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선의 [가족의 심리학] (13)

[정신의학신문 : 서대문 봄 정신과, 이호선 전문의] 

 

 

 

어려울 때 믿을 건 가족뿐이다

- 캄캄할수록 또렷이 드러나는 빛

하는 일마다 실패를 거듭하던 영수 씨는 낙담 끝에 모두와 연락을 끊고 숨어버렸다. 아무런 희망이 없었다. 자신을 받아주는 직장도 없었고, 자신을 인정해주는 사람도 없었다. 무일푼이었던 그는 당연히 집도 절도 없었다. 몸 하나 누일 곳 없고, 편히 밥 한 끼 먹을 공간이 없다는 사실이 너무도 비참했다. 정처 없이 거리를 헤매다 허름한 고시촌에 들어가 방 하나를 빌려 몸을 뉘었다. 볼 위로 뜨거운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허망하고 참담했다.

친구를 찾아갔었다. 불알친구였다. 까 보이지 않아도 내 속에 뭐가 들어 있는지,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만한 친구였다. 보증 좀 서달라고 했다. 대출을 받아 위기를 넘기기 위해서였다. 신용도가 낮아 은행 대출은 어려웠기에 제2금융권의 대출을 받아야 했다. 친구는 술 한 잔 마시자고 했다. 소주잔이 몇 번 오간 뒤 심각한 표정으로 친구가 말했다.

 

“너도 잘 알잖냐. 그 사람이 보증 서는 걸 질색해요. 도저히 안 되겠다. 정말 미안하다.”

 

아내 핑계를 댔다. 보증을 서주려면 이혼 서류에 도장 찍고 서주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더 할 말이 없어서 그냥 일어섰다. 화가 났지만, 꾹 참았다. 중고등학생 시절 참고서 살 돈이 없다고 할 때나 수학여행 갈 돈이 없다고 할 때마다 영수 씨는 그 친구에게 여러 번 돈을 마련해 주었다. 대학에 입학했을 때도 학자금 대출을 받아야 한다며 형님께 말씀드려 보증 좀 서달라고 부탁하자 영수 씨는 두말하지 않고 형을 졸라 보증을 서준 적이 있었다.

그랬던 자신에게 이리 야멸차게 거절하다니 속이 쓰렸다. 호형호제하던 여러 선후배에게 전화했지만, 모두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꽁무니를 뺐다. 다들 제 살기 바빴다. 친구나 선후배도 여유 있을 때나 잘 나갈 때 이야기지 막상 영수 씨 코가 석 자가 되자 안면을 바꿨다. 그는 결국 누구 도움을 받아 위기를 넘기려던 계획을 포기했다. 누나나 형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염치가 없었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고 나서 누나와 형 도움으로 생활하고 공부도 했는데, 못난 모습 보이며 또 손을 벌리기 싫었다. 살고 싶지 않았다. 살아갈 의지도 없었다. 극단적인 생각까지 엄습해 왔다.

 

“영수야! 영수야! 문 열어봐, 영수야!”

 

꿈결인지 현실인지 구분할 수 없었지만, 어디선가 애타게 자기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영수 씨는 부스스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누나와 형이었다. 누나가 영수 씨를 와락 끌어안았다. 뒤에는 경찰이 서 있었다. 세 사람은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

 

“그런 일이 있으면 누나나 형한테 연락했어야지. 우리가 남이냐? 우리는 피붙이야. 피붙이가 뭐냐? 좋을 때만 가족이야? 힘들고 어려울 때 짐을 나눌 수 있는 게 가족인 거야.”

“미안해, 누나 그리고 형. 염치가 없어서…… 그런데 나 여기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

“친구가 전화했더라. 네가 힘들다고. 연락이 하도 안 돼서 경찰에 신고해서 찾아낸 거야.”

사진_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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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수 씨는 누나와 형의 도움으로 당장 급한 일부터 해결한 뒤 조금씩 어려움을 이겨나갔다. 틈틈이 병원에 들러 치료를 받으면서 공황장애 증상도 많이 호전되었다. 영수 씨는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아찔하다. 자칫 잘못된 선택을 할 수도 있었는데, 가족의 도움으로 위기를 잘 넘겼기 때문이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체험한 순간이었다.

