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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마음을 읽다] 오늘 나는 처음으로 열차의 밖으로 나왔습니다. -설국열차, 2013
권순재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 승인 2019.04.30 04:51

[정신의학신문 : 권순재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전철은 차가운 새벽 공기를 뚫고 달립니다. 당장 뛰어내리고픈 충동과 가슴의 답답함을 애써 누른 채 나는 어제의 피로가 채 가시지 않은 지친 몸을 차가운 금속 벽에 기댑니다. 가슴이 언제 마지막으로 뛰었는지 모르겠어요.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내 삶을 사랑하기도 했었고요. 예전의 나는 눈을 반짝이며 슈퍼맨 같은 아버지의 등 너머를 궁금해했었죠. 반에서 가장 힘센 아이의 무지막지한 주먹도 선생님의 회초리조차도 내 발걸음을 막지 못했죠.

하지만 지금 나는 달리는 네모난 상자 안에 있습니다. 네모난 명찰 속 딱딱하게 웃는 사진 밑에 박힌 과장 직함이 나보다 나를 더 잘 설명해주고, 월급 명세표 엑셀 시트 안의 아라비아 숫자가 내가 얼마나 가치 있는 인간인지를 규정하죠. 이 작은 칸 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수많은 열차의 칸을 지나왔었죠. 지금 생각해보면 단지 나와 같은 네모 하나였던 아버지와 선생님들이 충고했던 대로요.

‘세상은 원래 그런 거’라며 ‘제발 남들처럼 살자’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다니던 상사 한 명은 며칠 전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졌습니다. 물론 그 빈자리는 비워지자마자 바로 다음 사람으로 채워졌죠. 순간 휘청하고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낀 나는 쓰러지지 않기 위해 발목과 허리에 힘을 줍니다. 오늘도 차가운 새벽 공기를 뚫고 네모 상자가 어두운 터널을 달립니다. 나는 다시금 머리를 차가운 금속 벽에 기댑니다. 나는 졸면서 며칠 전 봤던 영화의 꿈을 꿉니다.

 

 

모든 생명체가 사라지고 얼음만 남은 어떤 세상, 열차 하나만이 눈과 얼음을 뚫고 질주합니다. 완전한 자급자족 시스템을 갖춘 이 열차는 전 세계에 깔린 레일을 통해 일 년마다 세계를 한 바퀴씩 순환합니다. 이 열차에서만이 사람들은 살아갑니다. 하지만 열차는 결코 평등하지 않습니다. 꼬리칸의 사람들은 추위와 배고픔에 떨며 살아가고 매번 앞 칸에서 어린아이들을 차출해갑니다. 꼬리칸의 젊은 지도자 ‘커티스’는 이 가혹한 현실을 바꾸고자 합니다. 그는 열차의 창조자인 윌포드를 만나러 열차의 동력기관인 ‘엔진’이 존재하는 열차의 머리칸으로 전진합니다. 그의 원동력은 스승이자 정신적 지주인 ‘길리엄’과 앞칸의 누군가가 보내주는 빨간 쪽지였죠.

꼬리칸의 옛 지도자 ‘길리엄’은 현재의 커티스를 탄생시킨 존재입니다. 커티스는 한 때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고 아기를 잡아먹으려고 했고, 길리엄은 스스로를 희생하여 아기를 구합니다. 자신의 팔을 잘라 굶주린 자들을 먹인 길리엄에게 커티스는 감화됩니다. 그는 마음 한 구석에 길리엄처럼 자신의 팔을 잘라 내주지 못한 스스로에게 열등감을 품기도 합니다. 길리엄은 커티스의 정신적 아버지입니다.

 

아버지를 떠난 커티스는 배고픔과 추위를 상징하는 꼬리칸을 떠나 열차의 모든 문을 열 수 있는 보안설계자 ‘남궁민수’와 그의 딸 ‘요나’를 만납니다. 하지만 이들의 모습은 어딘가 이상합니다. 옛 반란의 가담자로서 갇혀있었으면서도 부녀는 커티스의 반란에 회의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더군다나 문을 한 개 열 때마다 이 열차의 폐기물이자 환각물질인 ‘크로놀’을 집요하게 요구합니다. 서로를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음에도 커티스에게 문을 열어주고 그의 여정에 함께하는 이 남궁민수 부녀는 커티스의 동반자입니다.

