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신림 평온 정신과, 전형진 전문의]
유치원생 아들을 키우고 있는 친구의 가장 큰 고민은 아이가 소심하고 낯가림이 심하다는 것이다. 친구도 어릴 적에 조용하고 소심하여 사회성을 기르는 데 꽤 고생했었다. 그 때문인지 친구는 자신감 있고 사교성 좋은 성격이 최고의 미덕이라 믿으며, 아이가 활동적인 능력을 기를 수 있도록 태권도 학원에 등록했다.
비슷한 맥락으로 인터넷에서 떠도는 유머 이야기가 있다. 한 네티즌은 어렸을 때 성격이 급하고 산만했다. 어머니는 그가 차분해지고 집중력을 길렀으면 하는 바람으로, 그를 주산학원에 보냈다. 하지만 주산학원의 실상은 달랐다. 네티즌은 자신과 비슷한 성격의 아이들이 모두 주산학원에 보내졌다는 것을 직감했다. 짓궂은 표정과 큰 목소리로 소리 지르는 수많은 아이들. 그 아이들의 어머니도 네티즌의 어머니와 비슷한 마음이었으리라.
이처럼 아이들은 저마다의 성격과 특성이 있다. 아이들에 국한하기 전에 우리 주변을 먼저 둘러보자. 회사에서 만나는 사람들만 해도, 멀리서 바라보면 평범한 직장인일 뿐이다. 하지만 한 사람과 업무를 떠나 인간적으로 친밀해진다면 어떨까? 말투, 성격, 가치관, 일상을 알아가며 평범한 직장인이 아닌 한 개인으로 보일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나의 인간관계에서 유일무이한 존재가 된다. 세상에는 참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 사람마다 어쩜 이렇게 다 다를 수 있는지 놀라울 지경이다.
어린아이들을 보면 ‘인간의 다양성’이 더욱 잘 느껴진다. 저마다의 특성과 성격이 거침없이 드러나기 때문일까? 좋아하는 것, 잘하는 것, 재미를 느끼는 것 등등 모두 다르다. 식물의 씨앗을 생각해보라. 아무리 다른 씨앗을 섞어 놓아도 고만고만해 보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씨앗이 식물로 자라날 경우에는?
아이들은 각양각색이므로, 자기만의 씨앗을 품고 있을 것이다. 아이를 가진 부모라면 자녀가 어떤 씨앗을 가졌는지, 혹은 어떤 씨앗에 가까운 편인지라고 알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다. 그중에서도 제일 궁금한 것은 우리 아이의 지능이 높은지 아닌지, 어떠한 방향의 재능이 있는가 하는 것이지 않을까? 아이를 잘 키우고 싶은 것은 모든 부모의 소망일 테니 말이다.
하버드 교육심리학과 교수인 Gardner는 IQ와 같이 전통적인 지능의 개념이 지나치게 인지적인 학습능력에 비중을 두었다고 비판했다. 또한 개인이 가진 다양한 영역의 지능을 발전시키고, 발달 가능한 영역이 평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중지능이론(Multipul Intelligence Theory)’이란 특정한 문화적 상황이나 공동체에서 해결해야 할 새로운 문제를 창출해내는 능력을 말한다. 인간은 각자 본연의 사고 형태를 띠는데, 이를 고려하여 양육 및 지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러하다.
1. 저마다 갖고 있을 고유의 사고 형태에서 학습 가능한 방법으로 가르쳐야 한다.
2. 이해한 것을 그대로 표현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
3.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서 자신의 지식과 기술을 활용하는 것을 용인하는 방식으로 평가해야 한다.
다중지능은 언어적 지능, 논리-수학적 지능, 공간적 지능, 신체-운동 지능, 음악적 지능, 대인관계 지능, 개인 이해 지능으로 구분된다. 시대와 환경이 변화함에 따라, 자연이해 지능과 실존적 지능이 추가되기도 했다.
본인 스스로에 대해 생각해보자. 아마 이 중에 한두 개는 ‘이 부분은 나도 괜찮은 편이지’, 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고전적인 IQ는 논리적 추론능력 측정에 치우쳐 있으며, 선진국의 문화 수준에 맞춰져 있다고 비난받기도 한다. 또한 IQ만으로는 신체-운동지능이나 자연이해지능 등을 측정할 수 없다. 특히, 다중지능은 각 영역이 독립적이면서 동시에 상호 작용하여 기능한다.
이외에 더 많은 지능이 추가될지는 모르는 일이다. 중요한 점은 각자가 가진 지능을 우리가 사는 세계에 어떻게 조화시키는가이다. 근래에는 환경문제가 자연지능에 대한 필요성을 대두시켰다. 또한 AI가 발달함에 따라 인간 본성에 대한 질문이 화두가 되면서 실존 지능이 주목받고 있다.
10년 전만 해도 사람들은 정부에서 채택한 정규과정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겼다. 성적이 곧 그 학생의 인생인 듯 대했다는 말이다. 하지만 현재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 자신에게 잘 맞는 분야 및 방향을 모색하는 것을 큰 덕목으로 본다. 아이가 그저 공부를 잘하길 바라는 게 아니라,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았으면 좋겠다는 보호자의 목소리가 많이 들려온다.
어른들도 다를 바 없다. 누구든 자신이 원하는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고 싶어 한다.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는 것은 삶의 만족도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유튜브만 보아도 음악, 요리, 상담, 먹방, 사주 등등 다양한 분야에서 자신의 장점을 발휘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어쩌면 지능이란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잘 할 수 있는지 찾아내는 능력에 가깝지 않을까?
나중에 들은 얘기로, 친구의 아이는 놀이터를 싫어하는 대신 도서관에 눌러앉았다고 한다. 시끌벅적한 어린이 도서관에서 고민도 없이 본인이 읽고 싶은 책을 무 뽑듯이 쑥쑥 뽑아내고, 제일 조용한 구석 자리를 차지한다고.
부모는 아이에게 좋은 것만 주고 싶고, 본인보다 더 행복한 삶을 살기 원한다. 자신이 겪었던 어둡고 힘들었던 순간들을 아이는 경험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러다 보니, 불행의 원인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일면이 아이에게 발견되면 마음이 조급해진다.
잘 키우고 싶은 부모의 마음은 결국 ‘좋은 양육’이란 무엇일까에 대한 질문으로 향한다. 사실 나는 그 친구의 사려 깊음에 종종 반하곤 했었다. 친구가 말하는 소심함의 씨앗이 사려 깊음의 꽃을 피웠다는 걸 알까? 부모, 혹은 어른으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씨앗에게 해가 가지 않도록 건강한 흙을 마련해주는 것뿐이다. 멋진 꽃, 멋지진 않지만 상냥한 냄새를 피우는 꽃, 사람을 살리는 꽃 등 어떠한 꽃을 피울지는 아이의 가능성에 맡겨두기로 하자.
국립공주병원 전공의 수료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회원

