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권순재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우리가 기억을 통해 위로받는 방식들

- 영화 러브레터, 1995
 

<러브레터, 1995> (수입:조이앤시네마/배급:제이앤씨)


이번에는 정말로 잊겠다고 다짐했는데, 뒤돌아보면 당신은 늘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당신의 시간은 멈춰버렸고 나의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이제 우리는 서로 다른 시간대를 살아가고 있건만, 내 마음속 한 구석에는 여전히 당신의 부재를 인정하지 못하는 내가 있습니다. 과거만 보면서 살 수 없기에 오늘도 나는 하루를 살아내고 어떤 때는 며칠 동안 당신을 잊고 지내기도 하지만, 우연히 열어본 옷장 속의 당신의 향기 속에서 당신은 여전히 살아있고, 당신과 함께 있는 동안 들어버린 나의 소소한 습관들이 나를 무너지게 합니다.

하지만 당신이 없는 오늘의 상실감은 당신과 함께했던 찬란한 나날의 그림자와도 같기에 나는 마치 담배를 끊지 못하는 사람처럼 아픈 기억을 끊지 못하고 때로는 당신을 잊고 지낸 나날들이 너무나 길다 싶을 때면 미안함도 느낍니다. 자물쇠 채워둔 창고에 오래 넣어두고 잊어버린 물건처럼, 당신과 나 사이의 모든 기억이 시간과 함께 모두 사라져 버릴 운명이라면, 지금 내 아픔과 고뇌는 대체 무엇을 위한 걸까요? 당신을 지우기에도 간직하기에도 이렇게 아픈 줄 알았다면 애초에 당신을 만나지 않는 게 좋았을 거라고 생각도 해보지만, 나의 다짐과 상관없이 뒤돌아보면 기억은 늘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영화 <러브레터> 中


2년 전 등산사고로 사랑하는 연인 이츠키를 잃은 히로코는 죽은 연인의 3주기에 참석합니다. 이제 그녀의 곁에는 새로 사랑하는 연인도 있지만 그녀의 마음은 여전히 죽은 이를 보내지 못합니다. 우연히 졸업앨범에서 찾은 이츠키의 옛 주소로 답장이 올 리 없는 편지를 보내보는 히로코였으나 그녀의 편지를 받게 된 것은 한 때 그와 같은 반이었던 동명이인의 여성 이츠키였습니다. 죽은 연인의 추억 한 조각이라도 더 가지고 싶었던 히로코는 여자 이츠키에게 옛 연인의 추억을 나눠달라고 부탁합니다. 편지가 거듭되며 그녀는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살아있는 옛 연인의 기억에 행복해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는 다른 사람의 기억 속에 살아있는 연인이 자신만의 것이 아니게 되어 어디론가 떠나갈까 봐 불안해합니다.

북쪽의 도시 오타루의 도서관 사서로 일하고 있는 여자 이츠키는 고등학교 시절 자신과 같은 이름의 남자 이츠키를 만나 서로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서로의 마음은 끝내 닿지 않았고, 여자는 그것이 사랑인지도 몰랐습니다. 자신 안에 일렁이는 그 작은 물결의 의미를 알기에 그녀는 너무 어렸고, 그 시기는 그녀가 아버지를 잃은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어린 그녀가 아버지의 죽음을 실감하게 된 얼음 속에 박제된 잠자리처럼, 수줍었던 그녀의 첫사랑은 기억의 저편에 잠들어 잊혀집니다.

 

영화 러브레터는 과거에서 보내진 기억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우리가 겪는 이 순간을 끊임없이 과거로 흘려보냅니다. 이 순간이 영원할 것처럼 강렬할지라도 기억은 조금씩 희미해지고 종래에는 단서가 없이는 떠올릴 수도 없을 만큼 작아져 마음 한 구석의 잔물결로만 남게 됩니다. 하지만 이 마음 한구석의 잔물결은 어떤 계기를 통해 한 번씩 강렬한 파도가 되어 나를 뒤흔들어놓습니다.

오늘날 과학자들은 기억을 크게 외현기억(explicit memory)과 암묵기억(implicit memory)으로 나눕니다. 외현기억은 우리가 겪었던 사건이나 언어화할 수 있는 지식 등의 의식적인 기억을 말합니다. 내현기억은 우리가 자동차를 운전하거나 과거에 나를 아프게 만들었던 사건을 떠올릴 때 받는 불쾌한 느낌 등의 비언어적인 학습양상을 말합니다. 연인과 함께 보냈던 순간의 기억이 외현기억이라면, 연인이 떠나버린 후에도 내게 남아있는 습관들은 암묵기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외현기억은 흐릿해져 습관이나 느낌 등의 암묵기억으로만 남게 되지만 사소한 계기로 암묵기억은 생생한 외현기억으로 되살아나기도 합니다.
 

