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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과 힙합] 17. 외상 후 성장
장창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 승인 2019.03.10 11:00

[정신의학신문 : 장창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진료실에서 마음이 아픈 분들을 만나다 보면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그들의 심리적 외상, 트라우마(trauma)와 마주하게 된다. 각자의 이야기를 듣는다. 때론 그 마음의 상처가 너무나도 크다고 느껴져서 온 마음과 온몸을 집중하여 들어드리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지금까지 진료실에서 만나는 분들께 말씀드리지는 못했지만 힙합을 통해 마음의 상처를 가진 모든 분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내용이 있다. 바로 ‘외상 후 성장(posttraumatic growth)’이다.

 

현대의 정신의학은 정신과적 진단을 붙이고, 거기에 맞는 치료를 제시하는 데 익숙하다. 물론 정확한 진단, 증상 완화를 위한 적절한 처방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를 해나갈수록 마음의 고난을 겪는 이들의 인생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심리적인 자원, 사회적인 자원에 대해 파악하고, 고통으로 잠시 가려져 있는 그들의 강점에 귀를 기울이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걸 점점 크게 느끼고 있다.

트라우마를 경험한 이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생존의 위협을 받을 정도의 고통을 경험하고, 이후에도 그 경험과 관련된 기억으로 심리적 어려움을 겪는 경우에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라는 진단을 내리고 불안과 우울을 완화하기 위한 약물치료와 심리치료를 제공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90년대 말부터 마틴 셀리그만(Martin Seligman)을 비롯한 심리학자들은 고통을 없애는 것뿐만이 아니라 좋은 삶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지에 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이 분야를 긍정심리학(positive psychology)라고 부른다.
 

사진_픽셀


‘외상 후 성장’은 긍정심리학의 대표적인 한 영역이다. 트라우마 사건을 극복하기 위해 애쓴 결과 한 사람이 경험하는 긍정적인 변화를 ‘외상 후 성장’이라고 정의한다. 사람의 마음을 점수로 나타낸다면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겠다. 기존 정신의학의 틀에서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를 치료하는 것은 -5점에서 0점으로의 변화에 불과하다. 하지만 ‘외상 후 성장’은 -5점에서 0점을 거쳐 +5점으로 나아감을 말한다. 오해는 말자. 현대 정신의학의 효용을 인정하는 가운데 보완의 의미로 긍정심리학의 한 개념을 활용하자는 것이다.

 

힙합이야말로 ‘외상 후 성장’을 중심에 두고 얘기할 수 있는 음악 장르이자 문화 영역이다. 힙합은 미국 흑인 사회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들이 노예로 처음 미국 대륙에 도착한 400년 전부터 미국 흑인들의 고난과 트라우마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앞서 살펴보았던 힙합의 태동을 떠올려보자. 1960년대에 흑인 인권 신장을 위해 노력했던 지도자들,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말콤 엑스가 암살당했다. 흑인 하층민들은 사회적 안전망을 하나, 둘씩 잃어갔다. 범죄가 그들의 커뮤니티에 만연해 있을 때 평화와 회복을 위한 역동으로 힙합이 태어났다.

‘외상 후 성장’은 수많은 힙합 아티스트들의 삶 속에서도 볼 수 있다. 투팍(2Pac)의 아버지는 암살당했고, 어머니는 감옥살이를 했으며 약물 중독에 빠졌었다. 나스(Nas)는 총기 살인으로, 조이 배드애스(Joey Bada$$)는 자살로 절친한 친구를 잃었다. 프레디 깁스(Freddie Gibbs)는 흑인이라는 이유로 무고하게 투옥되기도 했다. 로직(Logic)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약물중독자였고, 심지어 그의 어머니는 그를 정신적, 육체적으로 학대했다. 하지만 이들은 각자의 트라우마에 매몰되지 않았고, 힙합 아티스트로서 청년들의 삶에 영감이 되는 수많은 명곡들을 남겼다.