반란의 첫 번째 목적지인 물 공급칸에서 커티스 일행과 앞 칸의 군인들은 피가 난자한 야만적인 혈투를 벌입니다. 터널을 지나면서 열차 안이 깜깜해지고 어둠 속에서도 앞을 볼 수 있는 야시경을 갖춘 군인들에게 커티스 일행은 속절없이 살해당합니다. 커티스는 외칩니다.

“불! 불이 필요해!”

라고 말이죠. 이윽고 꼬리칸에서 사람들이 불을 전달합니다. 마치 올림픽 성화를 봉송하듯 횃불은 다음 사람으로 그다음 사람으로 이어지길 거듭했다가 거대한 빛의 무리가 됩니다. 불의 힘으로 군인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커티스는 물 공급칸을 손에 넣습니다. 하지만 그곳은 그의 종착지가 아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인간이 유아기에서 성인기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은유이기도 합니다.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안락한 공간에서 벗어나 세상으로 내던져진 아기는 추위와 배고픔 등의 생존의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아기는 부모를 보호자 삼아 생존의 문제를 극복합니다.

부모와 함께 유년기를 거친 그는 점차 부모를 떠나 세상에 홀로 서기 시작합니다. 청소년기를 거치며 친구를 얻고, 적을 만나고 폭력의 피해를 받고 자신이 폭력의 가해자가 되기도 합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이 시기에 그의 길을 밝혀주는 것은 바로 불로 상징되는 지식과 경험입니다. 과거 여러 사람들로부터 이어져온 지식(불)은 그의 대에서 경험(빛)이 되어 앞을 밝혀줍니다. 그는 경험을 통해 난관을 극복하고 성인기로 진입합니다.

 

커티스는 이만 끝내자는 길리엄의 만류를 뿌리치고 전진합니다. 총을 가진 군인들로부터 순식간에 꼬리칸이 제압되고 이 과정에서 길리엄을 잃고 퇴로조차 끊긴 커티스는 이제 뒤쪽에서의 추격과 앞쪽에서의 저항에 동시에 시달리게 됩니다. 성인기에 이르러 인간이 마주치는 갈등은 청소년기 때보다 훨씬 복잡하죠. 어른은 무엇이 진실인지를 끊임없이 의심해야 하고, 온갖 종류의 유혹과 미망에 흔들립니다. 이제 삶은 단순히 뒤쪽과 앞쪽으로 나뉘지도 않고 고난의 종류도 단순한 폭력에서 예의로 가장된 위협까지 훨씬 다양해지기 시작합니다. 커티스의 투쟁의 양상은 크게 변화합니다.

그는 열차 내부에 존재하는 거대한 수족관, 아이들을 가르치는 학교를 지납니다. 커티스는 점차 열차에 존재하는 불합리의 이유와(생태계를 유지하기 위한 살인) 열차의 구조가 변하지 말아야 하는 당위의 문제(시스템 존속을 통한 생존)와 맞닥뜨리며 신념을 시험받습니다. 크로놀이 주는 환각에 취한 사람들을 보며 아연실색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도달한 엔진실, 열차의 창조자 윌포드는 커티스에게 충격적인 비밀을 밝힙니다.

“정말 몰랐나? 길리엄과 나의 관계를? 우리는 진정한 파트너였네.”

사실 커티스의 사상적 아버지인 길리엄과 커티스의 숙적인 윌포드는 오래전부터 한통속이었죠. 열차의 질서를 다시 쓰는 것처럼 보였던 커티스의 전진조차도 두 노인의 시나리오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둘은 일정 주기마다 한 번씩 반란을 일으키도록 사람들을 조종하여 인구수를 조절, 열차의 생태계를 유지하여 왔던 것이었죠. 커티스에게 용기를 주던 빨간 쪽지조차도 그를 조종하기 위해 윌포드가 보낸 것이었습니다. 충격적인 진실에 자신의 근간을 부정당하고 망연자실한 커티스에게 윌포드는 자신의 뒤를 이어 열차의 관리자가 되라고 속삭입니다. 이 방식이 유일하게 모두를 살릴 길이며 세상의 섭리라면서요.

