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전문의 x 힙합 저널리스트 연재 <마음과 힙합> 01

[정신의학신문 : 장창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래퍼 에미넴(Eminem)은 2002년 롤링스톤지에서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노래를 통해 가슴에 쌓인 스트레스를 풀어내지. 내 모든 곡들을 통해서 나는 그렇게 해. 그건 마치 심리치료 시간과 같아. 내가 실제로 나쁜 행동을 하는 대신에 말을 통해 음반에 그것들을 싣지.”
“난 정신과 의사 따윈 필요 없어. 내 음악이 나만의 정신과 의사인 걸. 세상이 나에겐 치료사야. 나는 세상에 내 문제를 다 말한다고.”

정신과 상담이 의미가 없다는 그의 말을 동의하기는 어렵다. 실제로 마음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은 세상에 존재한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 자신의 마음의 고통을 꺼내놓는 것이 힘들 수 있기 때문이다. 국내 연구에 의하면 대한민국 국민 4명 중 1명은 평생 한 번 이상 정신질환에 노출된다. 정신질환이란 마음의 어려움으로 인하여 생활영역에서 기능의 장애를 갖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경우엔 적절한 정신의학적 접근이 도움이 된다. 에미넴도 2005년 슬럼프 이후에 불면증, 약물중독에 시달렸으며 재활기관을 통한 치료를 받았다. 

하지만 힙합을 통해서 가슴에 쌓인 스트레스를 풀어낸다는 그의 표현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말이다. 나는 개인적 경험을 통해서 10대 때부터 지금까지 힙합의 치유 능력을 경험했다. 요즈음 만나게 되는 젊은 환자분들과 함께 힙합을 활용한 치유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힙합의 힘을 다시금 느끼고 있다. 랩과 힙합을 이용한 정신치료는 2000년대 초반 미국에서 처음 언급이 된 이후 지금까지 서서히 발전해가고 있다. 미국 오클랜드 지역에서는 Beats Rhymes and Life, Inc.라는 힙합 치유 전문 기관이 생겨났다. 최근에는 Hip Hop Psych라는 연구단체가 힙합이 정신건강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논문으로 입증하기도 했다. 

음악을 통하여 마음의 긴장이 완화되고, 음악을 이용한 표현과 탐색적 작업을 통하여 감정으로 인한 갈등이 감소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져 있다. 이를 활용한 것이 바로 음악치료(Music Therapy)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우리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기존의 심리치료 영역에서는 생소하면서도 더욱 구체적인 것이다. 힙합을 마음의 치유에 활용하기, 바로 ‘힙합 치유’이다. 힙합으로 청소년들과 젊은이들의 마음의 어려움을 덜어낼 수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이유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보자.
 

사진_픽사베이


힙합은 이미 10대의 주류문화의 한가운데에 있다. 음원 차트를 살펴보면 상위 랭크 절반가량이 힙합 리듬에 기반을 둔 곡들이다. 힙합 경연 프로는 인기 예능프로의 다른 말이 되었다. <고등래퍼2>에서는 질풍노도 10대들의 감성을 담은 랩의 내용에 사람들이 귀를 기울인다. 힙합 치유 시간에 참여하는 젊은 친구들이 말한다.

“이병재의 랩은 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서 좋아요.”
“저도 이 친구처럼 자해에 대해 생각할 때가 있어요.”
“패륜아라는 노래를 들으면서 제가 어머니에게 잘못한 것들이 생각나네요.”
“김하온의 긍정성을 닮아가고 싶어요.”

그들의 삶과 내면의 목소리를 반영하는 음악, 힙합을 10대, 20대 젊은 친구들과 쉽게 만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다. 그리고 이들과 <고등힙합> 너머의 힙합에 대해 경험해나가고 싶다.

함께 듣는 것 자체가 치유적 기능을 할 수 있다. 내면의 소리를 내는 래퍼들의 가사를 접하면서 자신의 삶의 경험, 자신의 삶의 태도, 상황, 주변의 인간관계에 대해 함께 이야기 나눌 수 있다. 개인의 삶에 대해 생각해보고, 통찰을 줄 수 있는 동기로써 작용하는 것이다. 젊은 친구들은 이야기한다.

