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전문의 x 힙합 저널리스트 연재 <마음과 힙합> 03

[정신의학신문 : 장창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강렬한 정치적 메시지로 유명한 전설의 힙합 그룹 퍼블릭 에너미(Public Enemy)의 메인 엠시 척 디(Chuck D)가 쓴 '랩과 힙합 역사의 오늘(This Day in Rap and Hip-Hop History)'이라는 미국 힙합 역사를 총망라한 책이 있다. 이 책에서도 다른 힙합 역사를 다룬 여러 자료들과 마찬가지로 디제이 쿨 허크(DJ Kool Herc)의 음악적 혁신의 현장을 힙합의 시작으로 얘기한다.

디제이 쿨 허크가 호스트 디제이로 활약했던 뉴욕 브롱크스 세즈윅 에비뉴 1520번지에서의 “백 투 스쿨 잼(Back to School Jam)” 블록파티에서 그는 이전과는 다른 실험적인 방식으로 음악을 틀었다. 곡 전체를 트는 것이 아니라 두 대의 턴테이블을 이용해 훵크(funk)나 알앤비(R&B) 음악의 “브레이크(break)”라고 불리는 리듬 섹션을 번갈아 가며 반복해서 틀었다. 댄서들이 열광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였다. 이는 훗날 브레이크 댄스의 기원이 된다. 래퍼 코크 라 락(Coke La Rock)은 이 브레이크 비트에서 파티의 흥을 돋우기 위해 마이크를 잡고 즉흥 랩을 뱉어대기 시작했다.
 

사진_픽사베이


척 디는 힙합의 두 번째 장면으로 다음을 꼽는다. 같은 해 11월 12일 뉴욕 브롱크스 갱단 중 하나인 블랙 스페이즈의 멤버였던 아프리카 밤바타(Africa Bambaataa)가 유니버설 줄루 네이션(Universal Zulu Nation)을 만든다. 아프리카 밤바타는 이 조직을 통해 갱단원들과 방황하는 청소년들에게 삶을 올바른 방향으로 돌리는 동력으로 힙합 문화를 사용하고자 했다.

유희로서의 힙합, 사회적 메시지로서의 힙합, 힙합 역사의 시작에 자리한 중요한 두 장면이다. 한 영화를 통해 유희 추구와 사회적 치유라는 복합적이면서도 중요한 기능을 하는 힙합의 단면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바로 <러블킹즈(Rubble Kings): 힙합의 탄생>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배우 짐 캐리가 제작을 맡아 화제가 된 이 영화는 한국에서 힙합 이해의 중요한 가이드가 되는 행사 중 하나인 제2회 서울힙합영화제의 폐막작이기도 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60년대에는 마틴 루터 킹, 말콤 엑스, 로버트 케네디와 같이 흑인 인권 신장을 위해 활약했던 영웅들이 암살당했다. 청년들의 희망은 사라지고 분노가 자리 잡았다. 격동의 60년대는 폭동의 70년대를 몰고 왔다. 이러한 상황은 도시 재개발 계획의 실패로 어둠의 그림자가 몰려오던 뉴욕시 또한 마찬가지였다. 일자리는 사라졌고, 연방정부도 사회안전망을 파괴해나갔다. 도시건설가 로버트 모지스(Robert Moses)는 뉴욕의 다양한 공동체를 밀어버리고 크로스 브롱크스 고속도로 건설을 진두지휘했다. 백인들은 교외 지역으로 빠져나갔고 흑인 빈곤층만이 남았다. 브롱크스는 범죄 다발 지역으로 변해갔다.

사우스 브롱크스는 범죄율, 빈곤율, 실업률이 높을 뿐 아니라 방화사건의 발생률도 높았다. 10년 동안 3만 채의 건물이 불에 탔다. 악덕 건물주들은 전기와 수도를 끊고 자신의 아파트에 불을 질러서 높은 보험비를 받아냈다. 70년대 초에 브롱크스의 주 수입원은 범죄였다. 도시의 잔해와 혼란 속에서 갱단들은 무수하게 성장했고, 황무지가 된 도시를 어둡고 위험한 놀이터로 만들었다. 당시 경찰이 추산한 뉴욕시 갱단원의 수는 수십만 명에 이른다. 일원이 되지 않으면 피해자가 되는 현실 속에서 청년들에게 대안은 보이지 않았다. 옳고 그름보다 생존이 중요한 상황이었다. 갱이 브롱크스 전역을 분할하고 있었다.

 

게토 브라더스(Ghetto Brothers)는 브롱크스의 여러 갱단들 중에서도 눈에 띄는 존재였다. 1천 명 이상의 멤버를 자랑하는 가장 큰 규모의 갱이기도 했지만, 공동체를 위한 선행을 하는 온건하고 존경할만한 단체이기도 했다. 그들은 전 세대 흑인 운동 단체인 블랙팬서(Black Panthers)의 지역사회를 위한 공헌을 본받았다. 거리로 나온 아이들을 다시 학교로 돌려보냈고, 무료 식사 제공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의료 봉사활동도 펼쳤다. 그들은 또한 음악을 사랑했다. 게토 브라더스 안에서 라틴 록 밴드를 만들어 클럽하우스, 파티에서 라틴풍 락음악에 소울을 더한 음악을 흥겹게 연주했다. 매주 금요일마다 파티를 열어 음악 안에 평화의 메시지를 담아 세상에 전하고자 했다.