 

외상 후 성장을 경험한 한 아티스트를 소개하고자 한다. 그의 이름은 카니예 웨스트(Kanye West)다. 90년대 말부터 프로듀서로 시작된 그의 음악 커리어는 2001년, 명반으로 인정받는 제이지(Jay-Z)의 앨범 <<The Blueprint>>에 참여하면서 승승장구한다. 주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래퍼로서의 데뷔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2002년 10월 어느 날 새벽, 로스앤젤레스에서 다른 아티스트들과의 작업을 마치고 차로 호텔로 돌아가던 중 졸음운전으로 다른 차와 충돌한다. 턱이 세 조각으로 부서졌다. 철심을 박아서 턱뼈를 다시 맞추는 수술을 몇 번에 걸쳐 해야 했고, 얼굴 피부 이식 수술까지 받아야 했다. 고통 속에서 지난 삶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고 그는 회고했다.

하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재활의 시기를 기회로 삼았다. 사고 전까지는 다른 래퍼들의 곡 작업을 하느라 항상 시간이 모자랐지만, 수술 후 회복 기간 동안은 다른 작업의 압박 없이 오롯이 자신의 데뷔 앨범 <<The College Dropout>> 작업에 몰두할 수 있었다. 그는 갱스터랩이 힙합 씬을 지배하고 있었던 때에 자신의 치명적 교통사고, 삶과 죽음, 신념, 신앙, 가족에 대한 진심을 노래하는 새로운 개념의 명반을 만들었다. 이 앨범의 백미는 자신의 사고로 인한 트라우마와 ‘외상 후 성장’을 노래하는 <Through the wire>다. 원곡인 여성 알앤비 가수 샤카 칸(Chaka Khan)의 <Through the wire>의 후렴구를 곡의 속도를 높여 더 높은 음역대의 목소리로 만들어 샘플링했다. “어떠한 위기가 와도 극복하겠다”는 후렴구의 내용과 하이 피치 샘플링은 극한 상황을 이겨냈다는 카니예의 랩과 참 잘 어울린다.
 

I still won’t grow up, I'm a grown ass kid 
아직 난 철들지 않았어, 몸만 큰 꼬마지.

Swear I should be locked up for stupid shit that I did 
내가 저지른 멍청한 짓 때문에 병원에 갇혀 있어야 했지.

But I'm a champion, so I turned tragedy to triumph 
하지만 난 전사야. 그래서 비극을 승리로 만들어냈어.

Make music that's fire, 
마치 불이 붙은 것처럼 끝내주는 음악을 만들었고, 

spit my soul through the wire 
부러진 턱을 고정시키는 철사를 끼고서도 내 영혼의 목소리를 내뱉어. 

- Kanye West <Through the wire> 중에서 -

 

여담이지만, 누구보다도 흑인 커뮤니티의 의식의 깨어있음을 중요시하던 카니예는 최근 인종차별적 발언을 서슴지 않는 트럼프 대통령을 지지하고, 흑인 노예제는 흑인들의 선택이었다는 인터뷰를 하여 논란이 되었다. 카니예의 음악에 감동을 받았던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의 엉뚱한 행보에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감동적인 노래를 만든 그의 진심과 음악적인 능력을 부인하긴 힘들다. 그는 2018년 새 앨범 <<Ye>>의 표지에 다음과 같은 문구를 썼다.


I hate being bipolar. It's awesome!
양극성장애가 너무 싫어. 그건 끔찍해!

- Kanye West <<Ye>>앨범 표지에서 -

 

그는 2016년 극심한 정신적 고통으로 UCLA 대학병원 정신건강의학과 병동에서 8일 동안 입원치료를 받기도 했다. 정신과 의사로서 조심스럽게 예측하기로는 그가 가진 마음의 병, 기분장애(mood disorder)의 일종인 양극성장애(bipolar disorder)가 그의 괴짜 행보와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 얘기를 조금 해보려 한다. 정신과 의사가 된 후에 경력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마음의 어려움을 겪은 일이 있다. 정신과 의사가 되면 마음이 힘든 일은 없을 줄 알았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착각이었다. 새로운 진로를 결정할 시기에 정말로 공부하고 싶은 분야가 있었다. 암 환자 분들의 마음 건강에 대한 분야인 정신종양학이었다. 하지만 한두 선배님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새로운 분야에 대한 나의 도전에 우려의 뜻을 표했다. 자신들의 조언을 무시할 경우에 경력이 단절될 거라는 절망적인 예측을 하며 내게 경고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실패할까 봐 두려웠다. 새로운 분야를 공부하기로 했던 결심을 무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Through the fire>를 들으며 이런 생각을 했다.


