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강남 푸른 정신과, 신재현 전문의] 우리 몸과 마음은 분명 지쳐 있습니다2021년, 소의 해가 소걸음처럼 느릿하지만 성큼 다가왔습니다. 이미 새해로 접어들어 며칠 지난 시점입니다. 저마다 새해의 각오를 새롭게 다지고 송구영신(送舊迎新), 묵은 것들을 흘려 떠나보내고 희망찬 것들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하고 계실 테지요.2020년은 코로나 바이러스로 전 세계가 들썩였던 한 해였습니다. 우리의 삶이 바이러스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 찼었지요. 그로 인해 삶의 형태 또한 많이 달라진 시기였습니다. 마스크와 손 세정제가 삶의
전 세계에 걸쳐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가장 많이 연주되는 곡은 단연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다. 종교를 떠나 많은 사람이 크리스마스 시즌에 이 곡을 듣기 위해 연주회장을 찾는다. 작년까지도 예외가 없었다. 그러나 올해는 사정이 다르다. 코로나 사태로 모든 연주회장이 문을 닫은 때문이다. 국립합창단이 서울 잠실 롯데콘서트홀에서 연주할 예정이던 공연을 취소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예상은 했지만 막상 현실로 다가오자 씁쓸함이 밀려온다. 헨델의 대표곡이자 그를 출세의 반열에 올려놓은 이 작품은 그가 고난과 위기에 처해 있을 때 기적처럼
가을과 가장 잘 어울리는 음악가가 브람스라면 가을과 가장 잘 어울리는 악기는 뭘까? 아마도 첼로가 아닐까? 네 줄의 현에서 울려 퍼지는 깊고 넓은 중저음은 다른 악기가 줄 수 없는 따뜻함과 평온함을 준다. 그것은 존재의 심연에서 길어 올린 신비의 울림이다.콘트라베이스보다는 작지만, 바이올린의 두 배 크기인 첼로는 피아노와 하프를 제외하면 가장 넓은 음역을 소화할 수 있는 악기다. 비올라나 바이올린이 낼 수 있는 고음 연주도 어느 정도 가능하다는 이야기다.고전주의 시대 때는 오케스트라를 꾸며주는 조연에 머물렀으나 낭만주의 시대 이후
가을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음악가는 누굴까? 세대와 취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많은 사람이 브람스를 꼽을 것이다. 가을만 되면 떨어지는 낙엽 속에서, 옷깃을 여미게 하는 스산한 바람 속에서, 겨울을 준비하느라 부산한 사람들의 발자국 속에서 그가 만든 선율이 들려온다.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제중원이 있던 자리에 지금은 헌법재판소가 들어서 있다. 헌법재판소로 향하는 안국역 2번 출구 사거리에 오래된 찻집 ‘브람스’가 있다. 1985년에 문을 연 곳인데, 말이 찻집이지 전통차도 팔고 술도 판다. 예전에는 출판사들이 종로에 밀집해 있어
오뚝한 코에 짙은 눈썹과 초롱초롱한 눈망울. 초상화 속에 등장하는 그의 모습은 인생의 풍파를 별로 겪지 않았을 것 같은 전형적인 귀공자 스타일이다. 독일 초기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작곡가로 서양 음악사에 큰 획을 그은 슈만은 겉으로 보기에는 이처럼 화려하다.하지만 그는 누구 못지않게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고, 지독한 사랑의 열병을 앓았으며, 정신적 고통으로 몸부림치던 사람이었다. 정신분열증에 시달리다가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그의 위상과는 달리 대중에게 잘 알려진 작품은 많지 않다. 자신의 어린 시절 모습을 그린 ‘어린이 정경’ 제7번
[정신의학신문 : 이두형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아이는 사소한 이유로 운다. 아빠의 출근길에 울고 퇴근해서 안아주기 전에 손을 먼저 씻어서 운다. 이유식 떠먹이는 속도가 느려서 울고 쌀과자를 먹는 횟수에 제한이 있다고 운다. 엄마가 없으면 없어서, 있으면 온전히 나만 바라봐주지 않는다고 운다.이제 8개월 된 아이의 언어는 웃음과 울음이 전부다. 복잡 미묘한 속마음을 온전히 표현하기엔 한참 모자랄 법도 하지만, 아이는 그다지 답답해 보이지 않는다. 아이는 그 한정된 언어를 마음껏 구사한다. 웃을만하면 함빡 웃고, 울만 하
24화 당신의 숲은 어디 있나요? (마지막 회) “비가 오는 거야? 망했네…!”제주도 사려니 숲이었다. 롤라이플렉스(Rolliflex)라는 희한하게 생긴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친구와 좋은 사진을 찍어보겠다고 작정을 한 터였다. 사려니의 정령이 나를 허락하지 않는 것만 같았다. 투두둑 떨어지는 굵은 빗소리에 우리를 사려니 숲 입구까지 데려다주시던 택시 아저씨가 잠시 만류했다. 젊은 호기에 “아니에요~그래도 가볼래요!” 했다. 우비를 입었는데 우산까지 써야 할 지경이었다. ‘비만 안 오면 저 꽃도 찍고, 특이하게 빨간 저 나뭇가지도