영화 <러브레터> 中


고등학교 때의 남자 이츠키의 기억은 여자 이츠키에게는 그다지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소년 이츠키는 좋아한다는 말 대신 의미를 알 수 없는 행동으로 소녀를 대하기 일쑤였습니다. 같이 도서실 관리위원 일을 하면서도 일은 소녀에게 넘겨버리기 일쑤이고 소녀가 소년을 좋아하는 자신의 친구를 잘해보라고 소개해주자 다음날 종이봉투를 소녀의 얼굴에 씌워버립니다.

하지만 소녀가 친구들의 놀림에 눈물을 흘리자 온순하던 그는 친구들에게 달려들었고, 소녀와 조금이라도 함께 있고자 자전거등을 불빛 삼아 밤늦게까지 바뀌어버린 시험지를 맞춰봅니다. 소녀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눈으로는 그의 행동을 쫓고 있었고 그렇게 햇살 비치는 커튼을 배경 삼아 그는 그녀의 마음에 들어옵니다. 다리를 다친 그가 엉터리 같은 달리기로 육상대회를 망칠 때에도 그 모습에 일렁거리는 자신의 마음에 소녀는 고개를 돌려버립니다.

그리고 편지를 받은 히로코와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그의 불퉁거림이, 그의 답답할 만큼 수줍은 행동에 얼마나 많은 언어와 감정이 담겨 있었는지를요. 그가 생명이 꺼져가는 마지막 순간에도 자신의 첫사랑인 소녀를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도 말이죠. 같은 남자의 다른 시간을 사랑했던 두 여자가 주고받는 편지를 통해 이미 육체는 죽고 의식할 수도 없을 만큼의 작은 물결인 암묵적 기억으로만 남아있던 남자 이츠키는 언어라는 육체를 얻어 외현기억으로서 되살아납니다.
 

영화 <러브레터> 中


영화는 기억을 과거로 돌려보내주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연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히로코는 죽은 연인이 살아있는 것처럼 그에게 편지를 보내고 동사한 연인을 따라가려는 듯 눈 위에 누워보기도 합니다. 도로가 된 연인의 옛 집터를 떠나지 못하고 망연하게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은 기억을 과거로 보내주지 못하는 그녀의 현재를 보여줍니다. 아버지를 병원에서 잃었던 여자 이츠키는 심한 감기에도 불구하고 병원에 가기를 싫어합니다. 병원에 가면 떠오르는 죽은 아버지의 창백한 얼굴과 병원에 가득 찬 죽음의 냄새의 기억은 그녀가 그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을 괴롭게 만듭니다.

이츠키를 보내주지 못하는 건 그를 사랑했던 두 여성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아들을 잃은 어머니는 자식의 3주기에도 아들을 보내지 못합니다. 등산 중에 친구를 잃은 등산가는 차마 산속에 친구를 두고 올 수 없어 산에서 살아갑니다. 아들을 폐렴으로 잃은 여자 이츠키의 할아버지는 아들을 잃은 집을 떠나지 못하다가 이번엔 폐렴으로 쓰러진 손녀를 업고 눈 오는 밤을 하염없이 달립니다.

 

1937년 미국의 의사이자 신경해부학자인 제임스 파페즈(1883-1958)는 기억과 감정, 감각의 순환구조를 발견합니다. 그는 해마에 가해지는 특정 자극이 강렬한 감정반응을 유발한다는 것에 주목했습니다. 그는 기억을 담당하는 기관인 해마(hippocampus)에서 시, 청각 등 후각을 제외한 모든 감각을 중계하는 시상(thalamus)을 거쳐 인지와 의식, 고통 등을 조절하는 대상회(cingulate gyrus)로 이어졌다가 다시 해마로 돌아오는 신경회로인 파페츠 회로(Papez circuit)를 통해 기억이란 창고처럼 차곡차곡 쌓이는 단일구조가 아니라 현재의 시각, 청각 등의 감각자극과 감정, 언어가 끊임없이 서로 영역을 주고받는 순환적인 구조라는 것을 밝혀내었습니다.

때때로 사소한 감각에 자극받은 우리의 마음은 강렬했던 그 시절의 감정을 불러옵니다. 그리고 기억과 감정, 감각의 순환구조로 인해 어떤 기억은 우리에게 있어서 과거가 아니라 현재 그 자체가 됩니다. 과거는 단순한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내 행동의 원형이자 원리가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영향은 감정과 습관으로 여전히 내 곁에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그가 더 이상 내 곁에 존재하지 않기에 이 감정과 현실의 낙차가 우리를 기쁘면서도 동시에 슬프게 만듭니다. 여자 이츠키가 남자 이츠키와의 그 모든 설레고 달콤했던 추억을 되찾을지라도 둘은 더 이상 만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따뜻하고 아련하지만, 동시에 마음 한편이 괴로운 느낌을 받게 됩니다. 잃어버린 사랑이 늘 그렇듯이요.

