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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미화할 순 없지만, 그때의 나를 만난다면아픈 과거, 그때의 나 자신을 안아주기
이두형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 승인 2020.07.27 08:25

[정신의학신문 : 이두형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한 중년의 남성이 진료실을 찾았다. 겉으로는 훌륭한 직장을 다니는 건실한 가장이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어린 시절 학대의 깊은 아픔이 있었다. 부모의 기분에 따라 반복해서 구타를 당했고, 집에서 쫓겨나거나 식사를 하지 못했다고 했다. ​

그는 이 아픔을 극복하기 위해 수많은 책을 읽어 왔고, 그 과거도 나름의 의미가 있었을 것이라 생각하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해 왔다고 했다. 그렇게 평생을 그 기억과 투쟁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이를 좋게 생각할 수는 없다고 했다.​

“그러셨군요. 그런데, 어린 시절의 OO씨는 너무도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제게도, 이야기만 들어도 그 시절을 어떻게 버텨오셨나 싶을 정도의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해요.”​

“그렇죠.. 지금은 좋지만, 그때 생각하면 어떻게 살아왔나 싶을 정도죠..”​

“한 가지 질문을 드릴게요. 만약에, 지금의 OO씨가 그때의 OO이를 만난다면 어떻게 해 주고 싶으신가요? 그 어린아이, 아픔 속에서 외롭고 또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아이를 지금의 내가 만난다면 어떻게 대하고, 어떤 말을 건네주고 싶으신가요?”
 

사진_픽사베이


아름다운 이야기가 범람하는 요즘이다. ‘너는 너 그대로 괜찮아.’ ‘지금 네 마음이 힘들지라도, 세상엔 예쁜 것들도 많이 있어.’ ‘지금까지는 힘들었지만, 앞으로는 행복을 많이 만나게 될 거야.’ 그러나 진료를 하다 보면, 맥락 없이 전달되었을 때 이러한 메시지들이 어떻게 마음이 아픈 이들을 ‘두 번’ 힘들게 하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삶에 지치고 마음이 상처 받은 이들에게 밑도 끝도 없이 아름다운 이야기들은 부담으로 다가온다. ‘자살을 거꾸로 하면 살자가 된다.’라는 말에는 그가 왜 자살을 떠올리게 되었는지가 빠져 있다. ‘마음은 마음먹기 나름이다.’라는 메시지도 마찬가지다.

깊은 슬픔으로 힘겨워하는 이들에게, 쉽게 쉽게 던져지는 이러한 이야기들은 마치 ‘마음만 똑바로 먹으면 이렇게 행복할 수 있는 것이 삶인데 이 좋은 삶을 살며 너는 왜 그렇게 아파하고 슬퍼하니, 결국 네가 문제고, 네 마음이 문제야.’란 이야기로 들려온다. ​

 

삶의 모든 순간이 아름답지 않을 수 있다. 100년이 조금 안 되는 긴 세월을 살아가며 모든 순간이 기쁘고, 행복하고, 아름답기만을 바라는 것 자체가 무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픈 과거에서도 그 나름의 의미라도 찾아내야 하고, 모든 순간을 괜찮게 기억할 수 있는 것이 행복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과거에 힘들었거나 지금 고통을 지나고 있는 마음에게는 지나치게 무리한 요구이다. 왕따의 기억은 상처이고, 부모로부터 버림받던 기억은 아픔이다. 나를 발전시키기 위한 시련이라거나 되돌아보면 추억인 순간들이 아니다. 아니, 그런 측면이 일부 존재할지라도 그러한 기억의 생채기에서 전해지는 쓰라림은 분명 없었으면 좋았을 아픔이다. 

학대, 폭력, 따돌림.. 그 기억들이 ‘실은 좋았던 것, 어떻게든 좋게 생각해야 하는 것, 잘 생각하면 좋은 면도 있는 것’이라 표현되면 그로 인해 그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은 한 번 더 눈물짓는다. 기억을 억지로 아름다운 색으로 채색할수록 그 빛깔은 왜곡되고, 짙어지고, 종국에는 어두워진다. ​

 

그래서 나는 제안하곤 한다. 억지로 과거의 아픔을 미화하려는 대신 그때의 나를 떠올려 보면 어떨까요. 

중요한 실패 앞에서 좌절하던 그때의 나, 대처할 수 없는 구타 속에서 떨고 있던 그때의 나, 이유 없는 따돌림 속에 늘 혼자 울던 그때의 나, 받아들일 수 없는 이별 앞에서 길 잃은 듯 헤매던 그때의 나. 혼란함과 절망 속을 어떻게든 버티고 있는, 어린 나. 그때의 나 자신을, 지금의 내가 만난다면 어떨까요.​

마음속에서 그 나를 만나면 지금의 나는 그 아이를 어떻게 대하고 싶을까. 좀 더 똑바로 살라고, 잘해보라고 세상이 내게 다그치는 대로 그 아이를 윽박지르고 싶어 질까. 

아마 아닐 것 같다. 그 대신, 그 떨리는 작은 어깨를 한층 커진 지금의 손으로 잡아주고 싶지 않을까. 시간이 지나면 많이 괜찮아진다고, 그때의 네가 살아준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다고, 지금도 여전히 아플 때가 있지만 내 삶이 있다고, 그 아픔의 시간을 견뎌주어서 고맙다고, 애틋하게 안아주고 싶지 않을까. 

 

그 아이를 지금의 내가 만난다면 어떻게 대하고, 어떤 말을 건네주고 싶으신가요?라는 질문에 그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조용한 눈물이 떨어지긴 했지만 소리 내어 울지는 않았다. 그리고 나직이 말했다. 먼저 아무 말 없이, 한참을 안아주고 싶다고. 그리고 많이 힘들지, 고마워, 라는 말을 해주고 싶다고 했다.​

십 분이 채 되지 않는 대화가 없었던 그 시간 동안 아마 그는 실제로 마음속에서 어린 자신을 만나고, 그 가엾은 아이를 안아주고 왔을 것이다. 말 없는 그 시간 동안의 그의 슬프고도 따뜻한 눈빛은 누군가를 안아주는 이의 그것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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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형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info.psy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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