17세기를 살았던 많은 철학자 중에 현대에 와서야 비로소 새로이 재조명을 받는 사람으로, 스피노자Baruch de Spinoza(1632~1677, 네덜란드)가 있다. 그 시대는 주장만 할 뿐, 누구도 증명할 수 없는 철학의 테두리 안에 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지나간 시대의 보석들이 과학문명이 찾아낸 결과들과 연결되고 있다.스피노자는 뇌과학이란 말은 꿈도 꾸지 못할 그 시대에, 이미 심신병행론(심신일원론)을 주창하며 17세기를 주름잡던 데카르트Rene Descartes(1596~1650, 프랑스)의 심신이원론에 대응하는 이
[정신의학신문 : 이두형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한 중년의 남성이 진료실을 찾았다. 겉으로는 훌륭한 직장을 다니는 건실한 가장이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어린 시절 학대의 깊은 아픔이 있었다. 부모의 기분에 따라 반복해서 구타를 당했고, 집에서 쫓겨나거나 식사를 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는 이 아픔을 극복하기 위해 수많은 책을 읽어 왔고, 그 과거도 나름의 의미가 있었을 것이라 생각하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해 왔다고 했다. 그렇게 평생을 그 기억과 투쟁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이를 좋게 생각할 수는 없다고 했다.
23화 아직 나는 헤매고 있지만 “내가 원하던 삶은 이런 게 아니었어.”정말입니다. 나는 지금의 제 삶을 단 한 번도 원한 적이 없습니다.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도 없습니다. 상상해볼 수 있었다면, 조금 더 단단한 마음을 준비했을 겁니다. 금전적으로도, 재능적으로도, 삶의 모든 면들에서도 말입니다. 삶은 우리를 상상할 수 없는 곳에 던져놓고, 준비할 수 없게 만들어놓습니다.지금이면 다섯 번쯤은 졸업했을 대학원을 접어야 했을 때도 정말 많이 슬펐습니다. 제 열정이 그만큼 타오른 게 처음이었기 때문입니다. 꼭 해보고 싶던 꿈을 접어
22화 우울한 당신에게 식물을 추천해요 - 2 우울하지만 밖으로 나갈 준비가 되셨다고요? 네, 좋습니다. 그런 당신에게도 식물을 추천하고 싶네요. 밖으로 나갈 준비가 됐는데, 정작 갈 곳 없는 경우도 참 난감하니까요.우선 식물을 구경해야겠죠. 양재동화훼공판장, 강남꽃도매상가, 종로꽃시장 등이 있습니다. 양재동은 절화(잘라진 꽃:우리가 일반적으로 꽃다발에서 보는 꽃)와 분화(화분에 심어진 식물) 화분들을 모두 판매합니다. 그중에서 분화가 더 발달되어있어요. 강남꽃도매상가는 이름대로 절화(꽃)를 주로 판매하고 있습니다. 또한 절화를 담
[정신의학신문 : 이두형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힘든 마음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이 많은, 그래서 위로의 메시지가 간절한 요즘이다. 인터넷의 글로, 책으로, 전문가의 입을 빌려 마음을 다독이는 이야기들이 범람한다. 그 글들은 대개 다음과 같은 내용들을 담고 있다. ‘힘든 것들도 이렇게 보면 꽤 괜찮아. 모든 일에는 괜찮은 면들을 담고 있어. 너는 꽤 괜찮은 사람이야.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앞으로는 좋은 일이 가득할 거야. 다 잘 될 거야.’그런데 마음이 힘들 때 그런 문장을 읽으면 왠지 마음속에 그런 생각들이 따라온다. '정말
21화 우울한 당신에게 식물을 추천해요 - 1 겐차야자(Howea forsteriana) 오르피폴리아(Calathea orbifolia) 휘커스 페타올라리스(Ficus petiolaris) 칼라데아 퓨전화이트(Calathea fusion white) 혹시 이중에 알아보는 식물이 있나요? 식물 얘기를 시작하는데, 외계어 같은 이름부터 나열하니 겁부터 나시나요?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대부분이 외국에서 온 애들이라 이름은 낯설고 어렵습니다. 우선 제가 위에 아이들을 순서대로 보여드릴 테니 구경해보세요. 시원한 잎의 겐차야자부터 알록달록
20화 당장이라도 죽고 싶었다 - 2 집을 나온 뒤에 죽고 싶지 않아졌던 것은 아니다. 우울은 여전히 힘이 세서 나를 뒤흔들었다. 특히 병원에서 상담을 한 날은 감정 소모를 많이 해서였는지 많이 지쳤다. 내 힘들 때의 감정을 끌어내서 다시 마주한다는 것은 굉장히 소모적인 일이다.어떤 날은 상담에서 오해가 있는 말을 듣고, ‘아, 역시 내 잘못이구나’ 싶은 마음에 집에 돌아와서 한참을 운 적이 있다. 울다가 와인이 있다는 게 떠올랐고, 많이 마셨다. 그 순간, 죽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늦은 저녁이 다가왔고, K와 I가 술 마
