리되고 독립되어가는 과정이라는 것을요.

 

동시에 이는 콘도와 타치바나가 비가 그친 뒤 서로를 떠나야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나의 모습과 닮아있다 한들 타인의 젊음은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타치바나의 청춘은 콘도를 위로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콘도의 삶 또한 타치바나의 아픔을 채우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타인의 인생에 공감할지언정 타인의 시간은 나의 것이 될 수 없었습니다. 두 사람에게 필요했던 건 서로의 결핍을 상대방에게서 채우기 위한 융합과 공생이 아니라 상대방의 삶에서 용기를 얻어 자신의 삶을 긍정하게 되는 내재화와 성장이었지요.
 

영화 <사랑은 비가 갠 뒤처럼> 中


어느 비 오는 날 밤 콘도를 의지하러 그의 집으로 찾아온 타치바나는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격정에 그를 끌어안습니다. 콘도는 타치바나를 잠시 안았다가 결국 밀어냅니다. 모든 걸 아는 아픈 어른은 처음 아파본 아이에게 언젠가는 이해하게 될 위로의 말을 남깁니다. 지금의 아픔이 언젠가 너를 위로하게 될 것임을.

그렇게 두 사람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의 개별화되고 독립된 존재로서 자신의 인생을 살기 위해 엄마와 이별했던 것처럼, 비가 갠 어느 날 둘은 서로에게 독립하여 각자의 인생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합니다.

 

잃어버린 청춘 안에는 뭐든지 가능했던 눈부심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눈부심 뒤에 가려졌던 처음 세상에 발을 내디뎠을 때의 두려움, 시련 앞에 홀로 선 자의 고독함 또한 존재했습니다. 콘도는 자신을 의지하러 온 가냘프고 떨리는 어깨에서 자신만큼이나 아프고 고독한 청춘의 모습을 봅니다.

두려움에 떨며 발을 떼지 못하는 여린 소녀의 등을 가만히 밀어주며 콘도는 깨닫습니다. 내가 아팠던 것은 청춘이 지나갔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 또한 그녀처럼 두려움에 발을 떼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음을. 내 안의 불씨는 지나가버린 청춘과 함께 인생 어딘가에 두고 온 줄 알았건만, 멈춘 것은 나였을 뿐 지금도 그 찬란함과 잔인함을 함께 가진 불씨는 이름과 형태만 바뀐 삶이라는 모습으로 내 곁에서 타오르고 있었음을요.

콘도는 아주 오랜만에 자신을 긍정하고 책상에 앉아 원고지를 채우기 시작합니다.

 

타치바나는 함께 비를 피하던 강하고 따뜻한 존재의 그늘에서 벗어납니다. 어른은 전혀 강하지도 완성되지도 않았고, 오히려 나만큼 상처를 잘 받기도 하고 넘어져서 울기도 하는 그런 존재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인생을 긍정하고 내 등을 밀어줄 수 있는 따뜻함 또한 가지고 있었죠.

감당할 수 없던 젊음에 울던 소녀는 젊음을 잃어버린 어른에게 다시 일어나는 법을 배웁니다. 그녀는 집에 버려둔 스파이크를 다시 꺼내 신습니다. 타치바나는 마침내 다시 달리기 시작합니다.
 


젊음은 보내고 있는 동안에는 그것이 너무나 당연하지만, 잃어버린 후에는 지나치게 과대평가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청춘의 여러 가지 속성 중에서 일부만 분리하여 생각하고, 그럼으로써 너무나 쉽게 이상화하고 평가절하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청춘은 우리에게 뭐든 가능하게 해주는 만능의 열쇠 같은 것이 아니라 이름만 다른 삶의 한 모습이었죠. 그리고 이제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독립하려 합니다.

 

어머니로부터 성공적으로 독립한 아이는 어머니를 영원히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고독 속에서도 따뜻한 존재를 떠올리며 세상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청춘으로부터 독립한 어른은 무엇을 얻게 될까요? 아마도 그것은 언젠가 내 인생과 나의 유한함을 깨닫게 될 때 그것에 주저앉지 않고, 아직도 남아있는 눈 앞의 길로 용기 있게 걸어 나갈 수 있는 믿음과 긍정이리라 생각합니다.

 

함께 비를 피하며 견뎠던 두 사람은 어느 맑게 개인 하늘 아래 다시 만납니다. 비를 피하면서 나눴던 두 사람의 유대의 감정은 사랑이었을까요?

서로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는 한 우리는 그것이 타인에 대한 사랑인지 아니면 스스로에 대한 사랑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되지요. 우리가 한 명의 독립된 존재가 되어 현재의 모습을 받아들이며 자신의 모습을 긍정할 때 우리는 우리의 사랑이 어디에서 비롯되었고 누군가를 향하고 있는지 진정으로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을 비를 피하며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비가 갠 뒤처럼 합니다.
 

 

 

 

권순재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당신의 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
분당서울대병원 전임의
(전) 메디플렉스 세종병원 정신건강의학과장 치매전문센터장
저서 <약한 게 아니라 아팠던 것이다>, <이제 독성관계는 정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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