가족은 가장 가깝기에, 매일 얼굴을 마주 보며 살아야 하기에, 서로에 대해 너무 잘 알기에, 상대방을 향한 기대와 바람이 남달리 크기에, 인위적으로 맺고 끊을 수 없는 필연적 관계이기에 역설적으로 타인보다 더 자주 상처와 실망과 고통을 주고받는다. 마음에 없는 말을 무심코 내뱉기도 하고 하지 않아도 될 행동을 쉽사리 저지르기도 한다. 그래서 정신의학과 심리학 분야에서 가족이라고 하면 정신질환이나 심리적 일탈을 촉발하거나 악화시키는 힘들고 불편한 관계로 다루어질 때가 대부분이다. 차마 남들에게는 말하지 못하는 깊은 슬픔의 근원도,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쓰라린 기억의 아픔도 가족으로부터 기인한 것들이 많다. 서점에 나가 보면 가족을 다룬 책들 대다수가 어두운 면에 조명을 맞추고 있다.

 

하지만 외롭고 쓸쓸할 때, 세상에 나만 남겨졌다고 느껴질 때, 누구도 내 힘든 처지를 돌아보려 하지 않을 때, 아무도 내 지친 손을 잡아주지 않을 때, 알지도 못하면서 내게 손가락질할 때, 아무리 하소연해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을 때, 이불 속에서 혼자 눈물로 베개를 적실 때 간절히 생각나는 건 가족이다. 돌아가고 싶은 건 가족의 품이다. 보고 싶은 건 어머니, 아버지, 누나, 형, 언니, 오빠, 동생이다. 가족은 고향 같은 것이다. 좁고 불편해서 벗어나고 싶지만, 벗어나 보면 자꾸만 돌아가고 싶은 곳이다. 억압당하는 것 같고 족쇄 같아서 떠나고 싶지만, 떠나 보면 한없이 그리워지는 곳이다. 언제 어떤 모습으로 돌아가더라도 왜 왔냐, 뭐하러 왔냐 따지지도 타박하지도 않고 온전히 등 토닥이면서 반겨주는 곳이다.

이 세상 모든 관계는 손익과 득실을 따진다. 아무리 절친한 친구나 선후배 사이라도, 많은 도움과 혜택을 주고받은 각별한 인연이라도 결정적일 때는 자신의 유불리를 따질 수밖에 없다. 이것이 인지상정이다. 모든 인간은 이기적이고 팔이 안으로만 굽는 까닭이다. 큰 가치와 명분을 따라 손익과 득실을 따지지 않고 살신성인하는 예도 있지만, 이는 아주 드문 경우다. 뭔가를 줬으면 받기를 기대하고, 받았으면 뭔가 줘야 한다는 부담을 갖게 마련이다.

 

그러나 가족 간에는 그렇지 않다. 손익과 득실을 따지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관계다. 주고 또 줘도 아깝지 않거나 되돌려 받을 생각이 나지 않을 수 있는 특별한 사이다. 물론 가족 간의 사랑이 완벽한 사랑이거나 전혀 조건 없이 이루어지는 완전한 사랑은 아니다. 애증과 희비가 교차한다. 불만과 갈등도 있다. 그렇지만 다른 관계에 비하면 조건을 따지지 않는 정도 또는 비율이 상당히 높다는 것이다. 부모와 자식, 형제자매 관계는 핏줄로 이어진 관계고, 부부 관계는 어찌 보면 핏줄보다 더 진한 유일무이한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어떤 사랑의 관계보다 가족애와 부부애가 우선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위 사례에서처럼 벼랑 끝에 서 있다고 느껴질 때 손잡아줄 사람은 가족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족 간에는 어려웠던 시절을 함께 보낸 경험, 밥상에 둘러앉아 허겁지겁 수저를 부딪치며 허기를 채운 기억, 어렸을 때부터 어른이 될 때까지 성장 과정을 함께하며 볼 것 못 볼 것 다 봤던 추억 등이 켜켜이 쌓여 있다. 아빠가 직장에서 온갖 모욕을 참아내며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고 할 수 있는 건 가족이 있기 때문이다. 엄마가 목숨 걸고 아이를 낳아 악착같이 남보다 나은 사람으로 키우려 발버둥 치는 건 내 분신이기 때문이다. 형제자매들이 티격태격하더라도 눈앞이 캄캄한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힘이 되어주는 건 한 부모에게서 난 동기간이기 때문이다.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는 속담이 있지만, 동기간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는 속담도 있다. 여간해선 나눠질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라는 뜻이다.