 

 

그런 때가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세상의 구조를 깨닫는 시기요. 어떤 거대하고도 올바른 흐름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그 흐름에 저항해 왔던 나의 지난날들이 부끄럽고 치기 어린 행동처럼 느껴지는 그런 시기요. 우리는 우리의 아이다움을 부끄러워하며 어른스러워집니다. 다른 사람들이 비겁하고 용기가 없어서 그렇게 살았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너무나 속물적으로 보여서, 그래서 절대로 닮고 싶지 않았던 우리의 아버지들과 선배들이 사실은 누구보다도 현명한 사람들이었고 내가 가진 목마름과 불만들은 미숙하고 어리석은 꼬마의 투정에 불과했습니다.

자유의지라고 생각했던 나만의 치열한 투쟁도 사실은 거대한 세상의 일부였죠. 일 년에 한 번씩 세상을 도는 열차, 열차의 꼬리와 열차의 앞부분이 사실은 연결되어있는 구조라는 순환적 아름다움. 모든 인간은 이렇게 조화롭게 살아가죠. 모두가 걸어왔던 그 길을 그 흐름대로. 꼬리칸과 앞칸이 애초에 하나라면 어차피 전진은 의미가 없죠. 이 완벽한 구조를 유지시키기 위한 적응이 있을 뿐. 길리엄에서 시작한 커티스의 여정은 윌포드를 만나고, 우리의 자아는 세상의 이치와 섭리를 깨닫고 고된 여행을 끝마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잘 적응하는 조화로운 사회의 일원이 되어 살아갑니다. 그럴 터였습니다.

그런데 흔들리는 이 열차 속에서 나는 왜 아직도 괴로운 거죠? 이것이 분명 올바른 결론일 텐데, 나는 숨이 막힙니다. 분명 다른 사람들은 온전히 숨을 쉬고 있는데 나 혼자 마치 공기 한 모금도 없는 수천 미터 심해에서 짓눌리는 느낌이 들어요. 아무리 숨을 쉬어도 폐 안쪽으로 산소 한 조각 들어오지 않을 것만 같은 이 질식감이, 생존에 필요한 무언가를 잃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이 위태로운 느낌이 나를 미칠 것 같이 만듭니다.

 

남궁민수의 딸 요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커티스의 발밑을 가리킵니다. 엔진실의 바닥에는 예전부터 꼬리칸에서 사라진 아이들이 멍한 표정으로 기계의 부품이 되어 일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엔진은 수명이 다해가고 있었고 대체할만한 부품도 없어진 지 오래였죠. 완벽하지 않은 것을 완벽한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상처 입은 아이는 성장을 멈춰버렸습니다. 진지하게 마주 봐야 할 내 결핍과 고통을 바닥에 묻어버리고 그 위를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완성된 세상의 이치로 덮어버린 결과, 내 마음의 가장 여린 부분은 마음의 가장 밑바닥에서 영원히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진정 중요한 것은 내 발 밑에 묻혀있었죠.

커티스는 엔진의 밑바닥으로 손을 뻗어 아이들을 구해냅니다. 우리의 삶의 목표는 어떤 거대하고 완전한 무언가의 일부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작고 초라하더라도, 그래도 진정한 나 자신이 되어 그 자체로 하나의 전체가 되는 것이었죠. 영원히 나를 태우고 달리는 거대한 열차나 선로 따위는 없었습니다. 내 고뇌를 대신해주는 이론 같은 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고, 영원히 따를 수 있는 스승이나 선배도 없었습니다. 이젠 끝낼 때가 됐어요. 커티스가 열차 밑바닥에 있는 아이를 끌어올려 구하는 순간 그의 팔이 기계에 끼어 뜯겨 나가고, 마침내 커티스는 자신의 아버지이자 스승들을 초월합니다.

 

열차 안의 사람들에게 남궁민수는 참 이상한 사람이었습니다. 모두가 앞쪽과 뒤쪽만을 바라볼 때 그만은 밖을 바라봅니다. 그가 열차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을 때 사람들은 그가 미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말합니다.

“문을 여는 거야. 바깥으로 나가는 문들 말이야. 워낙 18년째 꽁꽁 얼어붙어 있다 보니까 이게 무슨 벽처럼 생각하게 됐는데 사실은 문이란 말이지. 그래서 이 쪽 바깥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이 얘기야.”