[정신의학신문 : 의정부 성모사랑 정신과, 유길상 전문의] 와인 많이 좋아하시나요? 어렵게 느껴졌던 와인이 대중화가 많이 돼서 최근에는 백화점, 대형 마트뿐만 아니라 편의점에도 다양한 와인을 판매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와인과 관련된 최신 영화를 한 편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제목은 입니다. 우리는 와인이 유럽을 대표하는 술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와인을 소비하는 계층은 백인 중산층일 것이라고 은연중에 생각합니다. 하지만 영화는 첫 장면부터 이런 고정관념과 편견을 무참히 깨트립니다.20대 초반으로 보이는 흑인
[정신의학신문 : 이두형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한 청년이 진료실 문을 두드렸다. 수의사가 되기 위해 공부 중이었고, 성실함으로 주위 평판도 좋았으며 어울리는 친구들도 많다고 했다. 그런 그가 남모를 고민을 털어놓았다.“선생님. 실은 제가 초등학교 때 은따를 당했어요. 앞에서는 다들 저를 좋아하는 척하면서, 제가 없는 자리에서는 제 욕을 했던 거죠. 우연히 험담을 엿듣게 되었는데, 그게 제 이야기란 걸 깨달았을 때의 충격이 아직도 잊어지지 않아요.”“그 뒤로, 사람들이 같이 있을 때 저를 빼고 아이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하면 그 이야
19화 당장이라도 죽고 싶었다 - 1 이 글에는 우울증으로 자살하고 싶은 사람의 심리가 자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이런 종류의 글에 민감함을 갖고 계신 분은 이 글을 보시는 것을 자제해주세요. “죽고 싶다.”“정말 간절하게 죽고 싶다.”나는 진심으로 죽고 싶었다. 하루에도 수천 번 생각했다. 저번에 그 연예인은 어떻게 죽었다고 했지? 알아봐야겠어. 집은 좋지 않겠어. 레지던스 주인에게는 미안하다. 하지만 내가 집에서 죽고 나면 우리 집 식구들은 집을 잃는다. 시기는 언제가 좋은가. 봄 아니면 가을 겨울이 있다. 여름은 안된다. 내가
18화 약을 금방 끊고 싶은 / 끊고 싶지 않은 당신에게 “약, 어서 끊어야지.”내가 정신병원에 다닌다고 말하고 가장 많이 들은 말이다. 정신과 약이 마치 나를 지옥으로 안내하는 마녀의 약이라도 되는 듯이 다들 그렇게 터부시 했다. 나도 누군가 정신병원 약을 평생 먹으라고 권한다면 생각이 깊어질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 마녀의 약보다 무서운 건, 사람들의 편견이었다. 예를 들어, 우울증, 불안증 환자가 매일 잠을 제대로 못 자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의사는 상담으로 수많은 제안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스트레스의 원인을 찾거나, 바깥 활
17화 일상을 지키는 일 고백하자면, 나는 머리 감는 일이 힘들다. 지저분하다고? 나도 알고 있다. 나는 꽤 긴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는데, 한 번 머리를 감을 때면 스스로 어르고 달래고 혼내고 설득한다. 단순히 머리가 길어서는 아니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이 일반적인 사람들과 다른 점은 보틀넥(bottleneck : 장애물)이 있다는 것이다. 단순한 일상의 일들이 이유 없이 힘들거나 불가능해진다. ‘일상’은 ‘날마다 반복되는 생활’이고, 매일 해야 하는 일 중에서는 무의식적으로, 단순 반복적으로 해야 할 일들이 꽤 있다. 적당한 시
16화 지난 일주일, 어떠셨어요? “(지난 기간) 어떠셨어요?” 라고 상담을 시작한다. 그럼 나는 지난 며칠을 반추한다. “어…. 3일 정도 정도 우울증이 깊게 왔고요, 이런이런 일이 있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상담을 하면 내 위주로 말하게 된다.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럼 선생님은 “아… 그러셨겠어요.”라고 자꾸 그렇게 내 편을 드신다. 그러면 나는 우쭈쭈 당하는 어린아이처럼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자꾸자꾸 끄집어낸다. 막상 지난 일주일을 설명하는 건 쉬워 보이지만 참 어려운 일이다. ‘월 화 수 목 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