하지만 동시에 이는 우리가 기억을 통해 위로받고 구원받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과거의 기억과 함께 강렬하게 찾아오는 사랑의 감정은 우리에게 있어 언젠간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이별을 극복하게 합니다. 사랑했던 이와의 순간 때문에 우리는 사랑의 종말이라는 아픔을 딛고 새로운 사랑을 할 수 있게 됩니다. 히로코는 이츠키와의 편지를 통해 타인의 기억 속에 여전히 살아있는 연인의 모습을 보게 되고, 그의 죽음으로 인한 참담함만큼이나 찬란했던 연인과의 순간을 되찾습니다.

 

그의 육체는 사라졌지만, 그가 남겨준 행복한 기억은 나의 어딘가에 남아 살아가고 있기에 그녀는 결국 연인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현재를 살기로 합니다. 그녀는 연인이 최후를 맞이한 설산을 향해 마지막으로 연인에게 잘 지내고 있냐는 눈물 섞인 안부인사를 합니다. 지금까지 마치 연인이 살아있는 것처럼 행동해왔던 그녀는 자신과 연인이 이제 서로 다른 세상에서 살아감을 인정하고 자신을 묶어왔던 기억을 과거로 보내줍니다.

이츠키는 히로코와의 편지를 통해 자신이 아버지를 잃었던 어두운 시절, 사랑을 담아 나를 바라봐주던 따뜻한 존재를 기억해 냅니다. 아버지를 잃고 힘들어하던 그녀의 십 대 시절을 대표했던 죽음의 냄새로 가득 찼던 병원의 기억은 사랑하는 이와 엇갈리는 시선을 주고받았던 아늑한 도서실의 기억으로 대체됩니다. 그리고 그 따뜻하면서도 달콤한 기억은 과거 그녀가 사랑했던 그를 향해 비추던 봄날의 포근하면서도 따사로운 햇살처럼 그녀를 감싸 안습니다. 사경을 헤매다가 깨어난 그녀는 되살아난 자신의 기억에게 잘 지내고 있었냐는 그리움 섞인 안부인사를 전합니다.
 

영화 <러브레터> 中


결과적으로 영화 러브레터는 과거에서 보내진 기억을 현재에서 다시 쓰고, 다시 과거로 보내주는 이야기입니다. 프로이트가 생전의 연구에서 기억의 사후성(Nachtraglichkeit)의 개념에 대하여 언급했듯이 기억은 서랍 속에 간직되어 먼지가 쌓여가는 옛날의 일기가 아니라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와 만나 대화를 주고받으며 끊임없이 쓰여지는 편지와도 같음을 보여줍니다. 때때로 늦어지고 지연되고 오해가 쌓일지 몰라도 기억은 필연적으로 현재에 도달하게 되어 현재의 우리와 함께 살아가게 되죠. 그리고 우리는 기억에 새로운 의미를 덧붙여 다시 과거로 보내줍니다.

사랑했던 이와 지금까지도 함께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하지만 어떤 형태로든 모든 사랑에는 끝이 있게 마련이죠. 그러나 사랑했던 이와 함께 했던 나날들과 감정들은 나의 일부가 되어 지금도 가끔 나에게 편지를 보내곤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와 싸우고, 과거에 아파하고, 과거를 오해하기도 하다가 가끔은 과거에 미처 알지 못했던 걸 깨닫기도 하고,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나 자신에 아쉬워하다가 가만히 떠올리며 웃음 짓고, 그다음엔 고이 접어 마음 한구석에 넣어둡니다.

 

영화의 마지막, 먼 시간을 돌아 전달된 남자 이츠키의 편지에는 소녀의 초상화가 담겨있었습니다. 그것을 받아 든 여자 이츠키는 기쁨인지, 슬픔인지, 그리움인지, 아쉬움인지 모를 감정에 마음이 벅차오릅니다. 그녀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는 채로 그 편지를 주머니에 넣어두고자 하지만 그녀의 옷에는 주머니가 없습니다. 그렇게 기억은 시간을 넘어 다시 찾아옵니다.
 

후지이 이츠키님
이 편지에 담긴 추억은 당신 거예요.
그러니 당신이 가져야 해요.
지금까지 고마웠어요.
 

영화 <러브레터> 中


 

 

권순재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당신의 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
분당서울대병원 전임의
(전) 메디플렉스 세종병원 정신건강의학과장 치매전문센터장
저서 <약한 게 아니라 아팠던 것이다>, <이제 독성관계는 정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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