“선생님이 이런 음악을 같이 들으니까 좋아요. 자해, 우울, 자살에 대한 생각을 하고 이런 이야기하는 노래를 듣는 것 자체가 뭔가 하면 안 되는 것 같기도 해요. 그런데 같이 들으면 뭔가 내 마음을 이해받는 느낌이에요.”

좋아하는 음악을 함께 듣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마음속 움직임을 인정하고 그들에게 공감을 줄 수도 있다. 방어를 해제하는 힘이 있다.

랩을 함께 만드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다. 랩을 만드는 작업에는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 음악 레슨을 따로 받지 않아도 된다. 비싼 악기를 굳이 살 필요가 없다. 나의 생각을 담는 노트와 목소리만 있으면 된다. 또한 힙합 안에는 비트와 라임이라는 안정적인 형식이 제공된다. 이는 그들 내면의 불안정성에 안전지대로써의 포용적 환경(holding environment)으로 기능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즉흥성과 재치, 유머, 비유를 통한 창조 작업은 역동적인 재미와 흥미를 유발한다. 랩의 표현양식을 익히고자 하는 동기가 힘으로 작용하고 성취감을 줄 수 있다는 점 또한 중요한 요소이다. 집단 속에서 진행하게 될 때는 서로의 목소리를 들으며 서로에게 연결된 느낌을 줄 수도 있다.

랩을 내뱉는 것은 결정적인 치유적 요소이다. 내면에만 머물러 있는 목소리를 자신의 내적 장벽을 넘어서서 자신의 바깥을 향해, 세상을 향해 표출하는 과정이다. 랩이 진짜 “내 것”이 되어가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 8마일에서 버니 래빗(에미넴 분)이 보여주었듯 ‘찌질한 나’가 세상과 만남으로 인해 ‘담대한 나’로 성장하는 것이다. 나의 이야기와 나의 정체성이 세상에 닿음으로 나의 영역이 확장되어간다. 랩을 내뱉는 내 안의 격정이 랩을 듣는 이들의 마음에 돌을 던져 또 다른 격정을 일으키고 감정의 정화를 경험하게 한다. 이것이 바로 랩의 인접 분야인 시에서 말하는 ‘파토스’이고 ‘카타르시스’이다.

이렇게 함께 경험하는 랩/힙합은 자가 치유의 기능을 할 수도 있다. 함께 들으며 깊이 생각해본 음악은 이어폰을 끼고 혼자 들을 때에도 내면의 깊은 울림을 줄 수 있다. 각자의 공간에서 가사를 쓰고 랩을 뱉는 행위를 통하여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문제행동을 예방하는 도구로써도 사용될 수 있다. 이것은 마치 라이너스의 담요 같은 이행대상물(transitional object)로 작용하여 세상과 사회 속에서 살아갈 힘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행대상물이란, 예를 들어 처음 어린이집에 맡겨지는 아이에게 늘 함께 있어주던 인형을 허용해줄 때, 그 인형은 아이에게 안정감을 주는 대상으로써 기능한다. 이행대상물은 성장과 성숙을 도울 수 있고, 위기 상황에서 감정의 배출구 역할을 할 수 있다.

 

힙합은 폭력성과 선정성을 지닌 음악이라는 편견 어린 시선을 오랜 시간 동안 받아왔다. 물론 그런 측면이 없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더욱 본질적인 힙합의 특성은 바로 그 시작에서부터 소외되고 중심에 서지 못했던 사람들이 내는 목소리였다는 점이다. 이미 힙합이 그동안 보여주었듯 힙합을 통해 이야기할 수 있는 긍정적인 내용들이 적지 않다. 가족의 중요성, 긍정적 역할 모델, 인내, 회복탄력성, 자아상에 대한 생각, 변화, 미래를 위한 노력 등. 이제는 우리가 내면의 고통으로 인해 소외되었던 청년들에게 마이크를 넘겨줄 때다. 내적인, 외적인 장벽을 넘어서 그들 스스로 그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줄 때다. 이제는 세상이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차례다.

 

 

* [마음과 힙합]은 힙합을 사랑하는 정신과 의사 장창현과 힙합 저널리스트 김봉현이 마음과 힙합의 연결고리에 대해 다양한 측면에서 이야기를 풀어가는 연재물입니다.

 

장창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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