사진_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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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가족의 특성을 이용해 매사 누군가에게 의지하려는 의존적 성향의 가족도 있다. 자기 스스로 뭔가를 도모하거나 해결하려 하지 않고 가족 구성원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것이다. 툭하면 미루고 떼쓰고 손을 벌린다. 안쓰럽고 측은한 마음에 도움을 주지만, 자칫 이것이 습관이 될 수도 있다. 홀로 최선을 다하다가 어쩔 수 없이 난관에 부딪힌 경우는 가족으로서 당연히 위로하고 도움을 줘야겠으나 혼자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일마저 자꾸 의지하려 한다면 냉정하게 대처할 필요가 있다. 스스로 판단하고 책임지고 자립할 수 있도록 독려해야 한다. 어렸을 때부터 긍정적인 가족애는 충분히 느끼고 공유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야겠지만, 부정적인 의존성은 스스로 극복해 독립심을 갖출 수 있게끔 가족 모두가 도와야 한다. 매번 대신해주고 도움의 손길을 펴는 것이 오히려 사랑하는 가족을 망칠 수도 있다.

어느 가족이나 아픈 손가락 하나쯤은 있게 마련이다. 온 가족이 건강한데, 병약한 사람이 딱 한 명 있기도 하고, 가족 전체가 머리가 좋은데, 딱 한 명 지능이 떨어지는 사람이 있기도 하며, 모든 가족이 심성이 곱고 착한데, 유일하게 거칠고 비뚤어진 사람이 있기도 하다. 가족으로서 그런 아픈 손가락에 더 마음이 쓰이고 사랑을 베풀고 싶은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그로 인해 도움을 주는 내가 자꾸 소멸하듯 힘들고 괴롭다면 진지하게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한다. 이것이 정말 사랑일까, 온전한 가족애일까, 아니면 도덕적 의무감에 나 자신을 점점 궁지로 몰아넣고 있는 건 아닐까 진단해 봐야 한다는 말이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고 사랑을 베푸는 행위로 인해 내가 소진해 가고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닐 수도 있다. 사랑하는 데 자꾸 쓸쓸하고 불행하다면 정상적인 사랑이 아니다. 사랑과 행복은 같이 가는 것이다. 무조건 상대방에게 맞춰주기만 하는 사랑은 행복하지도 않고 오래가지도 못한다.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천재 심리학자로 불리는 중국의 우즈훙은 자신이 쓴 책 『내 영혼을 다독이는 관계 심리학』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랑의 근원은 가족이다. 부모에게서 받은 사랑이 자기 성장의 자양분이 된다. 그러나 완전무결한 가족애는 없다. 자기 의지 없이 희생에 복종하고 통제에 무릎 꿇는다면 외로움만 남는다. 자신의 영역에서 자유를 누려야 한다.”

 

의미심장한 이야기다. 가족은 사랑의 근원이기도 하지만, 잘못하면 희생과 통제를 강요하고 강요당함으로써 외로움만 남는 불행의 근원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결국 가족애를 성장의 자양분으로 만드는 것은 중심을 잡고 나만의 자유를 누리려는 자신의 의지에 달렸다.

2021년 세계 시청자들을 사로잡은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서 1번 참가자이자 게임 설계자인 오일남 역으로 열연한 배우 오영수 씨가 한국인 최초로 미국 골든글로브 남우조연상을 받았다. 그가 한 방송사에 출연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산전수전 다 겪으며 수많은 인생을 대신 살아온 그의 대답이었기에 어떤 명대사보다 더 진하게 가슴을 울렸다.

 

“가장 행복한 순간은 언제인가요?”

“가족끼리 같이 앉아 식사하면서 아이는 아이 대로 자기 이야기를 하고, 할아버지는 할아버지 대로 자기 이야기를 하면서 그렇게 사는 가정이 가장 행복한 가정이 아닌가요?”

 

※ 본 기사에 등장하는 사례는 이해를 돕기 위해 가공된 것으로 실제 사례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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