"우린 너희를 높은 곳으로 이끌 거야(We're gonna take you higher)"
- 게토 브라더스의 <Ghetto Brothers Power> 중에서

1971년, 게토 브라더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브롱크스의 갱단의 폭력 수위는 극에 달했다. 거리에서는 사상 유래 없는 전쟁이 끊임없이 벌어졌다. 갱단이 이렇게까지 날뛰게 된 데는 마약이 큰 원인을 차지했다. 갱단들은 마약을 통해 권력을 얻고, 구역 확장을 하고자 했다. 갱단 간 유혈사태가 일어났다. 하지만 게토 브라더스는 점점 복잡하게 얽혀가는 구역 전선을 돌아다니며 열심히 화해를 중재했다. 새비지 스컬스, 새비지 노마드, 블랙 스페이즈 같은 다른 갱단 멤버들을 불러 더 이상 서로를 상처 입히지 말고 방관자이자 압제자인 정부를 상대로 싸우자고 외쳤다. 글의 서두에 언급했던 아프리카 밤바타 또한 블랙 스페이즈의 멤버였다.

 

하지만 같은 해 12월 8일 비극이 벌어졌다. 세 갱단(봉고스, 세븐 이모틀스, 블랙 스페이즈)이 게토 브라더스의 영역을 습격했고, 이를 중재하기 위해 게토 브라더스의 세 번째 리더이자 ‘평화 사절’이었던 블랙 벤지와 단원 몇 명이 나섰다. 9명의 게토 브라더스는 골목 끝이 안 보일 정도로 늘어선 세 갱단들과 마주해야 했다. 블랙 벤지가 “이봐, 형제들 우린 평화를 제안하러 왔어”라고 말하자 세븐 이모틀스의 한 멤버가 “평화 따윈 엿 먹어”라고 외쳤고, 이후 동료들을 피신시키고 블랙 벤지는 홀로 남아 결국 죽임을 당했다. 이후 사우스 브롱크스는 통제 불능 상태가 되었다. 세븐 이모틀스와 블랙 스페이즈를 치겠다는 갱단이 늘어가고, 벤지의 죽음에 분노 한 사람들은 거리 곳곳을 다니며 모든 것을 불태웠다.

브롱크스 경찰은 특수부대를 동원하고 계엄령을 선포했다. 게토 브라더스의 남은 두 명의 리더, 수아레즈와 멜렌데스는 분주하게 움직였다. 복수심에 불탄 리더 수아레즈는 멤버들을 소집했다. 그 와중에 또 다른 리더인 멜렌데스는 생각이 달랐다. 그는 치솟는 분노를 진정시키고자 했다. 그리고 수아레즈에게 블랙 벤지의 어머니를 찾아가 조의를 표하고자 했다. 수아레즈는 블랙 벤지의 어머니를 보자마자 복수를 해야 한다고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내 아들은 평화를 지키려다 죽은 거야. 다른 아이들이 죽는 건 바라지 않아.” 밤샘 대화 끝에 게토 브라더스의 클럽하우스 앞에 모인 기자단 앞에서 멜란데스가 발표를 했다. “우린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전쟁은 없습니다.”

게토 브라더스의 성명 이후에 그들은 다른 갱단들에게 평화협정을 제의했다. 가장 악명 높은 뉴욕 갱단 40여 개의 대표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하지만 다들 여전히 복수심에 불타고 있었다. 긴장감 속에서 서로에 대한 분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누군가 얘기했다. “백인들은 이런 쓰레기 같은 곳에 살지 않아. 겨울에 난방도 들어오지 않는 게토에는 오지 않지. 그래도 우린 이곳에 살고 있어. 그렇기에 조금이라도 이곳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고 싶다는 거야.” 이 자조적 한 마디가 역사의 방향을 바꾸었다. 브롱크스 역사상 최대의 평화협정이 체결되었다.
 

사진_픽셀


평화협정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브롱크스에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발산되지 못하는 공허한 젊음의 에너지가 외부로 향하는 창조적인 에너지로 바뀌고 있었다. 게토 브라더스는 창조적 활동에서도 선구자 역할을 했다. 게토 브라더스는 500달러의 계약을 통해 <게토 브라더스 파워 푸에르자(Ghetto Brothers Power Fuerza)>라는 앨범을 발매했다. 앨범의 해설집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쓰여있다. “이 앨범에는 게토 브라더스에서 세계로 향하는 메시지가 담겨있다.” 그들은 매주 모든 갱들을 자신의 영역으로 초대해서 금요일 블록 파티를 열었다. 거리 전체에 흥에 넘치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그들은 푸에르토리코 국기와 흑인 해방기 아래에 우리는 하나라는 메시지를 전파했다.

그 이후, 갱단원들은 디제이, 엠시, 브레이크 댄서, 그래피티 아티스트로 변모해갔다. 브롱크스 청년들을 사로잡은 새로운 문화가 생겨났다. 폭력적인 태도가 예술로 승화되었고, 그 안전한 틀 안에서 경쟁을 펼친 것이다. 사람들은 갱단으로 모여들기를 멈추고 디제이가 이끄는 블록파티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디제이 쿨 허크와 아프리카 밤바타의 이야기는 이러한 토대에서 시작된다. 세상은 그들을 외면했어도 그 시대의 청년들이 자신의 터전에서 펼치고자 했던 변화와 치유, 회복에 대한 열망이 힙합 태동의 가장 중요한 에너지가 된 것이다. 청년들에게 유희로 다가갈 뿐만이 아니라 치유로서 작동하는 힙합은 1970년대 뉴욕 브롱크스뿐만 아니라 우리가 발을 디디고 있는 지금 이곳 대한민국에서도 유효하다.

 

장창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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