‘그 길이 어떤 길이든지 죽기 전에 내가 정말로 해보고 싶은 걸 하고 죽어야 하지 않을까.’
 

사진_픽사베이


그때에 가족들은 나의 선택을 믿어주었고 나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내가 공부하고자 했던 분야로 도전하기로 결국 마음을 먹었다. 하고 싶어서 하는 공부는 정말 재미있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지금은 비록 같은 공부를 계속해서 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때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암환자의 정신건강에 대해 공부하고자 했기에 죽음을 앞둔 환자분들을 만나 뵐 수 있었고, 그분들의 마음을 살필 수 있었다. 그리고 마음이 아픈 분들의 마음을 좀 더 세심하게 살필 능력을 키울 수 있었다. 동시에 나의 죽음조차도 먼 일이 아닐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정말로 하고 싶은 걸 하고 살겠다고 결심했다. 과정에서 여러 고난을 만났지만 이런 내 결심은 새로운 길을 걸어가는 데 힘이 되어주었다. 그 과정의 끝에 지금은 정신건강의학과 이용의 문턱을 낮추는 활동을 하고, 힙합과 정신의학의 연결 가능성을 고민하고 있다. 심적 갈등의 상황 속에서 이센스가 랩을 한 <독>을 통해서도 많은 위로를 받았다. 이 곡을 들으며 나뿐만 아니라 마음의 상처를 받은 세상의 많은 이들을 생각했다.
 

다치기 싫은 마음뿐인 넌 가만히만 있어
그리고 그걸 상식이라 말하지
비겁함이 약이 되는 세상이지만
난 너 대신 흉터를 가진 모두에게 존경을 이겨낸 이에게 축복을

- Primary (featuring E-Sens) <독> 중에서 -

 

최근 한 여성이 진료실에 내원했다. 학교의 부당한 대우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로부터 배제되고, 얼마 안 되어 가족을 잃은 슬픔까지 겹친 선생님이었다. 그나마 다행히 직장에서의 억울함은 풀리게 되어 근무 복귀를 앞두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수개월 전에 먼저 떠나보낸 가족을 향한 슬픔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서는 그동안 참았던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져 내렸다. 안타까움을 표정으로 나타내는 것 외에는 내가 해줄 수 있는 별다른 게 없었다. 대화가 끝나기 전 그녀는 나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선생님, 제 마음 하나 추스르기 힘든 제가 좋은 선생님이 될 수 있을까요? 다시 학교로 돌아가도 괜찮은 걸까요?”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지 순간 망설여졌다. 1초가 1분 같이 길게 느껴졌다. 깊은 고민 중에 단 한 가지 전할 말이 떠올랐다. 조심스럽게 대답을 건네었다.


“적어도 한 가지는 말씀드릴 수 있을 거 같아요. OO님과 같은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경험을 한 학생들을 OO님은 누구보다 잘 위로하실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어요.”


마지막으로 내가 건넨 말을 듣고 그녀는 아주 작은 미소를 지으며 고맙다는 말을 해주었다. 면담은 안정적으로 마무리되었다. 큰 심리적 트라우마를 입은 분들을 종종 만난다. 물론 그분들의 힘든 심리 증상을 완화시키는 것도 중요한 치료 과정이다. 하지만 위의 사례를 경험하면서 중요한 치료자로서의 미덕 하나를 다시금 되새긴다. 바로 상처 받은 분들의 삶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 속에서 함께 의미를 찾는 작업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작거나 큰 삶의 역경을 만나게 된다. 그러한 역경이 한 개인의 예외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이야기임을 바라볼 수 있다면 그 역경을 넘어 우리는 함께 성장해갈 수 있을 것이다.

 

링크 1: Kanye West <Through the wire>
https://vimeo.com/249595348

링크 2: Chaka Khan <Through the fire>
https://www.youtube.com/watch?v=ymuWb8xtCsc

링크 3: Primary (featuring E-Sens) <독>
https://www.youtube.com/watch?v=6mQGlyZ1Vb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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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창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memorylan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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