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상처투성이였던 그 시절의 나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3) 절대적으로 나쁜 관계는 분명히 존재한다.(1)

정신의학신문| 권순재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우리의 정신을 구성하고 우리의 정신이 움직이는 방식을 정하는 인간관계. 우리는 누구와 함께 하느냐, 그 사람과 어떤 관계를 쌓아왔냐에 따라 전혀 다른 정신을 가지게 되고, 누구와 함께하느냐에 따라 더 건강하고 적응력이 있는 사람이 될 수도, 그렇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물론 처음에는 나쁜 관계로 시작하더라도 노력 여하에 따라서 좋은 관계가 되기도 하고, 어떤 관계는 나쁜 관계라 하더라도 우리를 강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문제는, 우리를 무력화시키는 절대적인 나쁜 관계가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어떤 관계는 우리로 하여금 본능을 잊게 만듭니다. 그 본능이란 자유를 추가하고, 행복해지고자 하는 생물로서의 당연한 본능입니다. 이렇게 독성을 가지는 관계 안에 있게 되면 인간은 사람마다 각자 고유한 목표와 욕구가 있고, 인간이 태어난 것은 이를 실현시키기 위함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 독이 되는 관계는 벗어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이러한 관계는 반사회성을 가진 아주 특이한 사람과의 관계에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의외로 아주 평범한 사람도 독이 되는 관계의 일원이 될 수 있습니다. 특정한 시간, 특정한 공간 속, 즉 특정한 조건이 만들어졌을 때 평범한 사람일지라도 우리에게 아주 나쁜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에 대한 이론처럼 아주 특이하고 분명한 정신병리에서 오는 관계의 방식에 주목하기 보다는 이 평범한 사람들이 독이 되는 관계를 맺는 특정한 상황과 방식을 주목합니다.

한 30대 회사원이 출근할 때 전철에서만 일어나는 공황발작과 구역감으로 저를 찾아왔습니다. 이분이 주로 호소하는 문제는 회사 스트레스였는데, 이분이 말씀하는 것을 들어보니까 성격에 문제가 있거나 특별한 정신병리가 있는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이분의 증상은 대리가 돼서 영업팀에 새로 배속된 시기, 직속상사인 과장 밑에서 일하면서부터 시작했습니다. 이전에 일반사원일 때는 오히려 일도 잘 해서 승진도 빨리 단 편이었고, 일하는 것 자체가 즐거웠다고 합니다. 만약에 증상의 원인이 개인적인 이유이거나 능력부족이었다면 사원이었을 때부터 문제가 있었을 텐데 지금 이 증상이 생긴 건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직책이 그 분에게 맞지 않았거나, 또는 지금 일하는 관계에 문제가 있거나 라구요.

이 분은 본인이 일하는 직속상사인 과장과 문제가 있었습니다. 잘 안맞는 정도가 아니라 사실은 괴롭힘에 가까웠지요. 보고서에 절대 결재를 안해주는 방식으로 괴롭혔다고 합니다. 보고서가 잘못됐다는 이유였는데 그 이유가 내용이 아니라 철자, 점 찍은 것, 그것도 아니면 줄 간격까지 자로 재서 트집을 잡아 계속 보고서를 반려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영업부라서 밖에 나가서 영업도 하고 고객들과도 만나야 하는데, 하루 종일 보고서에만 매달려 제대로 된 일을 하지도 실적을 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일이 늦어지고 영업 성과가 나지 않는 것을 이 과장은 대리가 보고서를 제대로 못쓰는 탓으로 계속 돌리니 30대 회사원의 평가는 계속 낮아지고, 심지어는 주변에서도 무시당하게 됐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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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하자면 이 환자분은 자신의 상사의 완벽주의적 경향 때문에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환자의 상사는 자신이 실수를 하거나 자신의 결재가 잘못되었을 때 책임지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하고 싫어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상사는 자신이 실패를 할 근본적인 가능성을 차단해버립니다. 자신의 부하를 통해서 말이지요. 자신이 결재를 하면 어느 순간에 반드시 실패하는 일이 생길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자신이 책임져야 되거나 결정을 할 일들을 지연을 시키는 것입니다. 계속 보고서를 돌려보내고 결재를 지연시키면 일은 잘 안될지언정 자신은 실패할 일도 없는 것입니다. 대신 자신의 부하가 그 모든 실패를 심리적으로 뒤집어 쓰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받아들일 수 없는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전형적인 병적인 방어기제인 ‘투사’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바로 대표적인 회사에서의 독성관계의 모습입니다. 제 환자의 상사분이 그것을 의도적으로 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상사의 심리적 문제를 뒤집어쓰고 부적응을 일으킨 것은 전혀 엉뚱한 사람인 부하직원이었다는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이 관계를 분석해보면 제 환자분은 상사와 부하와의 관계에서 동등한 인간이자 동료로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상급작의 심리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도구로써 ‘기능’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우리의 정신은 관계와 그 관계에서의 모습 자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독이 되는 관계에 오래 있게 된 대리는 정말로 열등감을 가지고 무능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더 억울한 것은 증상과 불행은 본인에게 나타났지만, 그 원인이 된 결핍이나 열등감은 다른 사람에게서 온 것이라는 점이었습니다.

만일 진료실에서 이 환자의 본인의 정신적인 문제의 원인을 탐색하고, 무의식의 과정을 분석하고 치료하는 고전적인 정신의학적인 방법으로 치료한다면 환자분의 힘든 상황은 해결될까요? 그럴 확률은 적다고 생각됩니다.

환자분이 어떤 깨달음을 얻고 얼마만큼 노력하던지간에 계속해서 상사의 영향하에 있는 한 상태는 계속 나빠지기만 할 겁니다. 이 분이 다시 원래의 건강했던 모습을 되찾는 방법은 단 하나입니다. 자신에게 나쁜 영향을 주는 상에게 벗어나거나, 만일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이 독이 되는 관계가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차단하는 것 뿐입니다.

절대적으로 나쁜 관계는 분명히 존재한다.(2)에서 계속

당신의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권 순 재

권순재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당신의 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
분당서울대병원 전임의
(전) 메디플렉스 세종병원 정신건강의학과장 치매전문센터장
저서 <약한 게 아니라 아팠던 것이다>, <이제 독성관계는 정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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