극중에서 남궁민수는 문을 하나 열 때마다 크로놀을 받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한 꼭지를 지날 때마다 획득하는 것, 누군가는 이것에서 환각과 유희를 봅니다. 하루 종일 주저앉아 이것이 가져다주는 환상에 탐닉하며 발걸음을 멈추고 현실과 멀어집니다. 하지만 남궁민수와 커티스는 냄새를 맡는 대신 불을 붙입니다. 불과 크로놀의 만남으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고, 이 폭발은 열차의 벽에 구멍을 뚫어놓습니다. 이 영화에서 불은 지식과 경험을 의미하죠. 누군가에겐 유희 도구에 불구하지만 현실에서 얻은 지식과 경험을 만나면 큰 소리로 폭발하며 나의 세상의 패러다임을 바꿔주는 것. 크로놀은 철학과 사유를 의미합니다.

남궁민수는 커티스의 근간을 만들어준 아버지도 아니고, 먼 곳에서 정답을 만들어두고 그를 기다리는 스승과 선배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동반자이자 문을 여는 자입니다. 그는 정답을 주지 않고 단지 문을 열어줍니다. 길리엄이 아버지, 윌포드가 선배와 스승을 의미한다면, 남궁민수는 철학자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앞만을 보고 전진하던 커티스는 그의 길이 무의미해진 순간, 남궁민수 부녀에 의해 아래와 밖을 바라보게 됩니다. 마침내 열차의 내부가 아닌 열차의 바깥으로 나가는 문이 열립니다.

 

 

뺨을 간질이는 바람에 머리가 맑아지며 나는 잠에서 깨어납니다. 이름 모를 새들의 소리, 도로 위의 자동차 소리, 새벽을 여는 사람들의 소리. 어느샌가 나는 상자 바깥에 서 있었습니다. 나는 기억해냅니다. 내가 네모난 열차를 돌리는 기계부품이 아니라, 피가 흐르고 살아 숨 쉬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사람들이 말하는 세상의 진리에 눌려, 타인이 규정하는 올바른 내 모습에 눌려 천천히 천천히 압사당하고 있었다는 것을 지금에야 알아차립니다.

당위에 짓눌려 있던 나에게 필요했던 것은 신음소리를 잠재우기 위한 안정제와 마취제가 아니라 마음 밑바닥에서 고통받고 있던 나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하기 위한 경험과 사유였습니다. 거짓이 진실이 되길 숨죽여 기다리다가 너무 오랫동안 아파하며 머물러 있었어요. 정해진 길을 정신없이 달려가기 전에 내가 무엇을 딛고 서 있는지를 살피고, 내가 서 있는 그림자를 바라보며 내 자신의 소리에 좀 더 귀를 기울여야 했죠.

그렇게도 나를 괴롭히던 질식감과 압박감이 사라지고, 나는 내가 떠나온 강철로 만든 열차를 바라봅니다. 나는 내 발 밑을 살핍니다. 상자 바깥의 이 장소는 진정한 바깥인지, 아니면 이곳조차도 또 다른 상자 속인지 고민해봅니다. 하지만 이곳이 또 다른 상자 속에 불과하더라도 괜찮아요. 언젠가 나는 이 상자의 문마저 찾아내고 주저 없이 그 문을 열어버릴 테니까요. 오늘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열차의 바깥으로 나왔습니다.

 

현재로부터 20년 후, 당신은 했던 일보다
하지 않았던 일로 인해 더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돛을 펼쳐 안전한 항구를 떠나 항해하세요.
당신의 항해에 무역풍을 가득 담으세요.
탐험하고, 꿈꾸고, 발견하세요.

마크 트웨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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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재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info.psy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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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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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갈피 2019-05-13 16:59:56

    우연히 발견한 칼럼, 늘 즐겁게 찾아와 읽고 있습니다. :) 좋은 글 감사합니다.   삭제

    • 돼지바 2019-04-30 22:33:32

      놀랍네요.그동안 설국열차를 정치사회학적으로만 읽고는 해석이 끝났다고 안주했는데,이렇게 정신의학적으로 새롭게 풀 어설명하다니 놀랍습니다.   삭제

      • MK285 2019-04-30 16:29:44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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